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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2

녹취문: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만은 싫은 이유_태승철 (갈라디아서 5:1~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1.26|조회수115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는 싫은 이유>의 줄거리 :

정치적, 사회적 자유를 쟁취하고 누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목숨을 바칩니다. '내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는 사실 패트릭 헨리의 입에서 나왔지만 모든 사람의 구호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주시는 자유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싫어합니다. 이 자유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것인데, 구원은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자유는 버리고 삽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는 싫은 이유

 

(갈라디아서 5:1~15)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며 다시는 종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이 말씀은 무척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인류의 구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명한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1770년대 미국의 변호사였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입니다. 당시에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탄압이 강경해지고 있었습니다. 패트릭 헨리는 이들에 맞서 싸우기를 호소하는 연설문에서 이 구호를 외쳤고 이 말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여기서 자유란 소위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로써 정치적, 사회적, 법적 자유입니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보았듯이 사도 바울도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 자유를 너무도 쉽게 버리고 아예 받지도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려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에 대해서는 쉽게 버리고 받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일 큰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유라는 표현은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유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구원받음이란 곧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를 누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버렸습니다. 이것은 결국 구원을 버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누리지 못하고 버렸다면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누리지 못하고, 버린 것과 동일합니다.

 

2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자유를 버리고 다시 행위 원칙에 얽매이는 종노릇을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구세주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4절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행위 원칙에 얽매이는 종의 자리를 고수한다면 구원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버림과 동시에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되고 은혜에서 떨어지고 구원도 잃게 됩니다. 종의 멍에란 행위 원칙에 대한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의 멍에를 좋아하는 특이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싫어합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구호를 보면 자유와 죽음을 양자택일해야 할 관계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유 없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에 대해서도 이 말은 성립할까요? 패트릭 헨리가 외친 민주주의에서의 자유와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비교해보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쉽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버리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죽음과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닌 같이 가야만 하는 관계입니다. 패트릭 헨리 식으로 말해보자면 ‘자유를 얻으려면 죽어야만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위해서는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죽어야만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주어지는 것이 자유입니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자유를 누리려고 합니다. 살아서 누리는 자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멋지게 살기 위해서 자유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세상에서 잘 살고 멋지게 살기를 포기하고 죽어야만 얻는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상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받아서 누리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곧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마음도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 살고 멋지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하기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싫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결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살아서 세상에 대해 죽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도 세상에 대해 더 적극적입니다. 내가 나서서 세상을 살고 싶어 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이 세상 삶에 대한 나의 주체성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 하고,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고, 주체적으로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고 싶어 하고, 스스로 나서서 말하고 행동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주는 죽음의 자유를 누릴 수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체적으로 살아서 얻는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복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여전히 종의 상태이고 자유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헌법이 허락한 여러 가지 자유가 있습니다. 이사 갈 수 있는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의사결정의 자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들은 여전히 내가 이 세상 삶에 대해 주체적으로 반응하며 살았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종인 상태입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세상에 대해서 내가 살아있고자 하는 것은 종들이 하는 짓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주시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흡하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늘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나의 생각이 활성화되려 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의 죽음을 호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며 주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감정이 움직이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일로 슬프거나 기뻐한다면 그 또한 종노릇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고 그 감정 자체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의욕과 결심과 계획이 세워지고자 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죽음을 호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 어떠한 계획도 의지도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이기에 세상에서는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내가 살려고 하는 것이 세상에 종노릇 하는 것인 이유는 행위 원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세상이 정해놓은 행위 원칙에서 찾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행위 원칙을 마음대로 따를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며 오히려 종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야말로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절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사람이 자유를 좋아할 수 없다니 참 모순적으로 들리는 말이지만 실제가 그렇습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데 대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얻었다는 것일까요? 스스로 세상을 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살고 싶은 마음이 죽은 상태가 자유입니다. 이 자유와 구원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살고 싶어 합니다. 얼마나 잘 살고 싶은지 하나님까지 동원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자유를 몰라서 받지 못하고 알아도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2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너희가 세상의 행위 원칙을 준수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구세주가 되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할례는 내가 의무적으로 행위를 해야 된다고 느끼게끔 하는 모든 규정들 즉 행위 원칙의 대표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4장 10~11절을 보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안식일, 월삭,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안식년을 말한다면 요즘으로 말하면 성수주일,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를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을 행위 규정으로 받아들여서 지켰다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속하게 되면 수많은 규칙과 규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켜도 정작 그리스도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의 은혜로부터 끊어지게 됩니다. 주일에 예배당을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당을 가야만 한다는 주체성까지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수요기도회나 금요철야기도회를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예배당을 가더라도 나의 주체성을 따라서 가고 있다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게 됩니다.

 

본문에 의거하여 말씀드리자면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자유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뜻에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 자체가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의무적으로 자유 해야만 합니다. 억지로라도 자유 해야만 합니다. 자유에 의무나 ‘억지로’라는 말이 붙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란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주체성의 죽음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삶에 대해 나대고 싶어 하는 죄적 체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서 살았습니다. 판단이 없는 상태에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내가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기쁘다, 슬프다고 느낄 때 판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 이후에 나타난 일입니다. 본래 하나님만이 삶에 대해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 삶은 하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됨으로써 세상에 매이고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사람은 하늘에 매여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야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 세상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주체적으로 세상을 살아야만 한다고 사람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이 주체적 삶이란 결국 세상에 종으로 매이는 것입니다. 세상은 본래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셔야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 동안 하나님의 주체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 이후의 사람은 체질 자체가 종의 신분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바로 삶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이야말로 종 된 신분의 증거입니다. 이 체질과 싸우려면 자유가 의무입니다.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죽음을 불사하는 각오가 진정한 의미에서 향할 곳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주체가 되기를 원하는 나 자신과 필사적으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이것 하나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감정과 의지를 따라서 살려고 하는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만 생기면 스스로 생각합니다. 스스로 소원을 갖습니다. 어떻게 할지 행위 원칙을 찾습니다. 이렇게 하는 나 자신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종 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 된 상태에서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합니다. 세상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는 것이 실제로는 세상의 종 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본래 세상 따위에 얽매일 사람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 따위, 이 세상에서 돈 벌어 부자 되는 것 따위,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멋진 삶을 사는 것 따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에 종속될 사람들이 아니고 신경 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즐기면서 누리고 천국을 현실로 살아가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죄악이 들어와서 이 세상 따위에 얽매이게 되었고 내가 주체적으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따위에 얽매여서 열심히 사는 것을 자유로 생각하고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세상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 따위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이 죽음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마귀가 우리를 계속해서 세상이 좋다고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우리가 이를 악물고 싸워서라도 얻어야 하는 의무적 자유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보아야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세상 따위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며 스스로 열심히 살려고 하는 나를 죽이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호흡하는 과정을 통하여 억지로라도 자유를 유지시켜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틈만 있으면 나의 마음을 잡아먹고 종노릇 하게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릴 때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늘을 넘나드는 마음을 갖게 되는 상태를 맛보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5절을 보면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계속 호흡함으로써 세상 따위에 의무를 부여할 수밖에 없고, 내가 살아야만 하는 종노릇 상태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럴 때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의 주체성이신 성령이 임하셔서 역사하시게 됩니다. 내 마음에 성령님이 오시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처럼 여기게 하시고 그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하십니다.

또 이어지는 6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행위의 규칙도 내가 기억하고 마음에 담지 않게 하십니다. 내가 세상의 행위 원칙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나를 움직이셔서 행위를 하게 하십니다. 그 모든 행위는 겉으로 볼 때 어떤 모습으로 보이든지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13~14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유를 얻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단순히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 취지의 총합이 이웃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행위를 하는 주체로써 살던 때는 세상 따위에 매여 있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러한 상태로부터 자유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님이 오셔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실제 보는 분처럼 상대하게 하시고 하나님만으로 부자 되기를 소망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을 호흡하고 하늘을 사는 모습입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감에 있어서 단 하나의 행위 원칙에도 구애받지 않게 하십니다. 오직 성령께서 나를 움직여 가실 때에는 그 모든 행위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의 취지는 이웃 사랑으로 망라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 원칙도 지키려 하지 않는데도 나로부터 나타나는 행위가 율법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할 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자유는 곧 이 세상의 행위 원칙을 따르고자 하는 주체성의 죽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주체성이신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나를 움직여 가시게 됩니다. 어떤 행위 원칙에도 매이지 않는데 나의 행위가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형태가 야단을 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부드럽고 온유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사랑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자유를 버립니다. 세상 따위에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따위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세상 따위에서 기쁨과 좋음과 만족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마음의 진정한 채움을 위해서는 세상은 답이 될 수 없습니다. 배우자도 따위고, 자녀도 따위고, 일의 성공도 따위입니다. 그 따위 일로 우리의 마음은 온전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창조주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돈 따위로, 건강 따위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따위에 얽매임을 좋아하고 세상 따위에 얽매여서 나대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거짓 자유를 죽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진정한 자유입니다. 이 자유가 싫다면 구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호흡해서 세상 따위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령의 주도하심 아래에서 모든 행위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자유를 싫어하는 못된 자유가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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