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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스스로 행동하면 저주받아 미친 상태>의 줄거리 :
온전한 믿음으로 살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저주의 기운이 내 인격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기운 때문에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현상이 바로 스스로 행동하려 하는 속성입니다. 자기 스스로 하는 모든 행동은 미치광이의 몸부림입니다. 이 몸부림으로 찾는 것이 바로 행위원칙이지요. 믿음으로 사는 대신 자꾸 율법적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은 저주 기운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행동하면 저주받아 미친 상태
(갈라디아서 3:10~14)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하여 진다는 것을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과 믿음의 문제는 평생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다소 식상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계속하여 강조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체질과 삶의 현장을 생각해보면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담긴 내용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질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율법과 상관없이 모두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굳이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을 지목하여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한 것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황인식이 중요합니다. 먼저 77억 인류가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였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지금의 사건으로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기준으로 이 세상은 두 영역으로 나뉘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고 밖에 있으면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역과 그리스도 밖이라는 영역이 공존하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 밖은 저주가 내려져 있고 저주가 지배하는 곳이기에 공기를 호흡하며 살듯이 저주를 호흡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저주는 끝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인식으로부터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저주가 임해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 행위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모든 행위 원칙입니다. 유대인에게는 모세가 준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인 613가지의 규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의 율법만 율법이 아닙니다. 예수님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저주를 흡입하며 저주의 기운에 노출되어있는 상태에서 행동 원칙을 찾으며 스스로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내가 어떤 원칙을 따라서 스스로 행위를 하려고 한다면 율법 행위에 속한 자입니다. 예수님 밖에서 저주의 기운에 취해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윤리학자나 철학자나 사상가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행위를 해야 된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형법을 보면 행위를 하는 주체의 책임을 묻습니다. 이것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다릅니다. 참 진리를 따라서 생각하자면 스스로 행위를 하는 것은 저주의 기운을 쐬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미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자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행위 원칙을 따라서 스스로 행위를 하려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행위를 정확하게 비교해보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 2~5절에서 살펴보았던 성령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육체로 마친다는 것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율법이라는 행위 원칙을 따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어서 5절을 보면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때 저주는 끊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행위를 하게 됩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성령의 행위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행위를 하는 것은 절대 정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본래 스스로 행위를 하도록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서 행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2,000년 동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상가들은 인간을 스스로 행위를 하는 존재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스스로 행위를 하는 것이야말로 미친 생각입니다. 내가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 당연함에 충격을 주기 위해서라도 미쳤다는 표현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집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행위를 하는데 이런 개인적인 일들조차 스스로 하는 일이라면 미친 사람의 행위입니다. 스스로 행위를 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행위 원칙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바깥에서 저주의 기운에 취하여 미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살아갈지라도 그것은 결코 올바른 일일 수 없습니다.
저주의 기운을 쐬었기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을 치며 스스로 행위를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저주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면 그리스도 밖에서 어떤 저주가 주어지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잘 표현된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항상 기쁨, 쉬지 않는 기도, 범사의 감사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단서를 빼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척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저주가 끝난 상태에서만 하나님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내 몸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음을 알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저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바깥의 저주받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으로 항상 기뻐하는 대신에 인간 세상에서 기쁨거리를 좇게 됩니다. 또 저주받은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드리는 대신에 쉬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한 자기의 소원과 바람을 고집하고 주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바라는 것을 희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이 좋아 희망이지 채워질 수 없는 부족함에 대한 바람이라면 저주입니다. 그렇기에 저주받은 상태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대신에 범사에 부족과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불안, 분노, 짜증, 질투와 같은 감정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저주받은 상태의 구체적 특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바깥에 있다면 저주를 쐬는 상태입니다. 저주를 호흡하고 저주에 젖어있고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행위를 하며 지옥의 예고편을 살다가 몸이 죽으면 영원한 저주 세계인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저주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내가 무엇인가 행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행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행위 원칙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언급되는 율법 행위입니다. 예수님 바깥에서 저주의 기운을 쐬는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행위를 해야 된다는 강박감 아래에서 원칙을 찾고자 합니다. 모든 행위는 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한 일입니다. 따라서 적절한 행위를 위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일에 대한 원칙을 정하고 원칙을 따라 행동하고자 합니다. 도덕과 윤리조차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두 번째는 충동 행위입니다. 간단히 말해 반도덕적 반윤리적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내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원칙을 따르지 않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에 의해 행위가 나타납니다. 분노, 질투,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 강하게 몰아갈 때는 합리적인 유익을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충동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또한 행위 원칙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바깥에서 저주가 임하는 상태에서 저주를 쐬었을 때 미치광이의 몸부림으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성령 행위입니다. 성령 행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머물며 저주가 끝나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나의 몸에 대한 주체가 되셔서 나타나는 행위입니다. 본래 인간의 행위는 성령 행위를 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일상적이고 반복되는 모든 행위에서조차 성령 행위는 나타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하였고 저주의 기운에 취한 상태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행위를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미친 사람의 몸부림만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미쳤기 때문에 미친 짓을 하면서도 정상적인 일로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보면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칸트의 사상을 따라 윤리적 경향을 띠는 신학 체계가 세워지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상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갈 수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 행위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할머니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면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지만, 칸트같이 이성적 소양이 완벽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사상가나 철학자들조차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자신이 미쳤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스스로 행위를 하고 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 저주의 기운에 미쳐서 갖게 되는 부담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1절 하반부를 보면 “…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 책에 기록된 규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바깥으로 나가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을 보면 선민이 율법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주가 임한다는 식의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선민이라고 하는 말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저주의 영역 바깥으로 끌어내신 상태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다만 실제로는 저주가 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선민이 율법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주가 임한 것이 아니라 저주가 임했기 때문에 율법을 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저주가 임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가 스스로 행위를 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행위를 하는 주체가 되었을 때 절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원칙대로 행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정한 원칙에 작심삼일이 되는 이유를 흔히 게으름에서 찾습니다. 더 열심히 하고, 더 단단한 의지를 갖고, 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결심하며 맹세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맹세를 해도 절대로 원칙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저주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1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주의 기운을 쐬면 스스로 행위를 해야 하는 미치광이의 몸부림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미치광이처럼 몸부림치며 내가 행위를 해야 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에 절어 있는 상태를 중지시키려면 십자가에 손과 발을 못 박아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지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미치광이의 몸부림은 끝이 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주의 기운을 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미쳐서 자기가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치광이의 몸짓을 멈추기 위해 전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본래 사람의 모습대로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능력과 생각이 모든 면에서 탁월한 신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띠고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행위를 하지 않는 본래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행위의 주체는 하나님 뜻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이심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잘못도 없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면서 왜 그렇게 되셔야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손과 발에 왜 못이 박이셔야 했을까요?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왜 쓰셔야 했을까요? 배에 창을 왜 찔리셔야 했을까요? 저주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주받은 상태를 눈에 보이도록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심은 우리의 생각이 미쳐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배에 창을 찔리심은 우리가 배를 채우듯이 마음을 채우고자 세상에 대해 소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심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모든 모습이 저주의 기운에 취해있는 우리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것이 곧 나의 모습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가시면류관을 쓰고, 배에 창을 찔리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혀야만 미치광이의 상태가 끝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우리에게 내려진 저주는 끝이 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셨기에 예수님 안에서만 세상의 저주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저주는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들어가자 하나님과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드리게 되고, 하나님이 주권자임을 믿기에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처럼 저주가 극복된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마음의 좋음 대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게 됩니다. 또한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이제부터 성령이 내 몸을 움직이는 행위의 주체가 되어주십니다.
물론 이 싸움이 만만치 않습니다. 저주의 기운이 바늘 끝만큼도 비어있는 구석 없이 온 세상을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저주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끝이 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쉬지 않고 바라보아야만 하는데 자꾸 잊어버립니다. 십자가를 잊자마자 저주의 영역으로 튕겨져 나갑니다.
저주의 영역으로 나가 저주의 기운을 쐬면 반드시 저주의 특징이 나타나게 됩니다. 나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잊으면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쳐버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스스로 정한 규칙과 원칙들을 따라서 행동하려는 미치광이의 몸부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잊자마자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기에 만만치 않습니다.
십자가만 잊지 않으면 성령에 의해서 모든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있으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는 것, 성령으로 행위를 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입니다. 문제는 자꾸 십자가를 놓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앞선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스스로 행위를 하고 행위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것은 저주의 기운을 쐬어 미친 상태에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내가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도 미친 상태에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이것을 넘기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태임을 인정함으로써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성령이 나를 움직이게 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체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체험이 날마다 반복되어서 매일의 삶을 꽉꽉 채워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러한 깨달음 자체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이제 은혜 위에 은혜를 허락하셔서 이 깨달음대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저주 기운을 쐬어서 미치광이처럼 몸부림치는 나를 죽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오직 하나님 뜻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님을 따르는 행위로만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