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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2

녹취문: 육체 관련 차별 의식 없이 사는 사람들_태승철 (엡 2:11~2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2.15|조회수5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육체 관련 차별 의식 없이 사는 사람들>의 줄거리 :

그리스도의 교회는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이 땅에서 육체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그 어떤 차이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물론이고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 그 어떤 육체 관련 차별화 의식도 교인들 서로 간에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땅 위에서 전혀 땅스럽지(?) 않은 상태를 교회는 만들어 냅니다. 단지 이 세상 전체에 대해서 교회는 전적으로 차별화되어있음은 철저히 알고 있습니다.

 

육체 관련 차별 의식 없이 사는 사람들

 

(에베소서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육체와 관련하여 차별 의식 없이 사는 사람들 전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요즘 차별금지법이 생길 정도로 차별은 중요한 사회적 문제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바는 보다 근본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차별(差別)이란 말 그대로 차이를 두고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차별화(差別化)는 구별된 차이를 인식하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화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차별화를 위한 기준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단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남자와 여자로 나누면 성별의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다시 남자에 한해서 생각하면 남자라는 단어 자체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라는 단어에서 키가 175cm 이상의 남자라는 기준을 제시하면 구별이 이루어집니다. 이에 더해 어떤 회사에서 175cm 이상의 남자만 입사할 수 있다는 기준을 제시했다면 차별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공식적인 기준이 아니더라도 어떤 여성이 남자친구의 키가 175cm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그 마음 안에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성을 40세 이상과 미만으로 나눈다고 하면 그 자체는 객관적인 구별이고 아직 차별의 단계는 아닙니다. 그런데 40세 이상은 입사할 수 없다는 기준을 붙이면 이때부터 차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이런 식으로 무수한 구별과 차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으로서의 기본권에 있어서 만인 평등을 헌법으로 보장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실생활 속에서는 저마다 마음속에 갖고 있는 기준을 따라 엄청난 차별대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참으로 멋지고 자부심이 생길 만한 교회의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차별화 의식이 완전히 제거된 사람들이 교인이며 그러한 교인 전체가 교회라는 내용입니다. 이 세상 삶의 현장에서 육체 관련 차별 의식이 완전히 제거된 사람들이 바로 교인이고, 그러한 교인들이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육체 관련 차별이 살아있다면 교인이 아니며 그 사람은 교회를 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인으로서 이 땅 자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차별화 의식은 있습니다. 다만 이 세상이라는 평면상에서 육체와 관련된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각 사람이 갖고 있는 차별화의 기준을 따지자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다양한 차별 중에서 대표적으로 선민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별을 이야기하면서 교회의 특성을 언급합니다. 교인은 선민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별을 하지 않는 자들이며, 교회란 차별 의식이 완전히 제거된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아들들을 택하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유대인이 이 땅에 존재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이 아닌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만민 중에서도 하나님이 아들로 택하신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유대인들 중에서도 아들로 택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는 창세 전에 천국에서 일어난 예정의 관점이 아니라 바로 이 땅의 관점에서 교회의 특성이 이야기됩니다. 말씀드렸듯이 교회는 차별 의식이 없는 교인들 전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땅의 관점에서 교회의 아름다운 특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땅의 관점이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차별이 이루어지는 곳이 땅이기 때문입니다. 육체 관련성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차별을 만들어내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3층으로 이루어진 세계 구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3층 세계를 통해 영적 관련성을 명확하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3층 세계의 구조를 보면 천국과 공중과 땅이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는 차원이고, 공중은 사람들의 마음이 거하는 차원이며, 땅은 사람들의 몸이 있는 차원입니다.

본래대로 말하자면 공중에 자리한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소원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공중에 있는 마음의 만족이란 땅에 있는 육체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공중에 있는 마음이 하늘로 가서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원하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내려오셔서 이 땅의 몸을 살아가시게 됩니다. 이러한 3층 구조의 삶은 균형과 조화가 갖추어진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공중과 천국 사이에 마귀의 개입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하늘로 올라가야 될 마음을 땅에 있는 육체로 향하도록 유혹하였고, 그 유혹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육체의 조건과 환경이라는 육체 관련성은 마음의 만족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1절을 보면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육체 관련성을 염두에 둘 때 에베소 교인들은 이방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할례를 받은 유대인으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라 무시당했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 12~13절을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이렇게 이방인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과 마음이 속한 공중 사이에 마귀가 침투해 들어와서 사람의 마음은 땅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땅으로 내려와 육체에 붙은 상태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육체와 관련하여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은 선민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오시리라는 이른바 메시아 대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준에서 보자면 이방인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로부터 배제된 자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방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소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공중에서 땅으로 내려와 육체에 붙어 있고 마귀에게 붙잡혀 있는 상태에서 도무지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어떠한 연결점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언약은 성전을 가졌고 할례를 받고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차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에베소 교인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받았던 차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러한 차별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13절에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땅으로 내려와 있던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는 마음이 육체의 관련성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만의 특징으로 붙잡고 있었던 성전이나 할례나 율법과 계명 같은 것들은 전부 육체 관련성 안에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것은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더 이상 육체 관련성에 매이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육체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의 관련성으로 비롯된 수많은 차이를 넘어, 하나가 될 수 있는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변화의 내용이 14절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14~15절을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화평은 곧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평화(平和)를 한자를 풀어보면 같을 평(平)에 화평할 화(和)를 씁니다. 여기서 화평할 화(和)를 다시 풀어보면 벼 화(禾)에 입 구(口)자가 붙어있는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 입에 들어가는 쌀의 양이 똑같을 때 나타나는 일이 평화라는 뜻입니다.

육체에 매여 있을 때는 모든 것이 한정되어 있기에 마음에서 좋게 여겨지는 것들을 가지기 위해서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으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게 여겨 경쟁이 일어나고,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을 차별하게 되었습니다.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삼류대학 나온 사람들을 차별하고, 삼류대학이라도 나온 사람들은 대학을 못 나온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모두가 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화평이 생길 수 없는 구조입니다. 서울대 인원이 한정되어 있으니 경쟁을 하게 됩니다. 경쟁을 하니 이긴 자와 진 자가 생깁니다. 이긴 자는 진 자에 대해서 차별 의식을 갖고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진 자는 패배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이 땅에 있는 육체에 붙어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은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육체 관련성을 벗어나서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육체의 관련성을 벗어나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의식하고 욕구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님을 바라더라도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서울대는 인원수가 정해져 있고, 돈도 나눠 가질수록 액수가 적어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하나님을 완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이 너무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육체 관련성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이 육체를 떠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육체 관련성의 모든 차별들은 다 사라집니다.

 

이로부터 진짜 자유가 나타납니다. 육체 관련성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로도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총인가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을 만날 때 육체 관련성을 기준으로 삼아 상대를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

방송을 들으시고 강릉에 찾아오는 분들을 보면 처해 있는 상황이나 영적인 상태가 천태만상입니다. 소위 육체 관련성의 기준을 가지고 보면 계층도 다양하고 빈부의 격차도 있으며 학벌도 다양하고 출신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서는 모든 분들이 똑같이 여겨집니다. 저 자신도 이러한 마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할 정도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을 고수할 때 차별 의식은 제거됩니다. 그리고 각자가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21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각자를 마치 건물처럼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흩어져있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건물이 연결된 것처럼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강릉에 있고, 말씀을 듣고 계신 분들은 경상도에 계시고, 전라도에 계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 삶의 모습 전체를 볼 수도 없고, 그것이 어떻게 교회를 이루게 되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동안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써 육체 관련성에 대한 차별이 모두 제거되고 교회를 사는 모습을 보십니다. 교인 전체를 보시며 교회를 만들어 가십니다.

바둑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바둑을 둘 때 상황과는 전혀 관계없는 곳에 돌을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한 점씩 두면서 바둑이 진행되다 보면 어느새 흑과 백이 자기 집을 지어가며 형태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 하나를 인연으로 온라인상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삶의 현장은 바둑판과 같고 우리는 바둑알처럼 이곳저곳에 흩어져있습니다. 이렇게 흩어진 상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각자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람과 만나 생활하고, 차별 의식이 없는 상태로 교회를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바둑알들이 차곡차곡 밀집되어 집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 땅에 거하실 수 있는 장소로서의 교회를 지어가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어가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각자에게 허락된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뿐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땅에서 마음이 육체에 붙어서 생겼던 모든 차별 의식은 십자가를 통해 없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마주할 때 교회를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각자 삶의 현장에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보시면서 하나의 교회로 지어가십니다.

바둑판에서 띄엄띄엄 있던 바둑알들이 점점 더 밀집되어 집을 이루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각자가 지구라는 바둑판 위에서 어떤 차별 의식도 없이 사람을 만나고 대할 때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를 사는 삶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면서 이 지구 위에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어져 가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위에서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교회를 지어가시기 위한 벽돌로 쓰실 수 있도록 그리스도 예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은 육체 관련성에서 비롯된 모든 차별이 제거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을 만나고 대함으로써 하나님이 교회를 지어가시는 사역 속에서 하나의 벽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오늘도 이 지구를 보시며 교회를 지어가시는 사역의 현장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육체 관련성에서 비롯된 차별 의식 없이 사람들을 대하는 교회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교회를 지어가시는 사역에 필요한 하나의 벽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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