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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회가 생기는 조건, 없어지는 조건>의 줄거리 :
이 지상에 교회가 생길 때와 그렇게 생긴 교회가 지상에서 없어질 때 모두 특정한 조건이 있게 됩니다. 교회의 생성과 소멸에 관련하여 그동안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본문이 들려주십니다. 물론 교회의 생성은 교인의 생성에 기인하며 교회의 소멸 역시 교인의 소멸에서 비롯됩니다. 교인의 생성과 소멸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한 사람의 인격 안에 이루어지고 유지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가 생기는 조건, 없어지는 조건
(갈라디아서 4:12~20)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갈라디아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존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없어진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생기는 조건은 무엇이고 없어지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표현은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바로 이러한 내용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속했던 장로교 통합측 교단에서는 교인들의 수가 자꾸 줄어드는 문제에 대해 총회 차원에서 논의와 연구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결국 방법이 없다고 해서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교회가 생기는 조건과 없어지는 조건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알았다면 대책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2절을 보면 교회가 생기는 조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켰고 할례를 행했으며 성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도 바울은 유대인 중에서도 특출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율법에 엄격했던 바리새인이었고, 왕족으로서의 자존심을 갖고 있던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으며,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유대 사상뿐만 아니라 당시 헬라 철학에 대해서도 굉장한 식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도 바울이 이방인이었던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아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자신을 구분할 수 있는 유대인으로서의 특징을 모두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도 자신과 같이 되기를 호소합니다. 자신이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불철주야 바라보았듯이 갈라디아 사람들도 이러한 모습을 배워 따르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전 말씀에서 3장 26~28절을 통해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인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마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이제까지 몸을 입고 있던 마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한편 이렇게 교인이 된 사람들은 특별한 사회성을 띠게 됩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기존과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9절을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어떠한 마음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을 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겉 사람 차원에서 존재하는 모든 차이가 없어진 상태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생기는 조건이고 교회를 사는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마치 과일의 껍질을 벗기는 날카로운 과도와 같습니다. 사과껍질을 벗기듯이 사회성을 벗겨내면 누구나 마음은 똑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바라며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러한 태도로 교회를 살게 됩니다. 누구나 육체에 관련된 사회성이라는 겉껍질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기처럼 겉 사람을 벗어버리고 속 사람이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을 때 교회는 생겨나게 됩니다.
본문 12~14절을 보면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5절을 보면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복음을 잘 받아들여서 기쁨이 넘쳤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병인 간질을 앓고 있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 때 해변에 있던 밤빌리아 지방의 버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 지역은 습지대였기에 말라리아가 풍토병으로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전도를 하다 간질이 도졌고 말라리아까지 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병증이 심하여 견딜 수 없었기에 밤빌리아를 떠나 고온 건조한 기후였던 갈라디아 지방으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이 방문이 바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마주한 사도 바울의 모습은 피폐했습니다. 말라리아로 인해 진땀을 흘리고 간질로 인해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겉 사람을 보지 않고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진 사도 바울의 속 사람을 보았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처럼 사도 바울의 속 사람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사도 바울이 그들과 똑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선 3장 26~29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찾아갈 때 유대인으로서 갖고 있었던 모든 특징들을 다 버리고 그들과 똑같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겉 사람을 보지 않고 속 사람을 보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간질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말라리아로 진땀을 흘리는 모습은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겉 사람만을 보았다면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진실한 모습을 접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속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의 천사나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듯이 사도 바울을 영접했습니다. 15절에서 언급되었듯이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야말로 자기들의 눈까지 빼주고 싶어 할 정도로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갈라디아 교인들의 바람직한 모습은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교회는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서는 일어나면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이간질에 현혹되어서 율법주의와 행위 원칙에 종노릇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상 교회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눈까지 빼주고 싶을 정도로 사도 바울을 기쁨으로 영접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제는 사도 바울을 원수처럼 대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짓 교사들이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을 이간질했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이간질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갈라디아 교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3장 1절의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을 날마다 바라보도록 요청하고 권면하고 설득하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도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설령 감동이 넘쳐서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상태는 이간질을 당한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도대체 누가 너희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느냐?’라고 묻고 있는 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한 십자가 복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죽음을 짊어져야 하고, 날마다 주님의 죽음을 바라봄으로써 주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도록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교사들의 이간질의 정체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천국과 구원과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은 이 땅에서 교회를 말살시켜버리는 자들입니다.
교회의 성립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만 이루어집니다. 과도로 사과껍질을 벗기듯이, 십자가 칼로 나의 육체의 관련성을 벗겨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육체의 관련성이 사라진 속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육체의 관련성을 벗겨낸 속 사람으로 대하게 됩니다. 대통령이든 노숙자든 상관이 없습니다. 대통령도 껍데기이고 노숙자도 껍데기입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속 사람이자 알맹이인 마음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그리스도로 옷 입기 위하여 십자가를 붙잡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대신에 율법주의와 행위 원칙을 강조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이 중지되자 곧바로 겉 사람을 보는 마음 상태로 회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던 사람들이 이전처럼 자기 육체를 옷 입는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자기 육체를 옷 입을 때 나타나는 특징은 세상의 행위 원칙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조차도 행위 원칙에 포함됩니다. 자기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행위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세상의 행위 원칙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 명이 모이든 십만 명이 모이든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다시 교회를 세우고자 합니다. 19절을 보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난 아기는 아주 작지만, 사람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다만 여기서 해산이라는 표현에 담긴 뜻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인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아지기 위하여 유대인의 모든 특징과 자부심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복음을 전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도 사도 바울의 겉 사람의 조건을 보지 않고 속 사람을 받아들여서 교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속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다른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마음이 육체를 입고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에 대해 주체가 되어서 반응하고 행위를 하던 삶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다른 세계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 복음을 붙잡을 때 해산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전에 마음이 나의 육체를 입고 살던 세계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리고 이제 나의 마음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나의 몸은 성령이 옷 입으시게 됩니다.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세계에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로부터 교회의 의미에서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지역에 있는 예배당이나 그 조직이 아닙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조직도 아닙니다. 세상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교인 전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른 세계입니다.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 속에 있지만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다른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해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람은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사람의 형상을 입고 해산의 때에 다른 세계에 태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다른 세계에 태어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외적인 형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변화산 사건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하늘에서의 모습으로 변모하십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발산되던 광채는 하나님 아버지의 광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아버지와 하나이셨고 그것은 십자가 사건으로 무덤에 들어가 계시던 삼일 외에는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 버려지고 무덤에 들어가 계시던 때만 하나님과 단절되셨던 유일한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일체 된 상태로만 존재하시던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란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언제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존재합니다. 사람을 품고 계시고 아버지와 일체 되어 계심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가 합쳐진 모습입니다. 단순히 독생자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 되어 계신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육체를 입으시고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형상에는 반드시 사람 관계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19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다시 그리스도 십자가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관계하시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사람과 관계하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럴 때 우리의 몸은 성령이 옷 입으시고 사람을 관계하시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러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24시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지금의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만을 향하지 못하는 나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스스로 깨닫게 하고자 다시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 생활화가 무르익어 갈수록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됩니다.
물론 십자가 생활화의 시작 단계에서는 나 살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세상 것들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자리 잡은 상태를 죽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로부터 내 마음이 그리스도로 옷 입고 아버지만을 담을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러한 과정을 지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행위 원칙으로부터 자유로운 단계가 열리게 됩니다. 그 단계가 되면 성령께서 나의 육체를 옷 입으시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교인이 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겉 사람이 아닌 속 사람을 보게 됩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 성별, 인종, 사회적 위치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내가 대면하는 사람도 나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칼로 겉 사람을 벗겨내야 될 사람이고, 속 사람이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할 사람이며, 몸을 성령께서 옷 입으셔야 할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회를 다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전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선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예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마음이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들을 붙잡고 담는 상태가 죽으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직면하게 됩니다. 이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에 마음은 몸을 벗어나게 되고, 이 마음의 부재 상태가 온전히 이루어질수록 성령님이 나의 몸을 장갑 삼으시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장갑 삼으신 몸은 행위 원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이 사람이 교인이고 이러한 교인들이 각자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다시 이 땅에 나타나도록 복음을 전하겠노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마음이 우리에게도 임하므로 각자 삶의 현장에서 교회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늬만 남게 된 교회의 현실 속에서 전혀 다른 진정한 교회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교인들이 되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