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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행위가 구원받은 자유와 행동의 재미>의 줄거리 :
내 행위로 구원받음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믿음으로 나는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확신이 단순히 나의 착각이 되지 않으려면 그 증거로써 내 행위가 구원받았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내 행위가 구원받은 상태에서 나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행동하게 됩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하는 행동은 내가 행동해야 한다는 모든 의무감과 부담과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오게 됩니다.
행위가 구원받은 자유와 행동의 재미
(갈라디아서 2:1~14)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 땅에 사는 동안 하게 되는 우리의 행위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행위의 구원이란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자유의 완성 단계입니다. 행위가 구원받지 못하면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누릴 때는 행동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을 정도로 이 세상에서 하는 행동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한 번 들여다보겠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행동하며 사는 것이 버겁고 힘들다면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죽지 못해 산다.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서 움직인다. 힘들지만 가족부양을 위해 부득불 직장에 나간다. 인간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행동해야 된다.’라고 하는 생각은 극단적이면서도 보편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동함에 있어서 의무감이나 부담감 혹은 강박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억지로 행동하고 있다면 행위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행위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나의 영혼이나 인격이 구원받았는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의무감에서 나오는 행동이나,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구원받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행위도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를 때는 의무감이나 부담감 혹은 강박감이라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사에 넘치는 의욕과 야심을 보이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태도로 행동하는 것 또한 구원받은 사람의 행위인지는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행동이든, 의욕과 야심이 충만해서 하는 행동이든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면 영혼과 인격에 대한 구원도 점검하고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행위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6절에서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작용이 하나 발생합니다.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동안 행위는 구원과 어떤 식으로도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행위도 구원을 받아야만 합니다.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지만, 행위도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참 내용이기도 합니다. 영혼과 인격에 구원이 필요하듯이 행위에도 구원이 필요합니다. 영혼과 인격의 구원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행위도 마땅히 구원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위의 구원이 필요함을 모를지라도 영혼과 인격이 제대로 구원을 받았다면 행위의 구원은 반드시 따라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행위의 구원을 따로 이야기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 이유가 본문의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인들의 모습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당시 2000년 전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의 형편이나 지금 우리나 똑같습니다. 행위로 구원받음은 불가능하기에 제쳐놓더라도 행위도 구원받아야 함에 대해서는 말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주어지는 자유는 구원받은 행위를 통해 완성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행위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습니다. 오락을 하거나 별다른 재밋거리를 찾지 않아도 삶은 즐거울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참 재미있습니다. 집에서 청소하는데 구원받은 자의 행위가 되면 청소도 재미있습니다. 직장을 나가야 하는데 구원받은 자의 행위가 되면 날마다 하는 직장일도 재미있습니다. 집이나 직장에서 다른 재미를 찾을 필요가 없게 재미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행위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람들과 얼마나 격렬하게 싸웠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주후 49년에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교회의 총회가 열리게 됩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참가합니다. 이 총회는 유대 땅에 있는 교회와 이방지역의 교회를 총망라하는 첫 회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이방인들을 위해 선교한 내용을 공개적으로 보고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베드로나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둥이라 불리던 사도들과의 만남을 가졌고 자기가 전한 복음의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총회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이방지역에 그리스도가 전파된 내용에 대해서 보고하였고, 개별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다는 내용을 강조하였습니다. 구원의 내용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는 자신의 생각이 유대 땅에 있는 교회의 기둥이라 불린 사도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고 그들이 생각하는 복음과 일치함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도들이 이에 동의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인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총회에도 거짓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4절을 보면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예수님의 동생)와 게바와 요한 등이 예루살렘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이었지만 이들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 안에는 거짓 형제들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 들어온 자들을 거짓 교사라 불렀고,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자들을 거짓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오늘은 거짓 형제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거짓 형제였던 이유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면서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형식상으로는 그리스도인 형제에 속해있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몰랐고 경험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4절의 나머지 부분을 보면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라고 하였습니다. 종으로 삼고자 함이란 예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를 없애고 다시 율법에 매이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율법이란 모세의 율법이나 조상의 전통이라 불리던 613가지의 규례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을 종처럼 부리는 모든 행동 원칙이나 원리를 포함합니다.
이러한 율법에 매인 삶은 결코 즐거울 수 없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부득불 일을 해야 되는 상황, 가족부양을 위하여 할 수 없어 참고 직장생활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그렇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어서 야심만만한 성취욕에 들뜨는 행동조차도 자유가 없는 율법의 종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란 무엇일까요? 자유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 혹은 부담감이나 강박감도 생기지 않는 상태입니다. 심지어 먹고 살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는 본능적 강박감조차도 예수님 안에서는 없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 것을 얻겠다고 의욕과 야심이 충만한 상태도 없어지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의욕과 야심은 마치 마약이나 술에 취한 것 같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어떠한 부담이나 강박감도 없는 상태라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자면 누구보다도 격렬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던 것은 원칙이나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라는 강박감에서 마지못해 움직였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종의 모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고 행위에 있어서 어떠한 부담감이나 책임감 혹은 강박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행동은 어떤 이유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요? 1~2절을 보면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 계시를 따라 올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시가 무엇인지는 본문에서 “복음의 진리”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행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나 복음의 진리에 따라 행위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행위를 통해 완성됩니다. 어제 했던 일을 오늘도 하고, 오늘 했던 일을 내일도 한다고 해서 그저 똑같은 삶이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하는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행동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부담감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이 세상에 대해 죽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죽음이 완전해질수록 마음은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무척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날마다 해 왔던 똑같은 행동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나타나는 행동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자유를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인들에게서 지켜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행위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지만, 행위도 구원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3절을 보면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총회에 참가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보고를 했습니다. 특히 헬라인이었던 디도는 이방인 전도의 산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총회에 섞여 있던 거짓 형제들은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임을 두고 비판하였습니다.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없다고 여겼기에 디도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할례는 선민의 표증이기에 따라서 디도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할례를 받아야 참 선민의 모임 안에 들어올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형제들의 주장에 대해 사도 바울은 5절에서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목숨 걸고 할례에 대해 반대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에 굴복하여 디도에게 할례를 행한다면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복음을 전파한 모든 이방교회에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다 할례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측되는 현상의 변화만 문제였던 것은 아닙니다. 복음 자체가 아예 없어져 버릴 수 있는 위기였습니다.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란 내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유일한 채움과 기쁨의 대상으로 붙잡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남아있는 육체에 행하는 할례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없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거짓 형제들의 요구에 타협하지 않고 싸웠던 것입니다. 행동 원칙인 율법의 요구를 다 잘라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복음의 진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5절의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진리란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서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에 대해 마음이 완전히 죽으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자유가 나타납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유롭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마음의 채움이나 욕구를 위해 어떤 것도 구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있어도 자유롭고 없어도 자유롭습니다. 있어도 가진 것이 아니며, 없어도 갖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복음의 진리가 임하게 됩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면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나 규례 같은 행동 원칙은 물론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리나 규정에 대해서까지도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갖고 계신 뜻이 곧바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같고, 내가 감정을 느끼는 것 같고, 내가 의지를 발동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와서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시고 그로부터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관찰해볼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 들어가면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가운데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제부터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 대한 죽음이 분명하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동안에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갖는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위가 나오게 됩니다.
행위가 복음의 진리를 따를 때 자유가 완성됩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완성입니다. 그렇기에 행위의 단계까지 나아가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완전히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른 행위가 나타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중도에 멈추게 됩니다. 은혜의 완성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면 받은 은혜도 자꾸만 놓쳐버리게 됩니다. 쉽게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11~14절을 보면 베드로의 실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옛 모습으로 돌아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팔레스타인 북부에 있는 수리아 안디옥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이곳은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도 베드로는 식사 자리를 파하고 급하게 숨어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는 베드로가 이미 이방인 선교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날 때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그릇에 각종 부정한 짐승들을 담아서 보여주신 후에 먹으라고 말씀하시지만, 베드로는 먹지 않겠다고 하였고 이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환상을 본 베드로는 이것이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임을 깨닫고 고넬료를 만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 율법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고 율법 중에는 이방인과 식사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유대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문제 삼을까 염려하여 자리를 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냐고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또한 이 책망을 받아들여서 잘못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조차도 쉽게 넘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행위의 구원이라는 문제가 결코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의 자유가 민감한 부분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잘하던 사람조차도 행동 원칙이라는 율법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율법과 행동 원칙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고, 재미있게 행동하며 살아야 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죽음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지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철저함 속에서 하나님만을 향한 소망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세상에 나가서 세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또 그 뜻을 따라 말과 행동을 하며 살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행위 하는 재미를 마음껏 만끽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은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행위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재미있어 죽을 지경으로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만 행위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