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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회 드라마 속 가정 직장 장면 촬영>의 줄거리 :
교회와 교인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부부관계와 부모 자녀 관계 그리고 상전과 종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교회와는 다른 영역인 가정이나 직장에서 일어나는 삶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가정과 직장생활을 말씀하심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그리고 상전과 종이 모두 교인일 때 드러나는 관계의 양상을 묘사하신 것입니다.
교회 드라마 속 가정 직장 장면 촬영
(에베소서 6:1~9)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지난 시간에 부부관계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서는 부부관계에 이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교회 드라마 속 가정 직장 장면 촬영’이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접하면서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전체적으로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란 단체나 조직으로서의 모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이루는 교인 자체에 대해 말함으로써 교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설명해갑니다. 앞서 부부관계에 대해 살펴보았고 본문에서는 부모와 자녀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가 언급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단순히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에 대한 지침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대전제가 되는 말씀이 앞서 본 5장 21절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은 부부관계는 물론이거니와 부모와 자녀 관계 혹은 종과 상전의 관계를 비롯한 교인에게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의 대전제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이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의식에서 놓치는 것을 두려워함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이야말로 교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의식에서 잠시라도 놓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교인입니다. 이러한 교인들은 서로에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로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로 대표되는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를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의식에서 놓지 않고 주 안에 머무는 사람들 전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들끼리 부부가 되었다면 서로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마음이 항상 주 안에 들어가 있거나, 주 안에 들어가 있어야 됨을 늘 자각하여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들이 부모와 자식 관계가 되었다면 그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본문에서 이어집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사장님과 직원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관계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대한 주석서 등을 보면 상당한 고정관념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와 교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 마치고 개인의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에 대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오해는 교회를 예배당 조직으로 보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하던 시기에는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부르는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조직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단순히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자들은 모두 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부부로 살아가게 되었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또 그 사람들이 자녀를 낳아 기르게 되었다면 그 부모와 자녀 관계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또 그들이 직장에서 윗사람이 되기도 하고 아랫사람이 되는 것 또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드라마의 구조와 닮았습니다. 교회라는 드라마에서 가정이라는 세트장에서 촬영할 때가 있고, 또 직장이라는 세트장에서 촬영할 때가 있습니다. 세트장이 아무리 바뀌어도 결국 같은 드라마의 촬영이듯이 삶의 장소와 관계가 바뀔지라도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정을 살고 직장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가정과 직장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 삶 자체가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출석해야 하는 모임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지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다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식에서 놓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죄적 체질이 강하게 역사할 때 마음이 예수님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해야 하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 머물러야 함을 알고 있다면 여전히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의미에서도 교회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출석해야 하는 곳으로 여기는 고정관념에 따르자면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은 교회 밖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하던 시점에서 그런 교회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하는 중에 몸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교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기에 모임 자체를 교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들이 교인이고 이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지구 위의 전체 교회를 대표하여 가정이나 직장이라는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하나님의 충만함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교회를 대표함이란 이제부터 하나님이 내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 대한 뜻을 펼쳐나가심을 의미합니다. 적어도 내 삶의 영역 안에서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구석구석까지 채워져 나가게 됩니다. 교회는 충만함의 사건입니다. 충만함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바로 교회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인 이상 교회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으며 따로 교회에 출석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머물고 있거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함을 인정한다면 이미 교회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의 체질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주 안에서 마음의 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할 때 교회를 살게 됩니다. 점점 주 안에 머무는 기간은 길어지고 주 밖에 나와 있는 기간은 짧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인의 모습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문에는 부부관계에 이어 부모와 자녀의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살펴봄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갖고 계신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관점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이란 교회라고 하는 큰 드라마에 속해 있는 하나의 세트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를 드라마에 비유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독이신 하나님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이루고 싶으신 장면이 있습니다. 다만 감독이신 하나님의 뜻을 나 혼자서 이룰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정에서는 부부라는 관계,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또 직장에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과 4절을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하였고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5절을 보면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하였습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라는 상황을 보자면 상전도 하나님이 세우신 역할이고, 종도 하나님이 세우신 역할입니다. 다만 이 말씀은 그저 상전의 말에 따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7절을 보면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은 쉽게 말해 감독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종의 역할이라면 감독이 원하는 대로 상전에 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전을 따르는 것은 그를 좋아하거나 존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내 앞에 상전의 역할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 종의 역할을 맡기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9절을 보면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갖고 있는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단지 드라마의 배역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거지 역할을 맡은 배우를 실제 거지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주인공의 역할을 맡는다고 할지라도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할 수 없다면 감독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장면만 등장하는 엑스트라의 역할을 할지라도 감독이 원하는 바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배우는 귀하게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에서 주인이냐 종이냐, 남자냐 여자냐, 자유인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맡기신 배역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내가 종의 입장일 때 앞에 있는 상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관계를 해나갈 수 있으면 됩니다. 내가 상전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상전은 감독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께서 내게 상전의 배역을 맡기시고 마주하는 사람에게 종의 배역을 맡기셨을 뿐입니다. 상전이 무시할만한 존재라서 종의 배역을 맡기신 것을 아님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 관계에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감독이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통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 관계를 통하여 충만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으면 됩니다.
여기서 실천적 의미에서 의문시 될 수 있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상황을 떠올려 봄으로써 이 의문을 분명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을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녀들에게 해당되는 일종의 계명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0장 34~37절을 보면 이와는 정반대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예수님과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우리는 사도 바울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부모와 자녀라는 가정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이 교회라는 큰 틀 안에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모두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교인일 때, 이 땅에서의 모습이 충만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이 땅에서 하나님으로 충만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가정이라는 차원에서 특히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태복음 말씀은 교인이 아닌 상태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라면, 사도 바울은 교인이 된 상태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이 나오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망각되거나 약화되거나 상실되면 안 되는 대원칙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 됨이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부부관계에서 내가 우리가 되어야 할 대상은 배우자가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부부관계에서 나와 배우자는 각자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룬 상태에서 만남을 이루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부모와 자녀는 각자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룬 상태에서 만남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사위일체를 이룬 상태에서 배우자라는 배역을 맡고, 부모라는 배역을 맡고, 자녀라는 배역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자녀가 장성해서 결혼하여 자녀를 낳게 되면 부모의 배역을 맡게 됩니다. 이렇게 맡은 바 배역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달라집니다. 본문은 이렇게 맡은 바 배역을 잘하는 방법과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교인이지만 상대하는 사람이 교인이 아닌 경우에는 어떨까요? 1절의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에서 부모가 교인이 아닌 경우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모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상태라면 당연히 부모를 순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맹목적인 요구가 아닌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교인이고 자녀도 교인이라면 마땅히 순종함이 옮음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이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의식에서 붙잡기를 잠시라도 놓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놓치는 것을 가장 불행한 일로 여기며 십자가를 붙잡는 자들이고, 주 안에서 마음의 흐름이 하늘을 향해 지속되며 사위일체를 이루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인들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세상풍조를 따르고,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의 모습을 띠고 있다면 무턱대고 순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부모님을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부모님 앞에서 하나님께 해야 할 일을 묻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카이로스의 삶을 살면 됩니다.
이것은 비단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상대가 교인이 아닐 경우 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카이로스의 삶을 살 수 있으면 됩니다. 그 상대가 배우자든 직장의 상사이든 그가 교인이 아니어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게 붙잡혀 있고, 세상 풍조를 따르고 있고, 썩어져 가는 옛 구습을 따르는 상태라면 그 사람들 앞에서 에베소서에 말하고 있는 순종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있다면 아내는 믿는 자로서 전체 교회를 대표하여 서 있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직장의 상사나 부하직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대표하는 자로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모습이란 상대하는 사람으로부터 어떤 기쁨도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삼위 하나님과 사위일체가 되어 충만함을 이룬 자로서 상대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획하신 뜻대로만 말하고 행동하며 관계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이고 또 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개념이 명확할 때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들에 대한 태도도 명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 말씀에서 다소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4절을 보면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상하다고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죽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녀가 가풍이나 가훈에서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죽이는 것조차 용인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인권 기준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대단히 파격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파격적인 내용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녀 역시 삼위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어야 하는 독립된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부모의 간섭을 통하여 막히고 방해받는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는 자녀에 대해 갖고 있는 그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그림대로 자녀를 만들려고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자녀를 향해 갖고 계신 그림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자녀에 대해 따로 그림을 갖고 있다면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자녀에 대해 나의 그림대로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은 시기는 보통 사춘기 때일 것입니다. 저는 사춘기를 하나님이 설정하신 중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사춘기의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독립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부모는 끊임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 자녀를 대입시키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자녀를 주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수록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저항감은 심해지고 노여움은 쌓이게 됩니다.
자녀의 사춘기를 가장 슬기롭게 넘기는 방법은 자녀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자녀 없이도 충만함을 이룰 수 있는 부모라면 자녀에게 노여움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훈계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녀를 대할 때는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를 따를 수 있으면 됩니다. 지금 주님께서 말씀해주시는 뜻을 따라서만 자녀를 대할 수 있으면 됩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아도 전부 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통해 보여주는 의도에 대해서는 분명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교회라는 큰 드라마 속에 가정이라는 세트가 있고 부모와 자녀가 만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감독으로서 자녀를 통해 이루고 싶으신 일들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다른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자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어떤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이렇게 되어야 내가 기쁘겠다는 생각은 십자가에서 아예 죽어야만 합니다. 자녀를 향한 감독이신 하나님의 뜻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일치될 때 자녀는 노여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행여나 카이로스의 시간을 따라 나오는 말과 행동을 할지라도 자녀가 노여워한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조치를 취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교인으로서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동서남북 상하 어디로도 조금도 비뚤어짐이 없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주님 안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교인이라면 피차 복종하면 됩니다. 상대방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나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상대가 교인이 아니라면 나는 교회를 대표하는 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면 됩니다. 그들로부터 어떠한 기쁨을 얻겠다는 목표를 설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사위일체 안에서 충만함을 누리는 가운데 그들을 상대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를 통해 온전한 인간관계의 기준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교인끼리는 각자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있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내가 복종함과 말하는 것, 상대가 복종함과 말하는 것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관계가 부부관계에 이루어질 수 있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고, 직장의 상하관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가정도 직장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나는 삶의 자리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아들로서 이미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상대를 대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교회를 대표한다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으로 저절로 채워질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교인은 인간관계의 달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달인들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 안에서 살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교회를 대표해서 나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서 카이로스 시간을 살게 해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내내 교회 안에서 교회를 대표하면서 나의 삶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채워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