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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그 아들의 영’을 받고 못 받고의 차이>의 줄거리 :
누가 감히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냥 보통 사람을 아버님! 이라고 부르는 일도 내 인생을 다 걸고 결혼함으로써 시아버지나 장인어른이 되는 분을 향해 쓸 수 있는 호칭입니다. ‘그 아들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들의 영을 받아야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되었음이 확증되어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그 아들의 영’을 받고 못 받고의 차이
(갈라디아서 4:1~11)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오늘 본문의 중심이 되는 구절은 6절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빠는 아람어로 우리말의 아빠와 똑같이 아버지라는 뜻으로써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8~11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유업을 받을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리로 돌아가 버렸느냐는 지적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그 아들의 영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 아들의 영이란 당연히 예수님의 영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징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다 아들의 영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습관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과 똑같이 아들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3절을 보면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의 위치에 설 때 절대 나타날 수 없는 일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에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등학문이란 인간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지식을 추구하는 노력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와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알고 싶어 했고 자기 삶과 인생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세상이 불과 물과 공기와 흙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였고,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주체적으로 필요한 지식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을 하였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특징만을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언뜻 초등학문이라고 하니 학문의 기초적인 단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하나님의 아들 된 자들의 특징과는 상반되게 나타나는 모습 전체를 일컫습니다. 따라서 초등학문이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지식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율법도 초등학문입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는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초등학문은 하나님의 아들 된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라고 한 것은 초등학문에 종노릇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초등학문에 종노릇하지 않는 모습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빌립보서 3장 8절을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언 1장 7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좋으심을 내 마음에서 일등으로 모시는 경외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을 때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갖고 계시는 뜻과 생각이 전달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이 세상의 초등학문과 반대의 상태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주체성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은 뜻과 계획과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지식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지식과 생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초등학문에 종노릇하는 상태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아들 됨의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5절을 보면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의 명분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아들의 위치에 세우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은 곧 예수님이시기에 아들의 위치에 섰을 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의 영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을 받으면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 내게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특징이었고 아들의 위치에 있게 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에 매인 사람들은 스스로 주체가 됩니다. 스스로 궁금해하고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지식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아들이 된 사람들은 이러한 형태로부터 해방되어서 아버지가 갖고 계신 지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생각 하나조차도 아버지께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이 바로 아들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아들의 영을 보내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아들의 영을 받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입으로 부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내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 들어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들 된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아버지의 뜻과 계획 속에서 본래부터 아버지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을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양자의 영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아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으나 이제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기에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굳이 양자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을 때가 있었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받아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들어가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내가 그저 양자가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양자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이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살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님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않을 때조차도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였으나 아들의 영을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런 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그 아들의 영을 받고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양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1장 15절을 보면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하였듯이 교회를 핍박하던 시절은 물론이거니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결정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가 탕자의 비유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상태를 탕자로 비유하십니다. 아버지 집을 떠났던 탕자는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들로 여기고 계셨기에 돌아온 아들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본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던 때는 아버지를 등지고 떠난 탕자였을 뿐이지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 택정함을 받고 지음을 받은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여러분들은 대단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뿌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아버지를 등지고 탕자로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집으로 돌아온 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 아들의 영을 받았을 때의 첫 번째 특징은 아버지 집을 등진 탕자로 살았을지언정 아버지의 뜻과 계획안에서는 본래부터 아버지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별의별 수를 다 쓰더라도 제 아들과는 혈육상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종교적 습관이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님의 영을 받은 것이라면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결정된 일이기에 끊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로 아들의 영이 임할 때의 특징은 유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유업을 받는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것이 다 내 것이라는 마음의 느낌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연예인 교회에서 전도사로 청년부를 지도할 때의 일입니다. 청년들이다보니 때가 되면 진로와 취직 문제로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은 아버지가 탄탄한 기업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아이들은 진로나 취직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걱정을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다면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세상의 아버지가 조그만 기업을 하나 갖고 있어도 진로와 취직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는데, 하물며 아버지가 이 세상의 주인이시라면 어떨까요? 앞날에 대한 걱정이 생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아들의 영을 받아서 정말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이라면 이 세상을 사는 일에 대해서 걱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지라도 종교적 습관과 교리에 따라 부른다면 삶을 걱정하게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위치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의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8절을 보면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 아들의 영이 임했다면 이 세상 것을 구하는 기도는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사장님의 자녀들이 진로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 세상 문제에 대해서 구하지 않게 됩니다.
이어서 마태복음 6장 31~32절을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것은 세상일에 대한 걱정을 대표합니다. 이는 곧 세상일에 대해 내가 주체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된다, 내가 생각해야 된다, 내가 방도를 찾아야 된다. 내가 대책을 세워야한다.’라는 생각이 있다면 초등학문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초등학문은 내가 주체가 되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추구하려는 모든 노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러한 초등학문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 아들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내려다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시고 앞서서 계획하고 계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주체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이 주체적으로 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내 마음의 좋으심과 존재감에 대해 일등 자리에 모시는 일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아서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정말로 받았는지를 확인해 볼 것을 요구합니다. 나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다면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애초에 아들의 영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면 어쩔 수 없으나 아들의 영을 받았던 자들이 초등학문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선택 속에서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무슨 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예수님 안에서 아들로 결정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제 아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안 볼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이 저를 마음에 안 들어서 안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이보다 더 강력하여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아들의 영을 받았다는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과 나는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육체적 성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것처럼 우리의 영도 예수님의 위치에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의 영이 남자나 여자의 몸을 입고 있을 뿐입니다. 몸이 여자라고 해서 영도 여자인 것은 아닙니다. 영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인 신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전혀 모르고 있던 자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탕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조차도 예수님을 믿고 바울로 변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게 됩니다. 그럴 때 절대로 이 세상에 대해 주체가 되어 스스로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의 주체성은 예수님과 같아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의 존재감과 좋으심만을 내 마음에서 일등 자리에 유지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오직 아버지의 주체성이 표현되는 방식으로만 살게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영을 받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버지의 영을 받은 자들로서 살다가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오늘 본문을 통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이라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면 사도 바울이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로서 이 사실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업을 받는다는 말이 뜻하는 대로 삼라만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진짜 아버지로 모셔서 이 세상을 사는 일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주인이 되셔서 아무 걱정 없이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할 일은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총력을 기울이는 진짜 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의식이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있음을 통하여 언제나 우리의 주체성이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에게만 몰두할 수 있는 아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일을 위하여 그 아들의 영을 주신다는 약속대로 아들의 영을 받게 하시고 그 아들의 영에 이끌림을 받아 종교의 습관대로 부르는 아버지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맺어진 관계 안에서 나의 아버지를 부르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