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까운 세상 것들로 하나님 사랑하기>의 줄거리 :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구원을 받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원을 이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나를 선택하셨다면 이제 나도 사랑으로 하나님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선택함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이지요. 이 하나님 선택은 이 세상에서 내게 아깝게 여겨지는 것들을 내 마음에서 십자가로 다 버림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아까운 세상것들로 하나님 사랑하기
(갈라디아서 6:14~18)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십자가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방법이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로 이끄시고 이끌림을 받은 나는 그 십자가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무척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사랑하든지 사랑하지 않든지 구분이 분명합니다. 가족을 사랑할 수 있고, 돈을 사랑할 수 있고, 건강을 사랑할 수 있고, 승진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대상이나 가치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기에 사랑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저 성경의 내용들을 근거로 하나님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여깁니다. 설령 하나님이 나의 상대가 되심을 성령님이 보장해 주신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해서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내용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 것이냐가 문제가 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서 사랑하셨다면 나도 하나님을 선택해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기에 나는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받은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혼식을 했으면 결혼생활이 이어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다면 결혼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혼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함으로써 결혼생활이 이루어져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아까워하는 것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인사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표현이 무척 독특합니다. 이제까지 교인들을 지칭하는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 아브라함의 후손, 성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에게 자유를 받은 자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표현 자체는 독특한 것이 아니지만 이제까지 쓰이지 않았던 표현이 편지 마지막에 이르러 등장했다는 점이 독특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칭했다는 것은 할례가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불리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15절을 보면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았는지를 문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유대인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반대되는 개념이었습니다.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할례와 무할례 문제를 중요시했습니다. 자신들이 선택받은 이스라엘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 선택받은 자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나가려 하는 할례의 관습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율법과 규정을 포함하는 행위 원칙을 상징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는 이 세상의 어떤 행위 원칙도 지켜야 될 조건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내가 무슨 규정을 지켰기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닙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예배당에 나가든지 나가지 않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예배당을 나가기 전에 이미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례의 여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세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연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5절의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뜻입니다. 기독교 종교인이냐 아니냐는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셔서 이루어지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새로 지으심을 받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새로 지으심을 받는 일에 대해서는 종교도 예배당도 조직도 규정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14절을 보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항상 바라봄을 통해서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고,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에 세상은 더 이상 매력 덩어리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잡아끌 만큼 좋은 것으로 느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이제까지는 무슨 문제만 생기면 마음이 다급해져서 자발적으로 나의 주체성을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자 세상에 대해서 나의 주체성을 한 방울도 쓰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은 분으로 느껴지기에 나의 주체성을 오직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새로 지음 받음 것이란 소망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매력 덩어리가 바뀌는 것이고, 내 마음의 좋음이 바뀌는 것이며, 나의 주체적인 인격성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 대해서는 성령님만이 주체가 되셔서 내 몸을 움직이시며 삶이 진행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구원받았다면 받은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고 이를 통해서 14절의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택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이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듯이 나도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14절로 돌아가 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세상’이라는 단어를 ‘아까운 것들’로 바꾸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까운 것들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아까운 것들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아까운 것들로 바꿀 수 있는 이유는 선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오직 하나님만 계셔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제일 중요한 조건은 내 마음에서 하나님 이외에 아까워하는 대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까워하는 대상이란 마음에서 놓고 싶지 않은 것이고,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고, 내 마음에서 그것이 없어질 때 아픔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아까워하는 것들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사랑함이란 내 마음에 하나님만 계신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이 구원받음이라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원을 이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방식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서 아깝다고 여기며 마음에 품은 것들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아까워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으로써 버릴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들 중에 아까워하는 것들을 버림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의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2장 12절을 보면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아브라함의 하나님 사랑법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이란 이 세상의 소중한 것들을 점차적으로 버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구절의 중심이 되는 부분은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부분입니다. 아끼지 아니함과 경외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외란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두려워한 것일까요? 경외란 곧 공경함인데 나를 낮추면서까지 섬기는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을까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경외의 두려움은 무서워 떠는 공포와는 다릅니다. 경외의 두려움은 내게서 없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공포의 두려움은 내게 나타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내게서 없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곧 아까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한없이 윗분이셨기에 차마 아깝다는 표현을 쓰지 못하고 경외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것들 중에서 내 마음이 아깝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죽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 중에서 아깝게 여기는 것들을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삭뿐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갖기 위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아리따운 아내 사라를 버렸고, 삶의 터전을 선택함에 있어서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하며 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아브라함에게 아까운 대상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보이는 아까운 것들을 재료로 삼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되기를 바라시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나도 사랑하기 위해서 붙잡아야 될 유일한 길입니다.
한편 17절을 보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처음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고,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고 15장 31절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흔적을 지닐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지님으로써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다 버릴 수 있고, 오직 하나님만을 아까워하며 경외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아까워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도 없습니다. 마음에서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돈을 품게 됩니다. 자녀를 아까워하는 사람은 자녀를 품게 됩니다. 건강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건강을 품게 됩니다. 승진을 못 함이 억울하다면 승진을 아까워해서 품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도저히 모셔 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까워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모셔 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일 때, 내 삶의 주체가 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내 마음에서 버린 모든 것들에 대해 관여하시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서 아까워하는 것들을 십자가에서 버리는 것입니다. 아까워하는 것들이 많아서 세상을 떠나지 못한다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갈 수도 없습니다. 마음에 이 세상 것을 담고 있으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천국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잡는 방법이 바로 사도 바울처럼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니는 것입니다.
여기서 흔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스티그마(στίγμα)는 주인이 자기 소유의 종이나 짐승에게 찍는 고유한 낙인을 의미합니다. 고대에는 가문을 상징할 수 있는 고유한 표식을 금속으로 만들어서 불에 달군 후 종이나 짐승의 몸에 찍었습니다. 이러한 낙인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영구한 소유권을 상징합니다. 낙인이 있는 종은 숨을 쉬고 물을 마실 때도 주인을 위한 일이 됩니다. 심지어 결혼을 하면 그 아내도 주인의 소유이고 낳은 아이도 주인의 소유입니다. 종이 아무리 출세한다 하여도 낙인이 있는 한 주인은 소유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렇게 지워질 수 없는 예수님의 흔적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흔적에 대해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 중에 박해를 받아 몸에 입은 상처를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은 할례는 몸에 남겨진 흔적입니다. 썩어질 육체에 남겨진 흔적 위에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려고 하는 율법주의를 지금까지 질책해왔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남겨진 상처를 예수님의 흔적이라 부르며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 흔적은 결국 종의 낙인입니다. 낙인을 받았다는 것은 주인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종의 신분으로 그만큼 밀착되어 있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도 예수님의 소유로 낙인이 찍힌 종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과 가르침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인이신 예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주인의 기쁨과 유익만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시는 거짓 교사들에게 현혹되어서 복음을 의심치 말고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갈라디아서와 같은 편지를 쓰는 일을 만들지 말라는 부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낙인찍는 주인과 낙인찍힌 종의 관계를 인식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십자가 생활화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세상에서 아깝게 여기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죽음으로써 하나님만이 유일한 아까움의 대상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는 아까워할 것이 없고 하나님께만 나의 주체성을 다 사용하게 됩니다. 욕구하며 소망하며 바라는 주체성을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낙인찍는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낙인찍힌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종은 숨 쉬고,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주인을 위함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아깝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대해 나대던 주체성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을 아까워하는 진정한 선택받은 이스라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만을 선택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아까운 모든 것들에 대해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되 낙인찍힌 종의 마음가짐으로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