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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만물 전멸의 능력으로 세워진 교회>의 줄거리 :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같은 전능하심의 힘과 위력으로 천지 만물을 전멸시키심으로 이 땅에 교회가 서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전멸하신 방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우편 자리에 앉히심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서 만물을 전멸하셨고 이제 이렇게 만물이 전멸된 상태의 마음이 된 모든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만물 전멸의 능력으로 세워진 교회
(에베소서 1:15~23)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내용을 보자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심으로 천지 만물을 전멸시키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왜 천지 만물이 전멸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다소 난해합니다.
저도 이전에는 에베소서의 말씀이 참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21~22절을 보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 자체는 특이한 바가 없으나 그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보자면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구절의 주석을 보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이 우주 만물에 대해서 통치자의 자리에 앉으셨다.’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지금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요? 저는 참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권자로 다스리고 계시는 상황은 예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주관하시고,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세포 하나하나를 관장하시면서 숨길을 쥐고 계십니다. 나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라와 민족과 지구의 모든 것과 우주의 해와 달과 별들의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사건을 말한 후에 굳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라고 통치권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우주 만물에 대해서 통치자의 자리에 앉으셨다.’라는 주석가들의 해석은 마치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는 세상에 대해서 또 하나의 주권자를 세우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앞의 구절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어떻게 성경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의문이 들 정도의 난센스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간구입니다. 17~19절을 보면 세 가지 간구가 언급됩니다. 먼저 17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간구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간구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아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9절을 보면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구는 에베소 교인들 각자에게 적용되어야 할 내용들입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22절의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라는 말씀도 개인의 영역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 각자에게 일어날 일과 연관 지어서 만물이 그리스도 발아래에 복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물리적 차원에서 예수님이 만물의 통치권자가 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17절을 보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내 생각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계시란 가려져 있던 것이 베일이 벗겨지듯이 드러남입니다. 따라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으면 하나님의 생각이 내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 되고,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가 내 마음에 있음과 좋음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이 알려지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느껴짐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의 눈이 밝아질 때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잡아당겨서 채워지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질을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소망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을 소망하게 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심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앎은 체험적인 앎입니다. 체험적인 앎을 통해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기업이란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는 상태입니다. 소망이 내가 하나님을 가지는 상태였다면, 기업은 내가 하나님의 몫이 되고, 하나님의 것이 되며,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상태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야 교인이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교인 전체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교인이 되고 교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발동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19절을 보면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시는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게 하십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넣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여 하나가 되게 하시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소유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17~19절에서 소개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내용은 22절의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만을 소망하기를 바라시고,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연쇄 과정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는 길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어떻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연결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란 바로 천지 만물을 전멸시키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천지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19절에서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전능하심으로 천지 만물을 지으셨고 전멸시키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전멸시키시고자 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상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이고, 하나님이 나를 가지실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태를 위해서 전능하심을 통해 천지 만물을 전멸시키고자 하십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연쇄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로부터 비로소 21~22절의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20절을 보면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의 주석을 보면 다른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보좌 우편은 우주 만물에 대한 통치권이 주어지는 자리이다.’라는 식의 해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주석가들이 어떻게 이러한 해석을 해놨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좌에서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왜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 통치권을 넘기시는가에 대한 이유가 전혀 설명되고 있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기에 각 사역에 대해서 다 참여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새삼스럽게 예수님이 물리적인 차원의 우주 만물과 삼라만상에 대해 통치권을 갖는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뒤에야 통치에 참여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없었더라도 예수님은 통치에 참여하고 계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물리적 차원이 아닌 나 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야 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천지 만물을 없애시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만물이 예수님의 발아래 복종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야 할 곳은 바로 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히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나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천지 만물 중에 이런저런 것들이 끼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받을 수도 없었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소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모르고 하나님의 생각도 몰랐기에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할 마음에 만물을 들여놓고 세상으로부터 있음과 좋음을 느끼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만물이 끼어있는 상황을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완전히 전멸시키고자 하셨습니다. 19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데리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 자리에 앉히십니다. 보좌 우편 자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자리가 아닌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그 무엇도 끼어있지 않고 밀착돼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봤을 때 보좌 우편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천사들조차도 예수님보다 하나님과 가까울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은 당시에 천사들을 일컫는 별명이었습니다. 모든 이름이라는 표현에서 언급되듯이 천사를 포함한 어떤 존재보다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가까움에 대해서 뛰어나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경쟁을 한다고 치면 예수님이 일등이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 안에 들어간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게 됩니다. 세상 만물 중에서는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보다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너무나 많은 천지 만물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개입하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자 내 마음은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자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천지 만물이 전멸되는 상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이 태초에 전능하심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과 동일한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부활시키시고 승천하게 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만물을 전멸시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도 일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22절의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는 말씀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에서 만물이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만물 중에 단 하나라도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에서 만물을 제거하시기 위해 그 전능하심으로 역사하신 것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으로 들어갈 때 만물이 예수님 발아래 복종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고,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끼어들 수 없게 됩니다.
이어서 23절을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천지 만물을 제거하신 각 개인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형성하는 교인 각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만물을 제거한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동안에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한 교인들 전체가 이루는 교회는 만물 위에 있게 되고 그 교회의 머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쪽을 향하는 일에 대해 머리가 되시고, 세상 쪽을 향해서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때 육체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셨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몸이 이 땅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들어간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몸은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몸이 이 땅에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하나님 우편에 머무는 동안에 이 땅에 남아있는 몸이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공생애 때 예수님의 몸을 대신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때 예수님의 몸은 이 땅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이 예수님의 몸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만나는 대상에게 하나님의 생각이 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씀에 담긴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만물에 그대로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삼라만상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있음도 좋음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충만함에서 배제된 채로 살아갑니다. 오히려 죄와 악으로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교인이 되고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물 속에 거하는 교회는 예수님의 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 각자는 자기의 자리에서 만물을 상대합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를 상대해도 만물을 상대하는 것이고, 아내로서 남편을 상대해도 만물을 상대하는 것이며, 부모로서 자녀를 상대해도 만물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마음이 하늘에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공생애 때와 똑같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면서, 이로부터 생겨난 하늘의 기운을 그대로 발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몸으로 만나 관계하는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뜻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해 만물의 충만함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이 나를 기업으로 가지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아야 합니다. 나의 마음에서 만물이 전멸되어야만 합니다. 이 만물을 전멸시키는 역사가 바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끌고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낄 수 없듯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도 만물이 제거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는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만물이 전멸되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역사를 따라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인들이 모인 전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공생애 때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받아들이고, 관계하는 모든 만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실현해나가게 됩니다. 만물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역사가 교회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교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서 천지 만물을 제거하시기 위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던 그 전능하심으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여러분이 만나는 만물에게 하나님의 충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이 경이롭게 표현하고 있는 교인과 교회가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