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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3층 세계에 생긴 천국 연결 신작로>의 줄거리 :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3층의 구조로 된 세계를 소개하십니다. 맨 위가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 그리고 그 아래가 사람의 마음이 속한 공중이고 맨 아래가 사람의 몸이 속하여 있는 땅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속한 공중으로 마귀가 침입합니다. 그 결과 천국과 공중은 완전히 차단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땅으로 오셨지요. 이제 땅에서 천국으로 직접 진입해 들어가는 신작로를 만드셨습니다.
3층 세계에 생긴 천국 연결 신작로
(에베소서 2:1~10)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신작로(新作路)는 새로 만들어진 길이라는 뜻입니다. 보통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새로 낸 길을 가리킵니다.
예전에 서울 강릉 간 도로를 보면 대관령을 구불구불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형태였습니다. 한편 새로 뚫린 도로는 대관령 비탈에 고가도로를 세워서 길을 폈기에 굉장히 시간이 단축되었고 차량의 왕래도 늘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이 아침에 출발해서 경포대 앞바다를 보면서 점심을 먹고 안목에서 커피를 마시고 돌아갈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KTX 고속열차가 생겨서 사람들의 왕래가 이전에 비해 몇 배나 늘어났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좋은 길이 생기면 왕래가 잦아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가지 길이 뚫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릉에 처음 오시거나 너무 오랜만에 오셔서 구 대관령 길밖에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신작로나 KTX가 생긴 뒤로 강릉에 와 본 적이 없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천국은 강릉 같은 외지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우리의 진짜 집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땅에서 천국으로 가는 신작로를 열어주셨습니다. 서울에서 강릉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KTX를 타면 청량리에서 1시간 30분 걸립니다. 한편 우리 마음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 집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으로 나와 살다가도 다시 천국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정말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이 맞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교인과 교회의 본래 모습을 말하는 중에 3층 세계관을 언급합니다. 맨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이 있고, 그 아래에는 공중이라는 차원이 있고, 맨 아래에는 땅이라는 차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 3층 세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천국과 공중과 땅의 3층 세계관은 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 각자에게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3층 구조의 세계에서 마귀의 침투로 인해 공중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습니다. 천국과 공중과 땅으로 이루어진 3층 구조의 세계 속에서 마귀는 공중과 천국의 틈새를 공격하여 차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 마귀의 공격을 미워하기는커녕 호응하고 말았습니다. 내부로부터 마귀에게 협조한 셈입니다. 그 결과 마귀는 성공적으로 공중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국과 공중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천국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 몸이 거하는 땅에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 땅에서 공중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천국으로 가는 신작로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신작로는 일반적으로 넓고 큰 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4절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좁은 문이고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일단 이 길로 들어가 보면 어떤 장애와 막힘도 없이 뻥 뚫린 신작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강릉에 오면 파란 바다를 보면서 탄성을 지르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만드신 신작로를 따라 땅에서 천국에 이를 때에는 바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좋음에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만드신 신작로를 따라 땅과 천국 집을 왕래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이렇게 땅에서 천국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과정을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등장합니다.
5~6절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것은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함께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함께 일으키셨다는 것은 승천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음을 가리킵니다. 승천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언급해온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첫 번째 근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심을 받는 방법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함이니”라고 하였고, 8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참여할 때 네 번의 “그리스도와 함께”가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승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써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땅에서 천국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가지 않는 삶은 어떨까요? 본문 1절을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천국과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3층 세계관에서 마귀는 공중과 천국 사이에 침투하여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결과 공중과 천국은 차단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차단된 상태에서의 삶을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을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란 곧 이 세상 풍조를 따라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물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프토마(παράπτωμα)는 마땅히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상태, 올바른 길로부터 떨어져 나온 상태를 가리킵니다. 또 죄로 번역된 헬라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는 과녁을 벗어나 빗나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6절을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래 모든 사람의 마음은 마땅히 하나님 보좌 우편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그런데 마귀의 유혹을 받아 그 자리에서 머물지 못하고 떨어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 우편 자리를 유지하지 못한 채 떨어져 나오자 이로부터 나타난 결과가 죄입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과 직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직면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바로 보좌 우편 자리입니다. 그런데 보좌 우편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증거는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허물과 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해야 할 모든 말과 행동을 점선으로 그려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점선을 따라 실선을 그려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직면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점선이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처음 글자 연습을 할 때를 보면 점선을 따라 실선으로 그려갑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말과 행동에 대해 점선으로 그려놓으셨습니다. 이 땅에서 실제 말과 행동은 그 점선을 따라가는 것일 때 온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점선과는 아무 상관 없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허물입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는 자리로부터 떨어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점선으로 그려놓으신 하늘의 뜻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말과 행동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허물로부터 죄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할 때는 오직 하나님의 있음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망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공중에 있는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땅에 있는 몸쪽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붙어버렸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러한 상태에 대해 말하기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이고,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를 따르는 것이며, 허물과 죄 속에 사는 모습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장소이고, 공중은 우리의 영인 마음이 거하는 장소입니다.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은 우리의 몸이 거하는 장소입니다.
이 3층 세계의 구조는 사실 참 아름답습니다. 공중에 있는 우리의 마음이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면, 몸이 있는 이 땅에서는 너무나 아름답게도 천국에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을 직면한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호흡하고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평강 가운데 유지됩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3층 세계의 구조에 마귀가 침입해 들어와서 공중에 있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차단했습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이 마귀의 유혹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승천하고, 함께 보좌 우편에 앉게 됩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그리스도의 신작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작로 속에서 왕래하지 않는 한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네 마음이 있음을 의식해야 될 대상은 땅에 있다. 네 마음이 좋음을 소망해야 될 대상은 땅에 있다’고 속삭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형통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향함은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마귀의 말씀에 넘어가고, 마귀의 설교를 듣고, 마귀에게 은혜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마귀에게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 대해 바람이 생긴다면 마귀의 속삭임이라는 것을 압니다. 내 마음에 좋음의 대상이 되는 분은 유일하게 천국에 계신 하나님뿐이심을 압니다.
그런데 마귀는 공중과 천국 사이에 끼어들어 와서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차단하고 땅을 직면하도록 돌려세웁니다. 몸이 있는 땅에서 있음을 느낄 존재감의 대상을 찾게 하고, 좋음의 대상을 소망하게 합니다. 이것이 허물과 죄 속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끊어진 죽음의 상태입니다. 몸은 살아있지만 마음이 천국과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상태입니다.
예전에 강릉은 구불구불한 대관령을 타고 넘어가야 하는 접근이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KTX가 생기고 신작로가 생기면서 접근이 쉬워지자 사람들의 왕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신작로를 통해 우리 마음은 천국을 왕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천국에 가는 일은 강릉에 왕래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작로를 통해서 천국을 왕래할 때 놀라운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7절을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이 어떠한가를 이 땅에 드러내는 기지국이자 송신탑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좋고, 천국의 기운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천국 기운을 따라 사는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천국 기운이 나를 통해 이 땅에 송신되고 전파됩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이라면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편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유혹을 받아 세상 풍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이와는 반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항상 부족과 결핍을 느낍니다. ‘나는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삶이 개선되고 향상되기를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나오는 말과 행동은 습관적일 수 있고, 이 세상의 가치 기준이나 유행을 따르는 것일 수 있지만 세상 풍조를 따른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만드신 신작로를 따라 땅에서 천국으로 마음이 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이 땅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상황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나의 판단과 생각에서 부족과 결핍을 느끼고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작로를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분과 함께합니다. 마음이 하늘에 머무는 동안에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점선으로 그려놓으신 뜻을 따라서만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상적이고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일이 이루어짐으로써 내 마음이 기쁠 수 있다고 믿고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일입니다.
이제 수능도 끝나고 입시 결과가 발표되는 시기가 가까워졌습니다. 세상의 부모들은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기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얻더라도 진정한 기쁨은 찾아오지 않고, 세상에서 어떤 일을 성취하더라도 진정한 만족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기뻐하고 만족하겠다는 생각이야말로 실현 불가능한 이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만드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신작로를 통해서만 천국을 왕래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점선을 따라 실선을 긋듯이 하늘에서 정해놓으신 하나님의 뜻이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방법이자 실천 가능한 방법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는 허락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곧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럴 때 함께 부활하고, 함께 승천하고,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작로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 풍조를 따르며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이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 이끌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들을 통해 좋음과 만족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실 때 이 세상에서 뭔가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이 마귀의 속삭임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의 좋음과 만족은 이 세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마귀에 이끌려가는 것이고, 마귀가 하는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영으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바람이 생기는 것이야말로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를 따르는 것임을 엄밀히 구분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3층 세계의 구조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천국이 있고 공중이 있고 땅이 있습니다. 천국에는 우리 아버지가 계시고, 공중에는 우리 마음이 있고, 땅에는 우리 몸이 있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땅에서는 하나님의 좋으심과 천국의 기운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기지국이자 송신탑으로써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가 그것을 막았고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대신에 땅으로 떨어져 내려오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허물입니다. 그 결과 말과 행동은 마귀의 이끌림을 받게 되었고 이 세상에 가졌으면 좋겠고,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세상 풍조를 따르는 죄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붙어버린 마음이 공중을 거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신작로를 만드셨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진 십자가를 붙잡을 때 하늘로 직통하는 그리스도 신작로를 통해서 천국을 왕래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강릉을 오고가며 바다를 보고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돌아가는 것보다 백배 천배나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천국과 땅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진행되는 진짜 교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신작로를 따라서 천국과 땅을 왕래하며 사는 천국 기운의 송신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