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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약속의 자녀인가 인격적 피조물인가>의 줄거리 :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영적인 태생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태생을 말씀하심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자들이 있다는 점을 밝히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태생을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구분하십니다. 똑같이 아브라함의 자녀인데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 수 없는 사람과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약속의 자녀인가 인격적 피조물인가
(갈라디아서 4:21~31)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본문에 “약속의 자녀”와 “인격적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약속의 자녀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아들로 태어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격적 피조물이란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피조물로 태어나게 계획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똑같지만 약속의 자녀와 인격적 피조물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일까요? 아니면 인격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태어나게 된 피조물의 하나일까요?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영적인 태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출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켜야 될 마지노선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될 일이 아닌 약속된 은혜이자 축복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초등학문에 종노릇하는 모습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면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수고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태생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입니다.
태생의 차이는 태어나기 이전에 결정된 바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 태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태생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던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의 씨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나 영적인 태생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집안에서 나온 두 계열의 차이를 영적인 관점에서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애굽 출신 사라의 몸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본처인 사라가 낳은 이삭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둘 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종 하갈이 낳은 아들은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녀라 하였고 자유인이 낳은 아들은 약속의 자녀라 부르며 계열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를 교회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서로 다른 두 아들이 태어났듯이 교회에서도 서로 다른 태생을 가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야 마는 태생입니다. 두 번째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태생입니다. 이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것이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정해진 태생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아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태생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두 태생이 교인이라 부르는 자들 속에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에 없던 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안에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의 출생에는 아들로 삼겠다는 약속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약속 없이 창조주의 계획안에서 인격성을 가진 피조물로 태어난 것입니다. 반면에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실제로 그 약속을 따라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은 두 계열을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격적인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신 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로 약속하셔서 태어난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태생에는 두드러진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먼저 육체를 따라 태어난 인격적 피조물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살펴보았습니다만 육체를 따라 태어난 인격적 피조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운데 율법과 같은 행위 원칙에 매이게 됩니다. 행위 원칙은 나를 행위의 주체로 삼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행위를 하고자 할 때 근거로 붙잡는 것이 행위 원칙입니다.
종의 계열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도 이러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 주체가 되어서 스스로 생각해야만 하고 행위를 해야만 한다는 주체성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주체성의 요구에 몰려가고 있기에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위를 하는 것 같을지라도 실제로는 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찾는 것조차도 스스로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야 된다는 요구에 몰려가는 상황의 일환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방법으로 보태려고 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절대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익관계에서 하나님을 대하고 있기 때문에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성립하지 못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주체성의 주인으로서 주권을 가져야 한다고 여기기에 하나님의 주체성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를 이루지 못합니다. 결국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서 초월자를 끌어들이는 종교의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관계하게 됩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관계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한편 약속을 따라서 태어난 자유자의 계열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행위 원칙 대신에 아들의 영을 받습니다. 아들이 되도록 약속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아들의 영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우선적 특징은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주체성이 점차적으로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내가 무엇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아들의 영을 받게 되면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는 강박감이 저절로 없어집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없어진 나의 인격적 주체성은 하나님을 좋아하고 소망하는 일에 다 쓰이게 됩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을 주체적으로 맞이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거부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마음에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건재한 집안의 아이들은 자기가 밥벌이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약속을 받은 자들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온전히 이루어질수록 유업을 받을 자라는 신분 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것이 다 내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로부터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하나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것은 내 것이기에 더는 가지고자 할 필요가 없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참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내 삶에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영이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해질수록 세상에 대해서는 바람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내 아버지로 느껴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계가 이루어지면 이상하게도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유업을 받을 상속자의 신분 의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몸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데도 마음에서는 이미 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더는 갖고 싶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해주십니다. 4~5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6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반응이 나오는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육체의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속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4,000년 전에 아브라함이 보았던 하늘의 별들 중에 나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나의 존재를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나의 존재 자체는 아브라함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날 것을 두 번이나 약속해주십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삭에 대한 약속이지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앞서 본 3장 16을 보면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약속을 주실 때 가리키시는 대상은 자손들이 아닌 자손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한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이 태어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삭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들이 될 것이라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듯이 예수님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내 아들 예수야, 앞으로 태승철이가 나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다. 너는 태승철을 아들로 낳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해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셔야만 예수님에게로 올 수 있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이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저 베드로를 칭찬하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알아보도록 가르쳐주셨음에 대해 설명해주십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허락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예수님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는 약속을 주셨고, 여러분 각자의 이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나의 아들 예수야,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너에게로 아무개를 보낼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가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해주신 셈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6장 44~45절을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17장을 24절을 보면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약속해주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오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게 되는 이유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을 이 세상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자유인이자 본처였던 사라를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비유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소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소속이 땅과 하늘로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약속하신 자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땅의 예루살렘에 소속감을 갖게 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예배당에 소속감을 갖는 것이고 인간관계에 매여서 교인을 자칭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가 아닌 자들은 어떤 이유가 되었든지 이 땅에서 소속감의 이유를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약속을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로 이끌림을 받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 밖으로 나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몸으로 입고 그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소속감을 갖게 됩니다.
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로 마음이 가지 않을까요? 왜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가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까요? 왜 여전히 세상에 남아서 세상 것을 좋게 여기며 세상에 소속되기를 원할까요? 그 대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예수님에게 ‘내가 이 사람을 너에게로 이끌어 갈 것이고 나의 아들로 삼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에 입으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세상 것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부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못하기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따라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나님께로 가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어서 하늘로 가려고 해도 우리의 죄적 체질은 끊임없이 우리를 땅으로 끌어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처럼 하늘과 반대 방향의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역방향의 힘과 싸우고 투쟁하려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는데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약속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우리가 그 예수님을 복음으로 전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타락한 피조물인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들을 찾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아들로 약속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도 그 사람들을 찾으려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는 이야기를 한 후에 태생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해산의 수고를 할지라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주체성을 죽이지 못하여 율법주의에 빠지고 행위 원칙에 종노릇 한다면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로 이끄시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약속의 자녀들과 인격적 피조물들이 섞여 살아갑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가 약속의 자녀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전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약속하신 자녀들은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서 마음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도록 약속이 된 사람들은 돌아갈 곳이 있는 탕자입니다. 물론 탕자로 살던 시절이 있었기에 이것을 벗겨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약속의 아들이 아닌 인격적 피조물들은 절대로 십자가 문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약속한 자녀들이기를 바란 것입니다. 저 또한 여러분들에 대해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태초에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약속하신 사람들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아직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려는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보다 더 신비한 일은 없으며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은총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아들의 영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을 눈앞에 밝히 보면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