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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2

녹취문: 예수께 받은 복음 사람께 받은 복음_태승철(갈라디아서 1:11~2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1.07|조회수92 목록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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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께 받은 복음 사람께 받은 복음>의 줄거리 :

예수님께 받은 복음은 나를 하나님께 연결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람께 받았더라도 하나님과의 연결이 실제로 일어나면 내막적으로는 예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 내막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과 연결이 일어나지 않는 복음은 사람께 받은 복음이고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니지만, 당사자들이 복음이라 하기에 다른 복음이라 불러주는 것뿐이지요.

 

 

예수께 받은 복음 사람께 받은 복음

 

(갈라디아서 1:11~24)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말할 수 없다면 우리가 받은 복음은 다른 복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누구를 통해 전달받았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특별한 처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만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을 자칭하면서도 유대 율법주의를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잘못된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고린도후서와 마찬가지로 강하게 비판합니다. 복음 안에서 교인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거짓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공격합니다. 다만 내용적으로는 고린도후서와는 조금 다릅니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발행한 사도 증명서가 없음을 문제시하였다면,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만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자신이 전하는 복음 또한 예수님께 직접 받은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사도가 된 열두 제자는 복음 사건 자체이신 예수님의 직접적인 증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직접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목도한 증인으로써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직접 목격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권에 대한 의심을 받았고 이에 대해 반박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기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났으며 자신이 전하는 복음도 열두 제자와 마찬가지로 증인의 입장에서 전하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열두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누구에게 배워서 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만난 예수님과 목격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복음으로 전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루어진 한 번의 만남에서 복음에 대한 모든 계시를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누구에게 전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사도의 정당한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은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사도권이 의심을 받으면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 전한 복음도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부득불 사도권을 변호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직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이었던 시절에도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에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증언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이단의 괴수였을 뿐입니다. 정말로 예수가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메시아라면 백마를 타고 조국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독립시켜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이 메시아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라 주장하였고 사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충분히 탄압할만한 이유였습니다. 이러했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과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들은 다메섹 도상에서 한 순간의 만남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에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문서들도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알던 구약의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총망라되면서 재편되기 시작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14절을 보면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가지나 되는 규례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지켜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 모든 율법을 버리게 됩니다. 그 대신 십자가 복음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포함한 모든 구약의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하여 완전히 다른 지식의 체계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에게 복음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사도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은 사도 바울 안에서 십자가 생활화라는 복음의 이론체계가 형성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가 읽지 않은 18절을 보면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다메섹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이로부터 십자가 복음을 통한 구약 지식의 재편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아라비아로 가 있는 동안 완전히 체계가 잡힙니다. 그러고 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 장로를 만나게 됩니다. 이 기간을 다 합해 약 삼 년 정도가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베드로나 야고보에게 배운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것이 아닌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사도가 아니기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증인의 복음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지만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신적 기원을 제시하며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깨뜨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본문은 단지 사도 바울이 이러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의 속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복음을 사람에게서 받지 않았다는 말은 사도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받은 복음이 사람에게서 배우거나 받은 것이 아님을 진심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복음은 받아들인 자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떠나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속성입니다. 세상을 떠나게 하는 복음이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서 만들어질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이 허허벌판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면 천국이라는 분명한 목적지를 제시합니다.

복음의 목표는 세상 바깥으로 나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세상 바깥으로 나가더라도 목적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천국에 있는 분이 세상으로 오셔야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천국에서 오신 분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하게 제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과 다른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합니다. 하늘을 말하는 종교는 많습니다. 공자의 경천사상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천당과 극락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천당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불교에서 차용한 언어입니다. 얼마든지 다른 종교가 사용하는 언어를 차용해서 복음의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불교를 믿는 것도 아니며, 언어라는 껍데기를 빌려와서 복음의 내용으로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른 종교의 개념들을 차용함으로써 다른 종교를 침범해 들어갈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종교들도 하늘, 천당, 극락 등을 언급할 수는 있습니다만 문제는 실체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온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4차원 세계인 천국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이 복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대단한 사상가나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 자체의 성격이 이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속성을 보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았다는 신적 기원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어떨까요? 우리는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서 복음을 전해 들었기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신적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십자가 생활화라는 용어를 누구에게 배워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십자가 생활화를 의미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 사도행전과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를 살펴보면서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함이 마땅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신학적 스승들이나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십자가 생활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에게서 십자가 생활화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저에게 복음을 전해 듣게 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과 똑같이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복음의 속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반드시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의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의 예수님이 복음이시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일으키신 과정이 또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나의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 바깥으로 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갑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고백이 유지되고,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만을 직면하는 상태가 됩니다. 복음을 통해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개별적인 관계를 갖고 보면 상황이 다르게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들어 알게 된 십자가 복음이 표면적으로는 사람을 통해 전해졌어도 실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를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연합하고 난 뒤로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과 똑같은 일이 나에게서도 일어나게 됩니다.

누구에게 들었느냐에 따라 복음의 효과가 다르다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의미도 없고, 다른 사도들이 직접 목격한 예수님을 전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전한 이유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받아들였더라도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해서 하늘로 올라갔다면 본질적으로 그 복음은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진 것입니다. 또 내가 그 복음을 누군가에게 전한다면 그것은 누군가에게 들은 복음이 아닌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주어지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갖는 신비함입니다.

 

본문 16~17절을 보면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은 먼저 사도가 된 자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택정하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십자가 생활화를 표방하면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론으로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삶에 적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 마음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서 하나님만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하나님만을 마음의 채움 거리로 소망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그렇게 되셨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빠져나가는 복음을 듣게 하시기로 미리 정하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기의지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갈 곳은 천국뿐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다리 뻗고 누울 자리가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복음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십자가 복음을 전했는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내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생활화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누울 자리가 있기 때문에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들었고 그 복음을 생활화하게 되었다면 사람이 전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이기에 세상 바깥으로 나가도 갈 곳이 있다는 믿음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복음을 사람에게서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체부 아저씨가 택배를 가져다주는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어떤 분이 전라도 해남에서 김치를 보내주셨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김치는 우체부 아저씨가 전달해주셨지만 보낸 분은 해남에 계신 분입니다. 복음의 전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십자가 생활화라는 복음을 전달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복음을 받았습니다. 제가 전달했다고 해서 제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다시 12절을 보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이 말씀이 이해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오해가 발생합니다. 목사님들도 잘못된 이해를 가질 수 있고 이로부터 이단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마치 복음의 출처가 자기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체부 아저씨는 김치를 전달하면서 “이 김치 제가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우체부입니다. 복음을 보내주신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을 복음으로 받아들일 자들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지 않았다면 누구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태승철 목사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생활화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생활화하지 못한 채 이론에만 머물고 계신다면 그것은 저로부터 복음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해서 마음이 실제로 하나님께로 가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이름으로 발 뻗고 누울 자리를 하늘에 만들어 놓으셨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저라는 우체부를 통해서 복음을 전달하게 해서 받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라는 이름으로 우체부의 역할을 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마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었음을 느끼고, 의식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대상이 되시고, 육체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보고, 오직 마음의 채움을 위해, 바라는 것이 하나님뿐인 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생활화하고 계신다면 복음은 하나님께 직접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속성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 복음을 갖게 되신 것은 하나님과 주님의 직접적인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받고 누리며 조물주 하나님을 직면하는 특권을 날마다 실행하며 살 수 있는 것이 오직 우리 아버지와 주님의 직접적인 사랑과 간섭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 복음의 소중함에 우리의 마음을 다하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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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에스더54 | 작성시간 24.05.30 아멘!
  • 작성자Daumboy | 작성시간 24.10.02 이 복음을 듣게 하시고 믿고 깨닫게 하시고 세상 밖에 눌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맘껏 다리 뻗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게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그리고 사랑으로 십자가 생활화와 예수그리스도의 동선을 따라 살아가도록 복음을 배달해 주신 태 목사님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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