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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2

녹취문: 항상 부르심에 응답만 하다 죽는 인생_태승철(갈라디아서 1:1~1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1.05|조회수7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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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항상 부르심에 응답만 하다 죽는 인생>의 줄거리:

하나님이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부르심에 응답하느라 내 간구나 내 소원을 말할 틈도 사실은 없습니다. 내 간구를 말씀드리느라 항상 부르심을 묵살하지 않고 응답만 하다 죽는 게 본래 인생이고 삶입니다. 범사에 내가 간구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말고 이미 간구하기 전에 내게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세요. 간구하지 않고 응답만 하다가 죽는 것이 가장 복 된 삶입니다.

 

항상 부르심에 응답만 하다 죽는 인생

 

(갈라디아서 1:1~10)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항상 부르심에 응답만 하다 죽는 인생>

응답만 하다 죽는 인생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한심한 인생이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이 부르시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이란 응답만 하다가 죽기에도 바쁜 인생이고 또한 그러한 인생이야말로 최고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상당히 강경한 어조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르심이 언급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는 곧 우리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응답하는 동안에는 소원을 간구할 틈이 없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부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선수 치시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간구하려면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나를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묵살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묵살하지 않고는 간구할 틈이 없습니다. 나의 소원을 간구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임의로 중단시켜야만 하고 무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부르고 계시기에 나의 응답도 언제나 이어져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소원은 제대로 간구해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인의 팔자라면 팔자입니다. 나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먼저 응답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참 내용입니다. 기도는 간구가 아닌 응답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대화라고 한다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중요하게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응답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다가 고린도 교회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마음 아픈 방문도 했습니다. 그 후로 56년에 마케도니아에서 고린도후서를 기록했고, 57년에는 고린도에서 교인들을 만난 후에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두 편지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갈라디아는 지금의 튀르키예의 중앙에서 남쪽에 위치한 넓은 지방입니다. 이곳에는 이고니온 교회, 루스드라 교회, 더베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 교회를 1차 전도여행 때에 세우고 2차 전도여행 때도 방문합니다. 이러한 사역의 열매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이 생겨나고 잘 진행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을 표방하는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거짓 사도들이 문제되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짓 사도란 예루살렘에서 공식 사도들의 집단이 아닌 유대주의를 추종하는 집단에서 임의로 발행한 사도 증명서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거짓 교사로 인한 문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헐뜯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사도 바울이 무지한 소리를 한다고 지적하며 율법과 할례라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들은 일단 그리스도인임을 표방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거짓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부정하였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기관에서 발행한 사도 증명서가 없기에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면,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포함되지 않기에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로부터 이러한 소식을 듣게 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신적 기원을 밝힙니다. 비록 자신이 다른 사도들처럼 공생애 때의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위탁받았음을 강변합니다. 그리고 오직 구원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써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정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갈라디아서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이 시작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 대한 큰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부르심이란 구약성경에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이름을 부르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지금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묵살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은혜”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십자가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지금 나를 향해 “얘야, 얘야”하고 부르시는 것을 외면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많은 주석가와 학자들이 갈라디아서를 사도 바울과 그리스도인임을 표방하는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들의 교리논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목적은 거짓 교사들과의 교리논쟁에서 이기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잘못된 교리로 인해 망가져 버린 갈라디아 지방 교인들의 실제 삶을 재건하는 일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삶의 현장에서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문제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상태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함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식에서 놔버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짊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자아의식 속에 받아들여서 한시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항상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는 곧 우리의 마음이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천국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향하기를 요구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너의 마음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나를 향해 와야 한다. 너의 마음의 흐름이 나를 향해서 지속되어야만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흐름이 하늘을 향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의 흐름이 잠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중단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을 향하여 흘러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면서 소원을 간구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또 우리는 그러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바라는 태도를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와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소원을 간구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막아야 하고 끊어야만 합니다.

전화 통화를 하다 보면 자기 이야기만 하느라 남이 이야기할 틈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는 좋지 못한 모습이지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이것이 맞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분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꾸만 내 이야기를 해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주 급한 돈 문제가 생겼다면 우리는 그 돈 문제를 마음에 담게 됩니다. 이미 마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돈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도 나를 부르고 계셨고 돈 문제가 발생한 후에도 변함없이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의 내용이란 ‘너의 마음은 나에게로 와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에 담기에 앞서 깨달아야만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있었구나! 이러면 안 된다. 내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야만 한다. 돈 문제를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된다.’라고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스스로 돈 문제를 해결하라. 너의 마음을 건강 문제에 사용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주어질지 우리보다 먼저 아십니다. 또한 이 세상의 어떤 전문가도 알지 못하는 해결법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문제시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도 문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연합해야 될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부르시는 장소가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 것을 향하고 담음으로써 더러워지게 되었습니다. 더러워진 마음이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겨야만 합니다. 다만 한 번 씻겼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질 때마다 마음은 다시 더러워집니다. 더러워질 때마다 마음은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겨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 붙잡기를 지속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떠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6절에서 언급한 “다른 복음”이란 바로 이렇게 마음이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게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말이 빠진다면 아무리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8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임을 표방하면서도 이러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경고합니다.

 

저는 신학 이론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독일의 신학계란 예리한 칼날 같은 이론으로 서로가 서로를 치면서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이러한 신학계를 평정한 대가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 대가가 모든 사람의 기립박수를 받을만한 너무나 멋진 강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연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십자가 생활화를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강연은 기립박수를 받았을지라도 저주받아 마땅한 강연이고, 그 강연을 한 사람은 독일 신학계를 평정했을지라도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의 교황이든 개신교 교단의 총회장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는 십자가 생활화를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를 망치던 그리스도인임을 표방하고 있는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강경한 어조로 이러한 상황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나 대한민국 교회에만 적용되는 일이 아닙니다. 세계 교회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물론 십자가를 중시하는 목사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생활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딘가에 그런 분들이 계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복음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경고합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만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흐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오기를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 외에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6절을 보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임이 분명함에도 어떻게 그렇게 다른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오르심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우리가 쓰는 핸드폰은 기지국과 연결되는 단말기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바로 천국과 연결되는 단말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핸드폰이 없으면 통화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에 응답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저를 향해 ‘승철아!’하고 부르신다면 그 음성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거꾸로 타고 우리에게로 전해져오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하나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들려오고 응답할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주의와 행동주의를 강조했습니다. 앞으로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며 계속해서 이야기되겠습니다만 율법주의와 행동주의의 문제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을 담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보이고 들리는 세상의 대상들을 담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이러한 상태를 문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부추깁니다. 마음에 담은 대상을 실제로 손에 넣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행동주의가 나타납니다. 의롭다 여겨지는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 마음에 들면 하나님께서 마음에 담은 세상 것들을 다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와 행동주의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렇게 살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돈이 많은 것을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시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예배당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 것을 많이 갖고 형통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들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예배당 안에서 가난하고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합니다. 축복받는 경쟁에서 뒤쳐진 부끄러운 사람들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좌절하고 형통하지 못하여 실패자가 되었는데 예배당 안에서도 좌절하고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번만 실패하면 되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예배당 안에서 두 번 실패를 겪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와 행동주의적 특성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율법주의와 행동주의는 마음에 세상 것을 담고 있고, 마음이 세상에 머무는 상태를 절대로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마음에 들고자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의롭다 여겨지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봉사, 충성, 희생, 헌금에 대한 강요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본래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 자신을 복으로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은혜로 맺혀야 될 열매를 율법과 교리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이들의 거짓됨을 향하여 치열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서슴지 않고 저주를 선언합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항상 십자가가 몸에 붙어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십자가 생활화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를 하지 않으면 ‘너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게 만드는 모든 가르침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심정을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시간이 되신다면 유튜브에서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서 십자가 생활화를 강조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말하지 않고 간구하자 기도하자고 말하며 율법주의나 행동주의를 주장한다면 저주에 합당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복음과 참 복음을 구분하는 기준을 연습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은 훨씬 단순명료해질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된 삶을 강하게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항상 부르심에 응답하느라 나의 문제는 간구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죽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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