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주변 반응을 살기, 하나님 관계를 살기>의 줄거리 :
주변 사람들과 환경에 마음을 빼앗겨 반응하며 또 그런 주변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며 그리고 그런 주변의 반응을 자기 힘으로 좋게 유도하려고 애쓰면서 사느라 인생을 다 허비합니다. 아니면 거꾸로 아예 주변을 의식하지 않음이 피해를 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순수하게 자기 내부에서 발생한 자기만의 동기를 밖으로 표현하면서 사는데 주변에 대한 배려의 긴장도 느슨해지지 않는 그런 인생 사는 법을 알아봅니다.
주변 반응을 살기, 하나님 관계를 살기
(갈라디아서 6:11~14)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믿음은 주변 반응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관계를 사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앞에서 한 모든 이야기를 총괄해서 요약하고 강조하여 큰 글자로 쓸 테니 잘 보고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강조하는 내용들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자유입니다. 앞선 2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법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눈앞에 밝히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절대적인 은혜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법을 떠나 율법이나 행위 원칙을 붙잡는 것은 자유인임을 포기하고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자유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 내용은 자유입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반응을 의식하고 그것에 종노릇 하는 삶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벌써 10년도 넘은 일입니다. ‘JYP 엔터테인먼트’라는 연예기획사가 있습니다. 그 대표가 노래도 잘하고 특이한 댄스로 유명한 가수 박진영 씨입니다. 박진영 씨가 공개적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그중에 한 마디가 특이해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나는 노래를 하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좋다. 이 반응이 없으면 노래 부르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박진영 씨의 행적을 우연히 접하게 될 때마다 그 말이 떠올라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박진영 씨가 미국 진출에 애를 쓰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 유명했던 걸그룹을 미국으로 보내서 숙식과 연습을 시키고 데뷔까지 했는데 실적은 썩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뒤에 가수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온 세상 연예계를 뒤집어놓았습니다. 유튜브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조회수가 44억 번이 넘었습니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의 분위기 자체가 주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산다는 내용입니다. 미국을 의식해서 만든 노래가 아닙니다. 그런데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를 휩쓸어버립니다. 요즘은 BTS가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BTS는 이름도 없는 작은 그룹이었습니다. 공중파 방송도 아닌 유튜브를 통해 아미(Army)라는 팬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오늘날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대중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는 연예인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크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무엇보다 좋아해서 연예인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노래가 좋아서 가수를 시작한 사람도 있고, 연기하는 것이 좋아서 박봉을 받으면서도 연기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좋아하는 정도와 내가 좋아서 노래와 연기를 하는 정도는 혼합되어 있지만 그 비중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주관적인 입장이긴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내가 좋아서 노래하고 연기하는 사람들이 생명력을 오래 유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이러한 모습을 믿음에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말씀드리자면 믿음의 사람은 주변의 반응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내용을 큰 글자로 써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육체의 모양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유프로소페오(εὐπροσωπέω)는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여 겉모습을 예쁘게 꾸민다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할례의 규정과 같은 율법을 강조하고 있지만 진심으로 율법을 지키겠다는 의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율법과 할례를 언급하는 것은 전부 세상 사람들의 눈길과 반응을 의식해서 자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구원을 위하여 율법이 필요하고 할례가 필요하다는 자기들의 주장이 사람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명하기 위해 할례받은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고 자랑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요즘에도 발견됩니다. 지역 예배당 조직이 교인수를 늘려가면서 지역과 교계에서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큰 글자로 써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거짓 교사들처럼 세상의 반응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 관계를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기 위한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욕구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옷 입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만을 직면하게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남아있는 몸은 성령님이 오셔서 장갑 삼으시고 성령님과 하나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위일체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가 잘되는 사위일체의 삶을 사는 동안에는 그에 따른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 그 말과 행동에 대한 주변의 반응도 이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며 어떻게 대하든지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나와 하나 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또 이어서 13절을 보면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진정한 자유를 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휘젓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애초부터 주변의 반응에 종속된 사람들이었고 자기 자신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 매여 있고, 세상의 반응에 종속되어 있고, 세상의 반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인정해주는 일들만을 찾아다니니 진정으로 자기에게 좋은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처럼 자기를 잃어버려서는 안 됨을 강조합니다. 거짓 교사들을 따라 율법의 행위를 쫓아 할례를 받으므로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스스로 버린다면 세상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를 따르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반응과 환경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내부로부터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하나 되는 사위일체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의 삶입니다. 사위일체로부터 이루어진 결과물을 드러낼 때 세상이 좋게 반응하든 나쁘게 반응하든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14절을 통해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세상이 나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문제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룬 나의 말과 행동에 대해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든지 나는 어떤 반응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두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쪽에서 나를 향해 오는 방향이 있고, 내 쪽에서 세상을 향해 가는 방향이 있습니다.
먼저 세상 쪽에서 나를 향해 오는 방향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라는 말씀은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음으로써 세상이 다가올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대해서 세상은 더 이상 관심거리나 아까워하는 대상이 되거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지고 싶어 하고, 가져서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은 사람에게는 애착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이 자기의 가치를 뽐내고 매력을 발산하려고 해도 매력이나 관심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끊임없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을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마음이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내가 죽었음을 나 스스로에게 확인시킵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내 마음에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세상 것이 바람직하고 바랄만하고 중요하게 보인다면 세상의 종 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죽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는 찾아올 수 없습니다.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세상이라는 동기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므로 진정한 자유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에서 세상 것들이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내 마음에서 일등을 하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세상이 잡아끄는 대로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삶은 나를 사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종노릇 하는 삶이고 세상에 매인 삶입니다. 나의 삶에서 내가 공중분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면 이 세상에서는 존재감을 느낄만한 대상도 없고 좋음을 욕구할만한 대상도 없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세상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기 전에는 세상 것들이 그렇게 좋게 여겨졌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에 세상 것들이 들어와 일등자리를 차지하였고 세상 것들을 더욱 갖고 싶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자 그것들의 실체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에서 십자가가 너무 좋아서 십자가를 이야기하게 되고 십자가를 자랑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게 못 박혔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세상에 대해 못 박혔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말씀은 세상이 더 이상 어떤 마력이나 매력도 지닐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이 나를 잡아당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뒤의 말씀은 내가 세상에 대해 자발성이나 주체성을 발휘하지 않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세상을 향해 내 주체성을 자발적으로 쏟아붓는 일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좋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쟁취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주체성을 발휘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자 나의 주체성은 완전히 멈추고 하나님의 주체성이 활성화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삶의 문제들에 나의 주체성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집안 문제, 승진 문제 등이 모두 내가 해결해야 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내가 하느냐 마느냐를 따질 겨를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빨려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의 주체성을 쏟아부었습니다. 세상은 나를 빨아들이고 나는 자발적으로 세상에 참여하면서 세상과 궁합이 척척 맞아 들어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랬던 내가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나 스스로에게 설교하며 가르치게 되자 이전과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나의 주체성은 단 한 방울도 세상일에 쏟아붓지 않게 됩니다. 세상 반응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여 두 방향의 죽음과 자유로워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세상에 대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세상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나에 대해 갖는 마력과 매력과 흡입력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나의 주체성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아시고 하나님의 주체성인 성령이 오셔서 나를 장갑 삼아 사시게 됩니다.
내가 사위일체의 삶에 충실할 때 그 결과물은 나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를 사는 것입니다. 배우자 앞에 있다고 해서 배우자의 반응을 의식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위일체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녀 앞에 있다고 해서 자녀의 반응을 볼 필요가 없고, 회사에서 사장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주변의 반응을 신경 쓰는 삶은 고달픕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떤 표정으로 보느냐에 매달리면 그것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나를 보고 웃어주면 대단한 기쁨 거리를 붙잡은 느낌이 듭니다. 반대로 누가 나에게 조금만 인상을 써도 마음이 고꾸라져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삶은 나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사위일체야말로 나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내부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을 통해서 성령님은 나의 몸을 움직여 가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나를 살 수 있습니다. 남의 반응을 상관하지 않고 살아갈 때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나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과 같은 일을 일으키실 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도 바울이 곳곳에 교회를 세운 것과 같은 일들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삶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든지 성령께서 사시는 삶은 진정으로 나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주변의 반응을 신경 쓰며 그것을 삶의 이유로 살지 않았습니다. 전부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위일체에 충실하였습니다. 그 결과물을 겉으로 드러내며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하나님께서 주관해 가시는 일이기에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의 마지막에 큰 글자로 써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나를 사는 자유’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면 사도 바울은 ‘너 자신을 살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세상 반응에 흔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르치는 말을 받아들였다면 마찬가지로 세상에 종속되고 세상 반응에 흔들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그러한 삶을 중단하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위일체에 충실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종교인으로 살아갑니다. 종교라는 체제와 조직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타인의 반응으로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 종교의 도움은 필요치 않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여러분 안에서 사위일체의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 사위일체 상황에 충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배우자나 자녀나 형제자매의 반응까지도 상관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사위일체에 충실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결과물을 세상에 드러내며 살 수 있으면 됩니다. 반응에 신경 쓴다면 설령 좋은 반응을 보일지라도 휩쓸릴 수밖에 없고, 하물며 나쁜 반응을 보인다면 더욱 신경 쓰다가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사위일체에 충실해서 결과물을 드러냈으면 다음 순간에도 사위일체에 충실한 삶은 이어져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반응을 보려 하지 말고 계속해서 사위일체에 충실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반응으로 기뻐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위일체 안에서 충분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듣겠다고 쫓아다니지 마시고 사위일체를 무르익게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위일체가 무르익고, 사위일체에서 생기는 기쁨을 크게 만들고, 사위일체에서 생기는 결과물들을 뿜어내는 발산력을 높여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반응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의 마지막에서 내리는 자유에 대한 결론입니다. 주변 반응으로 살지 않고 내부의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오늘도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나의 내부에서 사위일체의 기적이 활성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사위일체로부터 나타나는 결과물들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게 해주셔서 참 자유인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