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서로 나눌 짐, 혼자서 져야 할 짐>의 줄거리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러고 또 말씀하십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참 이상하지요. 이러한 단어의 조합이 영 낯설고 거북합니다. 앞에서는 온통 구원과 자유를 말씀하시면서 율법주의나 모든 행위원칙의 멍에를 벗어버리라고 하셨잖아요? 도대체 교인이 서로 나누어서 질 짐은 무엇이며 또한 각자가 져야할 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 믿음에 도대체 짐이라는 것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서로 나눌 짐, 혼자서 져야 할 짐
(갈라디아서 6:1~10)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사도 바울은 앞서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계속 언급하며 믿음이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5장 1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종의 멍에란 율법주의를 포함한 모든 행위 원칙에 매여서 내가 주체가 되어 행동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해 보았듯이 내가 반드시 행동해야만 한다는 강박감과 부담감은 삶의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이 주신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위 원칙이라는 짐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얼핏 이전 말씀과 상충하는 것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2절을 보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하였고 5절을 보면 다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서로 나눌 짐이 있고 각각 져야 할 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두 가지 종류의 짐을 지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서로 나눌 짐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2절의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이 연관되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은 어떤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바로잡기 위해 서로 도우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 바울이 말하는 범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범죄란 단순히 사회에서 정한 법이나 율법이나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범죄로 번역된 헬라어 파랍토마티(παραπτώματι)는 ‘아래’와 ‘떨어지다’라는 뜻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어감을 보자면 달라붙어서 잘 유지되어야 하는 상태에 붙어있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모습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곧 ‘구원의 주님’이라는 뜻이기에 그리스도의 법은 구원의 법이고 믿음의 법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에 대해 죄를 범했다는 것은 구원의 법과 믿음의 법에 붙어있지 못한 채 떨어져 나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요한복음 13장 34절의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갈라디아서의 맥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이란 말씀드린 대로 구원의 법이자 믿음의 법입니다. 믿음과 법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고 그리스도와 법이라는 말도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법이라는 표현에 반하는 범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14~15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고 많은 자들이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죄로 인해 죽어가야만 하는 우리의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대에 구리 뱀을 달아 높이 들게 하셨고 그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나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비유로 삼아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언급은 처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이미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그리스도의 법을 언급하였습니다. 구원의 법이자 믿음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어기는 범죄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보면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라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자들이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은 범죄 한 자들은 신령함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령함이란 곧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성이기에 그리스도의 법을 어기면 구원도 없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법이자 믿음의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 중에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법을 이어가지 못하고 지탱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구박하고 거부하지 말고 온유함으로 바로 잡아서 십자가를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형제를 범죄에서 구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서로 짐을 지는 것으로 표현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결코 짐이라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반드시 반복되고 유지되어야만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짐을 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바라보기는 항상 해야 되는 일이고 쉬지 말고 해야 되는 일입니다. 항상 쉬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만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머무는 상태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의식 작용을 통해 십자가 예수님을 의식합니다. 예수님을 의식하는 동안에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머무는 동안에만 온갖 신령한 사건과 신령한 관계와 신령한 은혜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직면하게 되고 우리의 몸은 성령의 장갑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십자가 예수님을 늘 의식하여 예수님 안에 들어가 머물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짐으로 번역된 헬라어 바로스(βάρος)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다른 용례를 보면 그 의미가 더 확실하게 와닿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을 보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라고 할 때에도 바로스(βάρος)가 사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박해나 순교를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이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돌에 맞아 죽고 불에 타 죽는 순교가 가벼울 리 없습니다. 초대교인들 또한 박해를 받아 죽어갔고 카타콤으로 몰려 지상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무시무시하게 무겁고도 큰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가볍게 여겨질 정도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받게 될 구원의 영광이 크고 무겁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자유를 얻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행위 원칙의 멍에를 메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에 와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상태를 무거운 짐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을 위하여 서로 짐을 지라고 요청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독려하여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어떤 물체가 짐으로 느껴질 정도로 무겁다면 그만큼 지구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크다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잡아당기는 중력만 없다면 무게도 사라집니다. 무중력 상태인 우주 공간에서는 1,000kg 쇳덩어리도 둥둥 떠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독려해야만 될 정도로 십자가를 바라봄이 무거운 이유는 바로 죄의 중력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끝없이 잡아당겨서 이 세상에 속한 육체에 밀착시키고자 합니다. 마음이 몸에 밀착되면 몸을 통해 만나는 세상 것을 흡입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내가 주체가 되고 행위 원칙을 찾게 됩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세상 것을 많이 얻을 수 있느냐를 중요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중력을 이기고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들고 무거운 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중력만 없다면 우리 마음의 의식은 가볍게 공중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중력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죄의 힘은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에 죄의 힘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해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게 합니다. 장대의 구리 뱀을 바라본 자들은 살아났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때 죄의 힘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의 힘이 중력처럼 우리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십자가를 보는 상태에서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범죄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고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시는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언제 어디서나 지금의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저는 이것을 돕기 위해 설교를 하고 있고, 여러분은 이것을 위해 설교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기준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시든지 그 내용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는 기준에 맞는지를 확인해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죄의 중력은 끊어지고 삶이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지는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입니다. 장대의 구리 뱀을 바라본 자들마다 나았던 것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데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중력이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는 한 가지 일만 하라는데 그것이 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서로 도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증거는 무거움입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마음이 세상을 받아들이면 무거워집니다. 형제가 물먹은 솜처럼 축축하고 무거워진 마음 상태를 보았다면 거부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그 상태를 받아들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장대의 구리 뱀을 바라보는 것도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 불 뱀의 독이 퍼져서 몸이 죽어가는 상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떨쳐버리고 난데없이 장대의 구리 뱀을 바라보라고 하니 듣지 않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다고 해보겠습니다. 돈 문제가 내 마음을 불 뱀처럼 물어버립니다. 이제 돈 문제의 독이 퍼지고 있는 의식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자식 문제도 건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저런 삶에서 진행되는 문제들이 마음을 물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문제를 담을수록 마음은 무거워지고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은 힘들어집니다. 마음이 세상 것들을 받아들인 상태가 바로 죄의 중력입니다. 이것이 무겁기에 서로 짐을 나눠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으면 설교를 듣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렇게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짐을 서로 나눠지자는 의도에서 끊임없이 방송을 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중력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면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고 범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막자는 것입니다.
한편 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경고가 이어집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쉬지 않고 바라보면서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몸도 마음도 본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지 못하는 동안에는 사람 자체가 아닙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머물지 않는 사람들이 대통령도 하고 장관도 됩니다. 칭기즈칸이나 알렉산더 같은 정복자들도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온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고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브 잡스나 마이클 잭슨은 저와 동년배입니다. 이들은 세상에서는 대단한 일들을 했지만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아직 사람조차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대단한 사람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본래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이루었다고 하는 일들이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역사의 소모품으로써 허락하신 일들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5절에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은 헬라어 포르티온(φορτίον)으로써 군인들이 각자 짊어지는 군장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된 나눠져야 할 짐이란 죄의 중력에 의한 무거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바라보기를 서로 도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서로 도와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 바라보기는 공통적으로 해야 되는 일이지만 실제로 십자가 바라보기가 이루어지는 곳은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장소입니다.
결혼을 한 사람도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결혼을 안 한 사람도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리고 서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게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십자가 바라보기가 이루어지는 현장은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 아래에서 십자가 바라보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5절에서 언급되는 자기의 짐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6~10절을 보면 성령으로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공통적으로 십자가 바라보기를 함으로써 성령이 사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8절을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서로 십자가 바라보기를 돕고 또한 각자 삶의 영역에서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 되어 영생을 거두겠지만, 십자가 바라보기를 돕지 못하고 각자의 짐을 지지 못한다면 멸망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멸망하는 이유는 잘못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 바라보기를 중단하고 육신을 위해 심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바라보기가 중단되면 죄의 중력은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겨서 육체에 달라붙게 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의 삶이란 육체가 만나는 것들 중에서 좋음을 추구하며 살게 되기에 다시 행위 원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육체를 위해 심는다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십자가 바라보기를 중지함은 멸망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인 믿음의 법이고 구원의 법입니다. 이 법을 위해서 짐을 나눠지기 위하여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바라보기를 통해 각자의 짐을 져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짐을 잘 짊어짐으로써 성령을 위한 삶을 살고, 성령께서 기회를 얻으시는 삶을 살고, 성령이 작동하시는 삶을 살아서 기필코 영생을 얻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법을 서로 잘 지키기 위하여 짐을 나눠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각자의 삶의 조건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성령께 기회를 드리는 삶이 되게 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