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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2

녹취문: 여신 아데미 숭배자들 틈 속에 낀 나_태승철 (에베소서 5:1~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2.29|조회수75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여신 아데미 숭배자들 틈 속에 낀 나>의 줄거리 :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계명을 어긴다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시 에베소에서 성행하던 우상숭배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에베소는 당시 풍요의 여신 아데미 숭배의 본산과도 같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하시는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은 재물의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의 영적인 의미를 밝히시는 셈입니다.

 

여신 아데미 숭배자들 틈 속에 낀 나

 

(에베소서 5:1~7)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우리는 여신 아데미 숭배자들 틈에 끼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교인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교인 각자가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참된 교인의 모습이 새사람이라 언급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새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새사람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가 언급됩니다. 이것이 여신 아데미 숭배자들 틈에 끼어서 살고 있다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사람은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라는 특별한 환경 속에서 새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교인 각자가 에베소라는 환경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할 때 에베소 교회도 든든히 설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에베소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합니다. 3절을 보면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4절에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에베소의 환경에 대해 새사람이 보일 수 있는 올바른 태도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단순히 계명 같은 율법적 덕목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시 에베소에 편만하게 퍼져있던 아데미 여신숭배를 염두에 둔 언급입니다. 에베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아데미 신전이 있었던 곳으로써 아데미 여신숭배의 본산지라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은으로 만든 작은 아데미 신상을 집집마다 두고 숭배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데미 여신은 구약성경에서 언급되는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이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고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데미 신전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신전과 마찬가지로 신전 창녀들과의 음행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이란 바로 이러한 아데미 신전에서의 행태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다만 아데미 여신이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이란 결국 세상에서 부자 되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영적인 음행이자 간음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가능하게 더러워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부합되지 않는 욕심입니다.

그런데 부자 되기를 바라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에베소 사람들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졌다면 영적으로 음행하고 있는 것이고, 온갖 더러운 것을 담은 것이고, 탐심을 부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단순히 새사람에게서 드러나야 할 도덕적 덕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본문을 이해할 때 우리가 부딪히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을 보면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대표로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일개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어렵게 여겨집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을 본받음이란 새사람의 관점에서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데미 여신숭배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를 하신 이유는 부족함 때문이 아닌 충만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속에 무엇인가 부족함과 결핍이 있어서 세상으로부터 좋은 것을 얻어서 채워지려고 하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스스로 충만함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충만함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동일한 충만하심으로 창세 전부터 택하신 아들들을 사랑하고 계시며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하나님의 충만함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편만하게 퍼져있던 아데미 여신숭배의 핵심은 채워짐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재물을 많이 모아서 마음을 채워보고자 하는 시도가 아데미 여신숭배의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세상을 마주하여 살아갈 때 다른 모습이 나타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삼위일체 안에서 이미 충만하셨던 것처럼, 에베소 교인들 또한 충만함을 이룬 후에 세상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본받음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라면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은 이미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충만하심 가운데 충만함의 기쁨이 넘쳐서 세상이 만들어진 것처럼, 스스로 충만하신 하나님을 가질 때 우리도 충만해져서 기쁨으로 세상을 대하게 됩니다. 이미 충만하고 기쁜 사람은 세상에서 잘되어 재물을 많이 모아서 기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미 충만한 상태에서 창조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이미 충만한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표가 바로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으로 충만하심 가운데 세상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이셨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몸까지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2절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음행이란 성적인 문란함을 가리킵니다만 아데미 여신숭배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자면 영적으로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고 하는 모든 일이 음행입니다.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고 여겨진 아데미 여신에 대한 숭배는 곧 이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모으고, 하는 일마다 잘 되어서 많은 결실을 할 수 있다는 바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는 도저히 관계할 수 없도록 마음이 더러워진 상태입니다.

김치가 하얀 블라우스에 묻은 모습을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김치도 깨끗하고 하얀 블라우스도 깨끗하지만, 김치와 하얀 블라우스가 만나면 더러움이 발생합니다. 이 세상과 우리 마음의 관계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모으고, 하는 일마다 많은 결실을 바란다는 것은 김치를 하얀 블라우스에 담으려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드실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결실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당연함을 속이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살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음행과 간음이고 더러워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축복의 라인 밖에서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것은 탐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나타나는 일이 4절에서 언급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입니다. 누추함이란 속되고 천박함입니다. 이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상태에서 하는 말은 모두 속되고 천박합니다. 다만 이러한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로부터 생겨나는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발견하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발견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질의 풍요와 하는 일들의 형통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속되고 천박하다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를 수 있도록 마음을 십자가로 방수처리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마주할 때 먼저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누추함이 보이고, 어리석은 말과 희롱하는 말을 하는 것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타인을 비하할 이유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내게서 누추함이 나타나지 않는지, 내가 어리석은 말과 희롱하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추함에 이어서 나오는 어리석은 말과 희롱하는 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시 6절을 보면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한다면 아데미 여신숭배를 재현하고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이유는 세상으로는 마음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안 된다고 안타까워 해봐야 그 일이 잘되지도 않고, 설령 잘 된다고 해도 그것으로 궁극적인 마음의 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잠시 채워지는 듯해도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으로 마음을 채우려 하고, 세상일이 안 되면 안타까워하는데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이 모두 어리석은 말입니다. 희롱하는 말은 세상 것을 많이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에 대해 갖는 우월감에서 하는 말입니다. 많이 가졌음을 이유로 갖지 못한 사람을 모욕하고 비하하고 폄하합니다.

4절 하반부를 보면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며 사는 자들의 말은 다 누추한 말이고, 속아 넘어가서 하는 어리석은 말이고,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희롱의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라면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세상없이도 충만한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이미 하나님으로 충만해져 있기에 세상과의 대면은 내게 있는 충만함을 표현하는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충만함의 표현은 감사로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이 잘될 때 감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라면 이미 충만함을 가지고 있기에 일의 잘됨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감사하게 됩니다.

아데미 여신숭배는 재물을 많이 모으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새사람이 된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 틈에 끼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 틈에 끼어서 살아갈 때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뚜렷하게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6절 하반부에서 7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임하나니”라는 표현은 현재형 동사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진노를 세상에서 불행이 닥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불통하고, 중병에 걸리는 것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무의식중에 연결시킵니다. 학자들조차도 이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예수님의 재림 때 임하는 심판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노가 임하는 대상을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지목합니다. 이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자들도 아니고,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 불순종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데미 여신숭배자로 대표되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진노하실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지옥행 사형수로 판결이 내려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순종이란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충만한 상태이며, 하나님을 본받기 원치 않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없을 때 이미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충만하심으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충만함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기는 우리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인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우리 마음이 따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중에 아데미 여신숭배를 그대로 답습하며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얻어서 마음을 채우려 하고, 일이 잘되어서 많은 결실을 기대합니다. 이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세상적인 기준으로 안 좋다고 여겨지는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노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장 재산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병이 생기는 것도 아니라면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상대를 신경 씁니다. 회사에서는 모든 직원들이 사장님의 심기를 눈치 보고 살핍니다. 무엇인가 잘못했을 때 당장 잘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을 큰 잘못으로 여깁니다. 연인 사이에서는 나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신경쓰고 염려합니다. 부부간에도 남편은 아내를 신경 쓰고, 아내는 남편을 신경 씁니다. 조금만 표정이 좋지 않아도 왜 그런지 이유를 묻고 도와주려 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이 불편해지고 노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않는 일을 가장 두려운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기록된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하거나, 예수님이 오실 때에 있을 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란 지금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서 기뻐하시지 않는 마음 그 자체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병이 생기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일이란 어차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많은 고통과 고초를 당하면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본받아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것이야말로 가장 복된 일임을 알았기에, 하나님이 내게로 들어오시기에 불편해하시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불편해하시거나 진노하시거나 원치 않으시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잃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소중한 것이 없어지는 것이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는데 내게 소중한 것들은 다 내버려 두고 쓸모없는 것만 없애신다면 그것은 진노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 자신을 잃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진노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큰일이 생기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게 됨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놈아, 너의 상태를 보니 나를 줄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진노의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마음에서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서 느껴지는 부족과 결핍을 이 세상으로 채우려고 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이 일이 잘됐으면 좋겠는데, 이 일이 잘되면 지금보다 만족하겠는데, 이 일이 잘되면 한숨 돌리겠는데.’라는 마음이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지금 진노하고 계십니다.

내 마음을 살펴봐서 무슨 일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보시며 진노하시겠구나.’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렇게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본 4장 2절에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를 깨닫고 세상 것을 마음에 붙잡은 것에 대해 괴로워하는 자라면 우리가 용납하고 서로 짐을 나눠지는 일을 해야 되는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연쇄 과정과 하나님을 본받음에 대한 이야기를 지식으로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계속해서 세상 것을 추구하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 주님을 따라가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할지언정,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서 하나님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에 이미 충만하심 속에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이자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이미 십자가 주님 안에서 충만함을 이루어 세상으로 나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본받는 말 자체가 축복이고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오늘도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게 하시고 충만함 가운데 나가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자들 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감사하는 말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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