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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홉 가지 열매로 살고 행하는 성령 인생>의 줄거리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으로 사는 것과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어떻게 구분이 된다는 뜻일까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통해서 살기와 행하기의 구분되는 내용을 알아봅니다. 성령은 살아계신 인격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는 일상의 삶의 원리가 되십니다. 먹고 자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는 모든 일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홉 가지 열매로 살고 행하는 성령 인생
(갈라디아서 5:16~2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본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언급되는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감사한 내용입니다. 우리에게 성령님이 오셨다면 나머지 인생은 성령께서 사시게 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그 내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 전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습니다. 그렇기에 의식하거나 의도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욕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육체와 밀착하게 되면 육체로 만나는 것들 중에서 채움을 얻으려고 합니다. 육체로 만나는 세상을 바라고, 소원하고, 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24절에서 말하고 있는 정욕과 탐심이고, 이로부터 육체를 따라 행하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비롯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마음이 육체와 밀착된 상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 마음은 육체와 분리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이 육체에 붙어서 세상 것을 바랐고 얻고자 하여 주체성을 발휘했고 그 결과는 지정의와 언행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마음과 육체의 분리가 일어나게 되면서 마음은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다.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고, 이 땅에 남은 몸에 대해서는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시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행함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본문에서 언급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한편 25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또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얼핏 사도 바울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성령의 아홉 가지의 열매를 살펴보면서 생각해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성령 인생을 실제로 시작해볼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행함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나의 인격의 열매가 아닙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란 내 안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나타내시는 일이지 우리의 인격이 변화됨으로써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상태이자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상태를 유지할 때만 성령이 오셔서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 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끊어진다면 더는 성령의 열매가 맺힐 수 없고 다시 육체를 따라 행하는 인격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의 인격이 맺는 열매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상에 대한 정욕과 탐심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내용을 19~21절에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성령께서 맺히게 하시는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2~23절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성령으로 사는 내용이고,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성령으로 행하시는 내용이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말씀을 보자면 먼저 사랑이 언급됩니다. 사랑은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이후에 언급되는 내용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나님 사랑에는 내가 받는 사랑과 내가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먼저 받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나를 곁으로 부르셔서 당신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제공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는 사랑이란 오직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만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소 추상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보자면 내 몸에 대해 관심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해 관심하는 것입니다. 내 몸보다, 내 가족보다, 내가 아는 사람들보다, 내 나라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함이 사랑함의 기준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만큼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을 평생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의 열매로 언급되는 것은 희락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희락 곧 기쁨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소망하는 상태가 온전해야 한다는 것이 기준입니다. 그럴 때 돈이 있든 없든, 몸이 아프든 말든, 삶이 형통하든 말든, 가족 간의 관계가 어떠하든, 세상에서 무슨 일어나도 마음에서는 기쁨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세상이 전혀 상관없을 만큼 하나님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준이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구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구하기만 해도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생깁니다. 마음의 소망이 하나님만을 향한 것이 분명하고 세상과는 상관없음이 분명할수록 기쁨도 분명해집니다. 사업과 상관없이, 몸의 상태와 상관없이, 가족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기준으로 소망할 때 반드시 기쁨이 생깁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고 여러분이 아멘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기쁨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세상일들과는 상관없이 아버지로 채워지기를 소망할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기쁨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소망이 분명하고 구체적일수록 성령이 주시는 기쁨도 분명해집니다.
세 번째로 성령의 열매로 언급되는 것은 화평입니다. 하나님만이 마음의 채움 거리이심을 확인해 나갈 때 성령께서는 나에게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이심을 알려주십니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일이 화평입니다. 화평은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가장 높은 관심거리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마음에서는 24시간 채워지기 위한 욕구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욕구의 대상들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높은 우선순위로 유지되는 상태가 화평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들을 우선적인 욕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바람을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한쪽에서 바람을 피우는데 가정이 화평할 수 없듯이, 세상을 욕구하는 동안 하나님과 화평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건강했으면 좋겠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을 갖는 동안 마음에서는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바람을 갖는 것이 곧 세상과 바람을 피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전 같았으면 세상에 대한 바람을 수십 수백 번은 가졌을 텐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자 오직 하나님만이 기쁨이심을 알고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세상일은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어도 상관없을 만큼 하나님 아버지만을 갖고자 하는 소망이 유지될 때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정리해보자면 화평이란 앞서 말씀드렸던 하나님과의 사랑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화평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가장 우선적인 화제의 대상이셔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바람을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일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만 유일한 기쁨이신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한다는 것은 언젠가 이루어짐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을 때 하나님을 만날 것이고, 살아서도 하나님과 연합하는 정도가 깊어지고 하나님과 친해짐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이 사랑과 희락이 유지되는 상태가 화평입니다. 여기까지가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연관되어서 일어나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곧 존재입니다. 존재의 차원을 성령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성령으로 행하시는 삶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열매로써 오래 참음이 언급됩니다. 이 말씀의 구조를 보자면 성령으로 사심과 행하심 사이에 오래 참음이 끼어있는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하는 성령으로 사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들어가 삶을 멈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는 길이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육체를 통해 삶의 현장을 살아갑니다. 다만 내부적으로는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마음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유지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럴 때 몸의 오감을 통해서 접하는 삶의 현장에 대해서 참음이 필요합니다. 참음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참음의 기간이란 십자가를 붙잡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나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고, 몸은 성령으로 사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는 참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고 의식하지 못한다면 악한 죄적 체질 때문에 마음은 저절로 육체에 붙어버리게 됩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버리면 오감으로 접하는 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럴 때 성령으로 사는 생명은 끊어지게 됩니다. 존재의 영역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랑과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희락이 유지되는 화평의 상태가 깨져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오래 참음입니다.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스로에게 일깨워주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는 생명의 영역을 유지시켜 줌과 동시에 그로부터 나타나는 성령으로 행함의 길을 열어줍니다. 오래 참음을 통하여 성령으로 사는 영역이 보존되고 성령으로 행하는 영역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행하시는 영역에는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웃 사랑의 영역입니다. 오래 참음의 단계를 넘어서 눈앞에 있는 상대방을 향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성령의 열매는 자비입니다. 자비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이 사람이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소망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숨 쉬게 하고 살아있게 하심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손길로 타인을 어루만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아시면서도 삼년 동안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를 있게 하심을 아셨기에 아버지의 손길로 가룟 유다를 상대하고 계셨습니다. 빌라도를 대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를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아셨기에 아버지의 손길로 빌라도를 어루만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다 도망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들을 옆에 두시고 제자 삼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아셨기에 하나님의 손길로 제자들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비였습니다.
뉴스에 살인을 저지른 강도에 대한 보도가 나왔다고 해보겠습니다. 저런 놈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와 계신다면 그러한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강도를 살아있게 하신 분이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소망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의 손길에 내 마음을 얹어놓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 사람이 극악무도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그를 있게 하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내 멋대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타인에 대해 나의 주체성대로 생각하지 않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의 손길로 대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이로부터 여섯 번째 성령의 열매인 양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타인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의 손길로 어루만지게 하십니다. 양선은 이 단계를 넘어서 구체적으로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동안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는 성령으로 사는 생명은 유지됩니다. 그럴 때 타인으로부터 얻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손길로 타인을 어루만지다 보면 성령께서는 타인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을 일깨워주십니다. 성령의 일깨우심을 따라 나타나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타인에게 선을 베푸는 양선이 됩니다. 이것은 나의 인격에서 나올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아버지의 뜻을 내게 주심으로써만 진정으로 타인을 향한 베풂이 나타납니다.
일곱 번째 성령의 열매는 충성입니다. 충성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보면 믿음을 뜻하는 피스티스(πίστις)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여 자비와 양선을 베푸는 일이 일관되게 변함이 없는 신뢰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충성이라고 번역된 것입니다.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누구를 대하든 그 사람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의 손길로 어루만집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에게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일만을 하게 됩니다. 그가 강도든, 살인자든, 내 가족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있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주권의 손길로 어루만지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 선을 베풉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고 일관되게 해나가는 것이 신뢰라고 할 수 있는 충성입니다.
여덟 번째 성령의 열매는 온유입니다. 자비와 양선이 타인을 향하는 방향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열매라면, 온유는 타인이 나를 받아들이는 방향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온유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자비와 양선은 하나님이 그를 있게 하심을 알고, 주권의 손길로 어루만지며, 선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유는 그가 나에게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이 주권에서 나오는 것임을 인정하고 부드럽고 따듯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온유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온유함에 반대되는 대표적 사건은 출애굽 때 바로가 보였던 완악함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이 곧은 백성의 태도를 취한 사건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온유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온유란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온유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타인에게서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타인을 부드럽고 따듯하게 받아들임은 나의 인격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양선의 모습을 보였던 것과 같습니다.
아홉 번째 성령의 열매는 절제입니다. 절제는 앞서 언급된 여덟 가지 성령의 열매가 실제로 나타날 때 가장 적절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실 때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가장 적절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기에 다른 열매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열매로 자비와 양선만이 나타난다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던 사건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온유만 나타났다면 채찍을 들어 성전을 정화하시는 사건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비와 양선과 온유를 의식하려 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율법으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유지하려고 십자가를 붙들면 성령님께서는 절제 아래에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시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채찍을 드셨으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것이야말로 정도의 벗어남이나 모자람이 없는 진정한 자비와 양선이었고 온유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자비와 양선과 온유를 좋게 생각해서 억지로 화를 참는다면 그것은 율법이 되는 상태입니다. 어떨 때는 화를 내는 것이 자비와 양선과 온유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때와 상황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적절하게 나타나는 것이 절제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상황에 대해서 나를 통해서 지적을 하시려고 한다면 화를 내는 것이 타인을 위해 선을 베푸는 양선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온유를 율법으로 붙잡아서 무조건 화를 참으려고 한다면 겉으로는 화를 내지 않더라도 절제가 되지 않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래 참음을 통해 성령으로 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이루어질 때 성령으로 행하시는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통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성령의 인생이 시작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 말로만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실제로 우리의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