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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의 현장 속 영적 맷집과 공격력>의 줄거리 :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싸워서 이기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정도 지켜야 하고 먹고도 살아야 하는 에베소 교인들의 일상의 삶을 고려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살라고 하지 않으시고 싸우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일상생활이 아니라 일상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싸워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싸워야 영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 속 영적 맷집과 공격력
(에베소서 6:10~24)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꼭 영적인 맷집과 공격력을 갖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은 일상생활을 넘어 일상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예배당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지켜져야 합니다. 또한 믿음은 생활이 아닌 싸움을 통해서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는 말은 싸운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믿음을 가진 신앙인은 싸움꾼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일상 싸움을 하는 자들입니다. 일상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믿음도 삶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눈앞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영적인 일상 싸움을 하지 못한 채 일상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영생을 살기 원하고, 새사람으로서 살기 원하고, 하나님을 본받아 이미 충만한 상태에서 살기 원하고,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원한다면 싸워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이 아닌 일상 싸움을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언뜻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의 일상생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삶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정을 지켜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며, 직장생활도 해야 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며, 장사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해야 될 일들에 대해 완전히 망각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요청은 오직 믿음의 일만 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자면 반대입니다. 앞서 믿음이란 일상을 생활하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싸움을 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시장에서의 생활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싸우는 것이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싸울 수 있어야 빛의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듣고 넘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실제로 적용되어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믿음은 곧 행위입니다. 믿음이 곧 행위이기에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행위가 육체의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행위입니다. 우리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행함의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마음의 싸움을 해나갈 때,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손이신 성령께서 장갑으로 끼시고 말과 행동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위의 주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행위로서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은 곧 마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마음의 행위가 이루어져야 함을 염두에 두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을 싸움이라 말하는 본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을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믿음은 마음의 행위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의 행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각의 행위이며, 의식의 행위이며, 욕구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행위를 통하여 싸움을 해나갈 때 우리는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고,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영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이 싸움에 임하는 체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강건해진다는 것은 영적인 맷집이 강해진다는 것이고,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진다는 것은 영적인 공격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1절을 보면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맷집과 공격력을 키운다는 내용을 이번에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라는 표현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맷집과 영적인 공격력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만 하는 이유는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귀의 간계는 지금도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끊임없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서 마귀에 대한 영원한 승리를 이루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에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를 써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승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싸움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마귀의 간계를 실현하는 행동대원들이 있습니다. 마귀나 사탄은 동일한 하나의 대상을 가리킵니다. 마귀는 간계를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귀의 간계를 따라서 우리를 실제로 넘어뜨리는 행동대원들이 있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로 언급된 존재들은 악한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언급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마귀의 간계를 실행하는 행동대원 전체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마귀의 간계를 따라 행동대원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공격해 들어오는 장소는 바로 삶의 현장입니다. 삶의 현장은 혈과 육, 즉 몸을 통해 살아가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삶의 현장을 살아가지만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존재들은 마귀의 간계를 따르는 악한 영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 싸움을 하고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혈과 육의 차원에서 서로 싸우고 경쟁해서 이기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 또한 혈과 육의 차원에서 싸움의 계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야 될 현장은 혈과 육으로 사는 3차원입니다. 이 3차원에서 전쟁이 발발합니다. 그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혈과 육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혈과 육의 차원에서 승리를 원하지만, 우리는 똑같은 삶의 현장을 살면서도 영적인 승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영적인 맷집과 영적인 공격력이 강건해져야만 합니다. 다시 10절을 보면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만남과 사건과 상황이 주어집니다.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마귀는 행동대원들을 시켜서 간계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삶의 현장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영적인 맷집이란 혈과 육으로 만나는 사람이나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마음이 휘말리지 않는 것입니다. 격투기 선수들을 보면 상대 선수에게 주먹으로 맞고 발로 채여도 그 충격이 내부에까지 파고들지 못하도록 자세를 유지합니다. 격투기 선수들에게 있어서 이렇게 버틸 수 있는 맷집은 필수적 요건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혈과 육으로 이루어진 몸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럴 때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만나고 사건이 터지고 상황이 주어집니다. 쉽게 말해 외부로부터 매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영적인 맷집이 없다면 마음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충격을 흡수하고 받아낼 영적인 맷집은 이 세상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동안에는 절대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강건해지라는 말씀대로 마음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주 안에 있음이 분명하다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건이 터지고,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공격을 당할 때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영적인 맷집이 단단해지게 됩니다.
또한 주 안에 있음이 분명하다면 주님께서 힘의 능력을 주십니다. 나의 마음을 흔드는 사람과 사건과 상황들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영적인 공격력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손이신 성령께서 나를 장갑으로 끼시고 말과 행동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싸움을 위한 기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이것을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갈 때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 싸움을 해나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일상 싸움이 있을 뿐이지 일상생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상 싸움을 통해서만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영생은 시작될 수 있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마귀의 간계의 궁극적 목적이란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싸움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로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혈과 육인 몸이 세상에서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당하든 마음이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인 맷집으로 견뎌내고 마귀의 영향력을 피해서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의 흐름을 유지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소망하는 흐름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마귀가 원하는 바를 알아야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 것들에 빼앗기게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흐름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을 향하게 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긴 대표적 예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마귀는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을 죽어가는 몸에 집중시켜서 땅에 묶어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굳건히 주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56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몸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주님 안에 들어가 있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영적인 맷집이 강건하였기에 죽음 앞에서도 마음의 흐름이 하늘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스데반 집사님에게 하늘로부터 영적인 공격력이 주어집니다. 60절을 보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자신을 돌로 치던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구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스데반 집사님은 영적인 싸움에서 완전히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혈과 육을 상대자로 삼아 싸움을 벌입니다. 나를 돌로 치는 사람이 있다면 맞은 돌을 다시 던져서 공격하고자 합니다. 마음이 완전히 몸에 사로잡혀서 억울해하고 분함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마귀의 간계에 먹혀버린 상태입니다.
설 명절이 되면 일가친척이 다 모입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반갑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서로 형편을 깔보고, 자식 자랑을 하는 분위기의 집안이라면 혈과 육의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전쟁을 해서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은 나를 깔보고 무시하는 친척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친척에게 빼앗기지 않고 하늘을 향한 흐름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우리의 싸움입니다.
직접 맞상대하지 않을지라도 속으로 ‘어떻게 저렇게 몰상식할까? 뭘 저렇게 잘난 척을 할까?’라는 생각만 해도 이미 전쟁에 진 것입니다. 마음의 흐름을 빼앗기는 순간 하나님을 빼앗기고, 영생을 사는 빛의 삶을 빼앗기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모습을 빼앗기고, 새사람이 아닌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리게 됩니다. 작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싸움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맷집과 공격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은 하늘을 향하는 마음의 흐름을 끊어내려는 마귀의 간계와 그 행동대원들과의 싸움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지켜내느냐가 문제입니다. 마음의 흐름을 하늘로 유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일상의 삶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장갑으로 끼시고 해나가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영적인 맷집과 공격력을 전신 갑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싸움을 해나가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도움이 됩니다.
15절을 보면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언급되는 것이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당시 복장은 통으로 짠 옷감을 몸에 두르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다만 전쟁 때는 활동의 편의성을 위해 옷을 걷어 올리고 허리띠로 붙잡아 맸습니다. 진리는 바로 이러한 허리띠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진리는 내가 말하고 행동을 해야 될 것에 대한 정답을 하나님이 갖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정답이 아닌 것을 말하고 행동한다면 이미 하늘에 대한 흐름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나의 말과 행동이 원수의 급소를 찌르는 민첩하고 정확한 공격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답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어서 의의 호심경이 언급됩니다. 호심경은 심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슴에 장착하는 가죽이나 금속 등의 재료로 만든 장비입니다. 그리고 의는 곧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의 호심경은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타인으로부터 유익을 추구하거나 타인의 마음에 들고자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시는 일이 아닙니다. 주어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답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하늘을 향한 마음의 흐름은 끊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가를 염두에 두는 것이 바로 의의 호심경을 붙이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나의 말과 행동이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을 섬기기를 거부하고 불구덩이에 던져졌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이들의 행동은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고 계심을 알았기에 우상을 섬기지 않기를 선택합니다. 우리 또한 세상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어떤 상황이나 문제에 개입하게 됩니다. 이때 하늘로 향하는 마음의 흐름이 끊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답을 가지고 계심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동기와 이유는 타인에게서 유익을 구함이나,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함이나, 좋은 성과를 기대함이어서는 안 됩니다.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기에 내가 말하고 행동함이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어지는 16절을 보면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하였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내 마음을 빼앗아가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을 지키려는 싸움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때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장비는 평안의 신발입니다. 평안의 신발을 신고 땅을 딛고서야 제대로 싸울 수 있고 마음을 든든히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인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나의 보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보물은 빼앗길 수 없는 보물입니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이나 사건이나 상황이 나로부터 하나님이라는 보물을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내 보물을 빼앗아 갈 수 없는 존재들과 상대하기에 마음은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언제든지 총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소중한 보물인 목숨을 잃을 수 있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총알을 맞을 일이 없고, 폭탄이 터져도 걱정이 없다면 그곳은 전쟁터가 아닌 놀이터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소중한 보물을 잃을 일이 없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도 나의 보물인 하나님 아버지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하늘에 대한 마음의 흐름이 끊어지게 해서 하나님을 잃을 수는 있을지언정, 내 보물이신 하나님을 빼앗아갈 사람은 없습니다. 또 나의 보물이 하나님이시기에 세상의 사람이나 사건으로부터 또 다른 보물을 얻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기에 전쟁을 하면서도 평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편 이어지는 17~18절을 보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간 관계상 다룰 수가 없기에 저녁 때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의 삶은 일상생활이 아닌 일상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마음이 주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흐름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 안에 들어있을 때만 모든 사람과 문제와 상황 앞에서도 스데반 집사님처럼 하늘을 향한 마음의 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 영적 맷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맷집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의 말과 행동에는 영적인 공격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상생활이 아니라 일상 싸움을 하는 자들로서 십자가 주님을 바라보며 영적 맷집과 영적 공격력을 가지고 천하무적의 사람들로 변해가는 은총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