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회를 함께 사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줄거리 :
교회는 지역 예배당이나 예배당 조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빌딩처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사람들 각자가 교회를 삶으로써 존립합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교회를 살아야만 교회는 존립합니다. 현장에서 십자가 생활화로 삼위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룸이 아브라함 후손 됨의 증거이지요.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교회를 사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교회를 함께 사는 아브라함의 후손들
(갈라디아서 3:15~29)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만 교회는 지역의 예배당이나 그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빌딩처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에 출석하거나 다닐 수 없는 것처럼 교회도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교인 각자가 자기 삶의 현장에서 살아감으로써 존립합니다.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자기 현장이라는 말은 예배당이나 성전이라는 개념과 대비해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에게 삶의 현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장은 곧 사명입니다. 바로 이 삶의 현장에서 교인으로 교회를 살게 될 때 이 세상에 교회는 존립하게 됩니다. 내가 현장에서 교회를 삶으로써 주님의 교회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존립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인은 삶의 현장에서 삼위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합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이 꾐에 넘어가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끊임없이 바라봄을 통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는 자들이 교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인들이 교회를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 내용이 오늘 본문에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5~22절에는 율법과 믿음의 관계에서 행위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논증을 더 심화시켜 나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믿음을 물려받을 후손에 대한 약속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주셨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기도 전에 믿음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진 일과 그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일은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증거는 율법이나 할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만을 직면하여 좋아하고 욕구하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마음에서 벌어지는 좋음 대회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시는 상태가 믿음이고 이 믿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조차도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님 설교의 요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말씀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보일 정도로 일치하는 내용이 본문에서도 언급됩니다. 아브라함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 안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아닌 영광의 세상 것들을 보게 됩니다. 영광의 세상 것들을 볼 때는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행위를 하는 주체가 됩니다. 그리고 행위를 하는 주체가 되었기에 율법을 비롯한 행위 원칙을 붙잡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의 구원과 의롭다 여김은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구원과 의롭다 여김이 있었기에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오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써 마음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써 영광의 하나님을 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아담의 후손인 사람은 필연적으로 세상을 영광의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찬란하게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싶어 하고 행위를 하는 주체가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상태가 죄악임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선민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것을 지키면 마음에서 영광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세상 것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마음으로는 율법도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을 지켜서는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마음에 세상 것을 담은 것이 죄악임을 깨달을 때만 예수님이 오셔서 일으키실 십자가 사건은 복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 것을 영광으로 보는 내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깨끗한 마음으로 태어날 때 하나님 아버지만을 영광으로 보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하여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영광의 세상 것을 보고 있고 스스로 행위를 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지독한 죄인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러한 역할이 초등교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한편 26~29절을 보면 이제까지의 말씀이 총망라되어 정리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26~27절을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교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28절을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교인이 교회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교인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은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독생자에게 맞는 사랑을 주십니다. 나의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독생자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독생자에게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사랑이 내 인격의 핵심인 마음에도 주어지게 됩니다. 내 인격이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이 독생자에게 주시는 모든 사랑을 다 받게 됩니다.
27절의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는 부분은 오해를 많이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간다거나 그리스도를 드러낸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막연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면 이런 막연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때 마음은 지금 멀쩡하게 살아있는 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이 머물 곳을 내 몸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몸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입으시게 됩니다. 내 마음이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내 몸은 성령께서 입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황을 교인의 모습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교인이란 이처럼 육체의 몸 대신에 그리스도의 몸을 바꾸어 가짐으로써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교인은 삶의 현장에서 교회를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는 교인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산다는 것은 교인이 된 사람이 다른 교인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다른 교인이란 이미 교인이 된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묻혀서 아직 교인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숨겨진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교인을 의식하며 사는 것을 교회를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산다는 것은 어느 한 공간에 모여야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진 삶의 현장은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명입니다. 그곳이 옮겨지거나 바뀌거나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의 이 상태는 내게 주어진 사명이기에 이 현장에서 교인이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교인이 되었다면 다른 교인을 의식하며 교회를 사는 일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28절을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민족의 차이, 신분의 차이, 성별의 차이는 모두 육체에 근거한 구분입니다. 육체를 벗어버리고 나면 우리의 영인 마음에는 구분이 없습니다. 남녀 구분도 없고 인종의 구분도 없으며 민족이나 국가의 구분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마음이 육체를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더는 내가 어디 출신이고 어느 지역 사람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든 노점상이든 직업의 구분조차 필요 없습니다. 이 모든 구분은 육체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육체에 근거한 구분을 위하여 마음을 다 쏟아가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삶의 모습이 달라야 합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교회를 살아갑니다. 교회를 사는 사람들은 마치 날이 잘 드는 과도로 사과의 껍질을 벗겨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보는 사람에게 대입해서 육체와 관련된 껍질을 벗겨냅니다. 오직 그 사람의 마음을 보며 상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곧 교인의 사회성입니다. 교회를 산다는 것은 교인으로서 사회성을 띤다는 뜻이고 다른 사람을 의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볼 때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교인이면 사람을 볼 때 육체에 근거된 구분을 보지 않습니다. 직업, 성별, 사회적 위치와 같은 구분을 벗겨내고 하나님 크기로 지음 받은 공백의 마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봅니다.
하나님은 4,000년 전 아브라함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후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 아니면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아브라함의 믿음과 후손에 대한 약속도 성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4,000년 전에 본 별들 중에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다 동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모여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아직 교인으로 판명되지 않은 사람을 볼 때 4,000년 전에 아브라함이 보았던 별들 중의 하나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손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과도로 사과껍질을 벗겨내듯이 육체에 근거되어 있는 이 세상적인 구분을 벗겨내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만을 보면서 하나님께 묻고 그 사람 앞에서 교인 됨을 드러냅니다.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많이 기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제 사역의 형태를 조금 변화를 주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제까지 십자가복음방송의 사역은 제가 혼자서 말씀을 공중에 뿌리는 식이었습니다. 저 스스로 삶의 현장에서 교인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였고, 십자가 생활화에 근거되어 성경을 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누가 듣든지 듣지 않든지 공중에 뿌리는 형태로 사역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저도 십자가 생활화를 하느라고 나름 애를 썼고, 그러는 중에 뿌리는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써 똑같이 십자가 생활화를 평생의 과제로 생각하는 분들이 모아졌습니다.
처음에는 십자가 생활화의 말씀을 누가 듣겠는가 하는 의심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공중에 뿌리듯이 사역을 했을 뿐입니다. 이제 사역의 형태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이 저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구체적인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함께 교회를 사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1절의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씀이 뜻하는 대로 우리는 아직도 절름거리고 넘어지고 자빠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을 신앙인의 사명으로 아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이제 우리가 함께 교인이 되었습니다. 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선 내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의 단계를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도 절름거리고 있지만 십자가 생활화를 고정된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에 함께 교회를 살아야 된다는 단계로 옮겨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각자가 교인이 되는 일에 치중했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교인답게 되는 일을 끝까지 해나가야 하는 것은 변함없습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입시켜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육체의 껍질을 다 벗겨놓고 보았을 때 아브라함의 후손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 그리스도를 옷 입을 사람인가 아닌가라는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관점과 더불어 사는 것이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함께 살아야 될 교인들이 각자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생활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저도 사역의 형태를 조금 달리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도하는 중에, 문자로 십자가 생활화의 사역을 하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방송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까지 영상으로 저장되어있는 말씀 사역의 결과물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내용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십자가 생활화를 역설한 내용들입니다.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에는 훨씬 더 삶의 현장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도모한 말씀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십자가 생활화를 함에 있어서 전문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함께 교회 살기를 시작할 사람들을 향한 말씀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에 굳이 같다는 표현을 써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면 십자가 생활화의 전문가들에게 전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십자가 생활화로 들어와야 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내용들이 다소 버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우연히 10년 전의 영상을 찾아보기 전에는 접할 길이 없습니다.
이전까지는 제가 십자가 생활화의 말씀을 뿌렸고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교인들을 모아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우리가 함께 교회를 살게 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교회를 산다는 것은 타인들 중에 섞여있을 교인들을 염두에 두며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 중에서 십자가 생활화로 들어올 수 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드러날 수 있는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문자 사역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분들의 80% 이상은 십자가 생활화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오신 분들일 것입니다. 오늘의 번제 시간을 주 4일에서 주 3일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한 달 반 정도 예전 영상들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제가 집필하는 시간이 없다는 점이 제일 큰 문제이고 체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번제 말씀을 수요일, 금요일, 주일 아침에 세 번을 하도록 조정하고자 합니다.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은 그대로 주일날 저녁에 진행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십자가 생활화의 전문적인 측면을 말씀을 하고 듣는 과정 중에서 들은 말씀을 더 철저히 내 것으로 소화하실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의 양이 부족하다면 이전의 말씀들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의 번제로 채워나가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앞으로는 수요일, 금요일, 주일 3회로 오늘의 번제 말씀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일 오후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2시간에 걸쳐 온라인 모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여유 시간으로 집필에 몰두해보려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사역이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보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될지는 우리가 염두에 둘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든 사역의 변화에 맞추어서 여러분도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교회를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칼로 껍질을 벗기듯이 육체에 근거된 구분들을 벗겨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보는 관점에서 사람을 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인으로서 삼위일체에 가담한 사위일체를 이루어 가시는 중에 교회를 함께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무늬만 남게 된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나의 삶의 현장 곳곳에서 윤곽을 드러내는 일을 위하여 함께 교회를 사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 생활화가 유일한 진리의 삶임을 깨닫도록 은총을 허락해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또 하나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으며 우리 각자가 삶의 처소에서 교회를 살 수 있게 성령으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