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개천에서 용 나듯 땅에서 마음 난다>의 줄거리 :
에베소 교인 중에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상황이 실패나 좌절로 여겨져서 낙심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던 모양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 갇혔다는 사실은, 과연 창조주요 주권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에 대한 의심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갇힌 상황이 오히려 에베소 교인들의 영광이라고 언뜻 이해가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개천에서 용 나듯 땅에서 마음 난다
(에베소서 3:1~13)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개천은 집안에서 버린 물이 흐르는 개골창이 길게 이어지는 시내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수도 물이 흐르는 수로입니다. 그러므로 냄새가 나고 지저분합니다. 그런데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용은 성경에서는 사탄을 가리키지만 동양에서는 신성하게 여겨지는 동물로써 지위와 권력을 상징합니다. 조선시대 임금님들이 입던 의복을 용포(龍袍)라고 불렀던 것과 같습니다. 이 속담은 개골창처럼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고 불가능한 업적을 이루거나 매우 높은 지위에 이르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한편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해 3층 세계의 구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3층 세계의 구조를 보자면 천국과 공중과 땅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 몸이 거하는 땅은 환경과 조건의 구분 없이 개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의 자리에 있어도 땅에 있기에 개천이고, 감옥에 있어도 땅에 있기에 개천입니다.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왕의 자리에 있는 사람보다 특별히 더 나쁜 곳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업이 잘돼서 돈을 많이 벌어도 시궁창이고, 사업이 망해서 돈을 못 벌어도 시궁창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은 시궁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진 것만큼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시궁창을 떠나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파리의 에펠탑은 지상에서 보면 무척 높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자면 하나의 점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모두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땅에서 보자면 높고 낮음, 잘 되고 못 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자면 이 땅은 근본적으로 개천이고 시궁창입니다.
그러나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처럼 십자가 복음은 마음을 시궁창 같은 땅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고 하늘로 날아오르게 합니다. 본래 이 세상은 마음에 담을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담을 수 있도록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이란 무척 고귀합니다. 이 마음의 고귀함에 비하자면 세상은 시궁창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지음을 받은 이유는 하늘에 계시는 거룩하신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담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함이란 가장 좋게 구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에 담아야 될 대상의 자격을 놓고 보자면 하나님을 담도록 만든 마음에 대해서 이 세상은 왕의 자리도 시궁창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고귀함과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이 깨지고 삶의 균형이 깨지는 이유도 마음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 전부를 가져도 마음의 고귀함과 소중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소중한 마음을 가지고 이 땅이라는 시궁창에서 뒹굴고 있으니 평안과 균형이 깨지고 불안과 염려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마음의 고귀함과 소중함을 모르면 시궁창이나 개천 같은 이 땅에서 뒹굴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야 함을 알고 있지만 내 마음에 스며들어 있는 죄악의 체질이 시궁창 같은 땅에서 뒹구는 것을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과 시궁창에 뒹구는 익숙함 속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또한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나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말하거니와’에 해당하는 동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문을 직역해보자면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14~15절에서 나타납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는 내용이 이어지는 형태입니다. 원래대로 말하자면 1절 이후에 바로 14~15절이 이어져 나와야 주어와 동사가 있는 온전한 문장 구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절을 기록한 뒤에 추가로 설명해야 될 점이 있음을 깨닫고 2~13절을 삽입하고 다시 14~15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설명해야 될 내용이란 바로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에베소서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갇히게 된 이유가 2~13절에 걸쳐 설명됩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본래 구원이나 메시아 대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앞서 본 12절에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했던 바와 같습니다. 그랬던 에베소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외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니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만드는 과정에서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해 에베소 교인들은 낙심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신들을 위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1절과 13절을 연결시키면 ‘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가 되었다 /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영광인지가 2~12절까지 언급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결정하신 그 은혜의 경륜을 따라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은 오직 자신들뿐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방인들을 개라고 부르며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심지어 유대인들이 구원의 상징이자 민족적 자존심으로 여기고 있던 성전이나 할례나 율법까지도 필요 없다고 제시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말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를 박해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성전도 할례도 율법도 갖지 못한 이방인들은 멸망으로 운명 지어진 개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나사렛 청년을 믿음으로써 구원이 가능하다고 하니 이단 중에서도 이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박해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로마 당국의 천부장과 부하들이 개입하면서 사도 바울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체포하게 됩니다.
그렇게 체포된 상태에서 2년의 시간을 보내던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재판받기를 원한다는 의견을 냈고,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때가 64년경입니다. 이 기간 동안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자신의 소식을 듣고 좌절하거나 낙심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5절을 보면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를 말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외에는 구약시대라든지 혹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모든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 들어있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인들 또한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 영광스럽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광스럽게 여기라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란 유대인들이 이를 갈 수밖에 없을 정도의 내용이었습니다. 이처럼 풍성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면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유대인들과 같은 시점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본래 이방인으로서 성전 생활도 하지 않았고 할례도 받지 않았고 율법도 지키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일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에 있던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전을 짓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직 마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 안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는 곧 십자가 예수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또 “그를 믿음으로”는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한 뒤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서 세상을 빠져나간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렇게 이 세상으로부터 마음이 빠져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을 은혜 가운데 받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사건은 환난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믿음이 약한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상태를 보고 천국 복음이 이 땅에서 전파되는 일에 실패하였다고 여기거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좌절된 것이 아닌가 여길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이토록 헌신하는 사도 바울의 선교가 방해를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에 대한 의심조차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으로 인해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혹은 자신이 겪는 환난을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의심할 이유로 바라보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영광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복음의 내용이란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인격의 핵심 요체입니다. 이 마음이 세상을 떠나는 일에 있어서는 이 땅에서 몸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 떠나기는 남녀노소나 빈부귀천과 상관이 없습니다. 외모의 생김새나 건강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가족관계가 어떻든 상관이 없습니다. 몸이 감옥에 갇혀있든 왕의 자리에 있든 상관이 없습니다. 풍성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축복은 개천에서 용 나듯이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다는 사실도 문제가 될 수 없었고 이를 통해 낙심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일을 두고 낙심하였다면 그것은 마음이 아직도 이 땅에서의 높고 낮음을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붙잡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몸이 처한 감옥에서 빠져나와 하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감옥 밖에 있는 에베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을 두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아닌가를 의심할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사도 바울같이 헌신적인 사람에게 왜 고통을 주시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렇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낙심(落心)이란 말 그대로 마음이 뚝 떨어지는 상태입니다. 마음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갈 뿐 땅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이왕 기도를 해주려면 마음이 땅에 붙잡히지 않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시궁창 같은 감옥이라는 환경으로부터 빠져나와서 아버지께로 올라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지 낙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특권층이 되는 것을 출세로 생각하고 용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모든 특권을 소멸시키고 뭉개버립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용 되겠다는 출세 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십자가는 원수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개천에서 용 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땅에서 가장 높은 곳조차도 땅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땅 전체를 빠져나가 하늘로 가는 길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자면 “땅에서 마음 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땅에서 마음이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본래 이 땅이란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적용되어야 할 장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공중이라는 차원에 있습니다. 이 마음이 마귀에게 이끌려 땅으로 쏠리지 않고 하늘로 갔더라면 땅은 땅대로 하나님의 뜻이 적용되는 장소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셔야 될 마음이 이 땅에서 뒹굴게 되면서 하나님의 뜻도 적용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그야말로 시궁창에서 뒹구는 개나 돼지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땅에 있는 일이라면 설령 가족에 대한 문제일지라도 마음을 붙드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족에게 문제가 생긴 상황도 시궁창입니다. 우리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시궁창을 빠져나가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시궁창이 아니게 됩니다.
세상이 시궁창이 되는 이유는 마음 때문입니다. 마음의 고귀함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세상일들이 시궁창 같습니다. 그 정도로 마음이 고귀하다는 의미이기에 마음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세상은 더 이상 시궁창에 비유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적용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될 현장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담도록 고귀하게 만들어진 마음이 세상에 관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럴 때 세상은 마음의 고귀함에 비하면 시궁창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마음이 시궁창 속에서 뒹구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에베소 사람들은 시궁창에 뒹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전했고 이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란 유대인처럼 할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성전에 모여서 종교행사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마음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과 함께 시궁창 같은 세상을 떠나 영화로운 천국으로 올라가 아버지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아버지만을 소망하는 상태가 평강의 상태이고 안식의 상태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이 땅은 본래대로 아버지께서 사시게 됩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몸을 장갑 삼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시기에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아는 자들에게 닥쳐오는 불안과 염려와 평안의 깨어짐의 원인은 하나입니다. 너무나 익숙한 죄적 체질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시궁창에 뒹구는 죄적 체질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당겨서 이 세상 속에 몰입시키고 처박아 두려고 합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죄적 체질을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적 체질은 너무나도 고귀하고 소중한 천문학적 가치가 있는 마음을 끌어당겨서 끊임없이 이 땅이라는 시궁창에 처박으려고 합니다. 이 힘을 이기고 평안을 유지하며, 우리의 몸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장갑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를 붙잡는 기도를 통해서 개천에서 용 나듯이 오늘도 이 땅에서 마음 난 자들로서 오직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장갑으로써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개천에서 용 나듯 마음이 붙잡고 뒹굴고 있는 개천과 같은 이 땅으로부터 십자가 바라보며 빠져나와 하늘로 승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