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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2

녹취문: (S) 영적인 강골 체질은 어디서 오나?_태승철 (엡 3:14~2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2.19|조회수9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적인 강골 체질은 어디서 오나?>의 줄거리 :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힌 자신을 바라보며 낙심할 수도 있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영적인 강골들이 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강골이란 영적으로 단단하여 굽힘이 없는 체질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강골 체질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영적인 강골은 하나님 영광의 풍성함으로부터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영적인 강골 체질은 어디서 오나?

 

(에베소서 3:14~21)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영적인 강골(强骨)’이란 영적으로 단단해서 굽힘이 없는 체질을 가진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연상시키는 말씀이 16절의 간구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 안에 풍성한 만큼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영적인 강골이 되게 하신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영적 강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내 안에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과 비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클수록 영적 강골이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선물로 주어지기에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적인 강골, 하면 스데반 집사님,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과 같은 인물들이 떠오릅니다. 이들은 육적인 강골이 아닌 영적인 강골이었습니다. 영적인 강골이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환경, 즉 삶의 환경과 조건에 어떤 문제가 벌어지든지 하늘과의 연결이 견고해서 천국의 평강을 잃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때를 떠올려보면 돌에 맞아 죽는 극한의 고통 가운데서도 평강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하늘과의 연결이 견고한 영적인 강골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영적인 약골도 있습니다.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서 얇은 유리잔을 박살내는 것처럼 조그만 일만 터져도 마음의 평강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의 평강이 사라지면 매사에 짜증이 나고 불만과 원망이 생깁니다. 불안과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

한편 영적으로 강골도 아니고 약골도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아예 영적으로 죽어버린 경우입니다. 하늘과의 연결 자체가 없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영이 완전히 죽어서 영적인 약골조차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강골과 약골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고 본문의 1절과 14절을 이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1절과 14절은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2~13절은 삽입된 내용으로 1절의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는 내용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1절을 보면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거니와’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문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빼고 바로 14~15절로 연결시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15절의 표현은 성경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표현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있게 하신 창조주로서 삼라만상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다만 여기서 사도 바울이 이름을 주셨다는 표현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이 각 사람을 의식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안에서 의식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내용이 16절에서 이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위하여 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이란 나 개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의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식 속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누군가로 묻혀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의식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 개인이 하나님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사의 말단사원이 탁월한 성과를 낸 것을 계기로 회장님을 독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회장님의 마음에서 이 말단사원의 존재는 어둠 속에 묻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달의 최고의 사원으로 뽑혀 회장님을 독대하게 되었고 회장님으로부터 ‘내가 자네 이름을 기억하겠네. 앞으로도 회사를 위해 열심히 뛰어주게나.’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회장님 안에서 깜깜하게 묻혀있던 말단사원의 이름을 의식되게 된 것입니다. 회장님의 의식 안에서 말단사원에게 조명이 비치게 된 것이니 영광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의 영광이란 바로 이러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각각의 존재로 의식하고 계십니다. 그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회장님이 이름을 기억해주기만 해도 말단사원은 영광으로 느낍니다. 대통령이 나의 이름을 기억해준다면 마찬가지로 대단한 영광으로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우리 속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계시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에베소 교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깨끗하고 순전한 사람이다.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사도 바울을 고통 속에 갇혀있게 하시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감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깜빡거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3장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기억하고 계시고 의식하고 계십니다. 회장님에게 의식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는 없는 큰 영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기억하시는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고 계시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회장님 앞에 서고 대통령 앞에 서는 영광스러운 상황에서 이들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어떻게 크게 느낄 수 있을까요? 반대로 사도 바울처럼 감옥에 갇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크게 느낄 수 있을까요? 상황이 어떠하든지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영적인 약골의 상황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약골의 상황을 벗어나 강골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영적인 강골이란 물리적, 육체적으로 주어져 있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내가 상대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든지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감이 사그라지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16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영광의 풍성함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서 영적인 강건함도 결정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조그만 일만 생겨도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불안하고 불만스럽고 짜증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의 양이 나의 마음과 의식 안에서 너무나 작은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의 정도를 1부터 100까지 단계를 매겨봅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10도 안 되는 상태라면 영적으로 무척 약골인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물리적, 육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들이 마음에서 영광의 풍성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은 10인데 세상 것들의 영광의 풍성함은 90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불평, 불만, 원망, 짜증, 불안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제가 바닷가에서 산책하다 보면 가끔 배우들이 촬영을 하는 장면을 봅니다. 멀리서 배우들을 보고 있어도 그 배우의 존재감이 분명히 느껴집니다. 다만 그 배우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보는 재미는 있어도 나의 영광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연예인 교회를 섬기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배우나 가수들이 교인이었습니다. 가까이 보고, 영적으로 상담도 하고, 교회 업무를 위해 함께 의논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워진 연예인들과 식사를 하게 됩니다. 연예인이 나를 알고 있기에 영광의 풍성함이 좀 커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당시에 누구나 알고 있던 스타 연예인의 집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식사를 함으로써 그 연예인에 대한 영광의 풍성함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연예인이 나를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하나님은 내 안에서 어느 정도로 영광을 받고 계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누구를 앞에 두더라도 하나님은 내 안에서 계속 기억되고 의식의 조명을 받는 영광의 자리에 계셔야 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기에 마음의 평강은 깨어집니다. 항상 기뻐할 수 없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연결이 끊어지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계셔야만 항상 기쁠 수 있고, 쉬지 않고 연결이 이루어지며, 이 땅에서 물리적, 육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쪼그라들고 말았다면 이러한 일은 생길 수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을 보면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물리적, 육체적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돌에 맞아 죽는 것보다 더한 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작은 돌을 멀리서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손에 큰 돌을 가지고 와서 스데반 집사님을 내리찍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 56절을 보면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찬란한 빛을 발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을 압도하고 있었기에 평강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우리는 실제로 큰일을 당한 것도 아니고 어떤 생각에 사로잡혔을 뿐인데 그것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묻혀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약골인 상태에서는 반드시 원망과 불안과 불만과 짜증과 우울함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생겨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17절을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셔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언급할 때에는 항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그리스도를 한순간도 잊지 않아야 함을 가리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표현하였고,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늘 의식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늘 의식하고 있으면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는 일이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강골이 되어 하늘의 자녀로서의 위치를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 자녀의 위치는 곧 보좌 우편에 있는 예수님의 자리이고, 오직 하나님이 뿜어내시는 영광의 빛만을 보는 자리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것들이 마음에 의식되어서 이 세상의 빛이 보인다면 이미 하늘 자녀의 위치를 벗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내 의식이라는 그릇 안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담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고 유지해 나갈 때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은 날마다 커지게 됩니다. 이것이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는 표현에 담긴 뜻입니다.

 

우리의 의식의 그릇 안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24시간 담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합니다. 18절을 보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넘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랑의 내용은 십자가 예수님을 의식에 담기 전후의 차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담기 전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는 마태복음 23장 27절의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의식에 담기 전에는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3장 13절에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열린 무덤은 썩은 냄새와 더러운 기운이 나오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이라는 그릇에 담지 않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속에 썩은 시체와 온갖 더러운 것이 들어있는 상태입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어서 입만 열면 더럽고 부정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삽니다.

이렇듯 의식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담지 않으면 내 속에는 썩은 시체와 온갖 더러운 것들이 들어있을 수밖에 없는 열린 무덤입니다. 배우자를 마주하고, 자식을 마주하고, 이웃을 마주하고, 일을 대할 때에도 열린 무덤과 같은 목구멍으로부터 악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기운의 말들만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 안에 담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속에는 썩은 시체가 들어있는 상태를 익숙하고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렇기에 의식에 십자가를 24시간 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알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알고 십자가를 알면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면 십자가를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잡지 않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내게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24시간 십자가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가 없으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아예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모르기에 십자가를 붙잡지 않습니다. 한가하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이 설교 저 설교를 들어보고, 이 책 저 책을 뒤져보면서 좋은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사람은 십자가를 의식의 그릇 안에 담는 일 외에는 해야 될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24시간 십자가를 담으면 그 더러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내 안에 가득 차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만을 보게 됩니다. 존재감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있음만이 보이고, 욕구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좋음만이 보여서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내 안에서 풍성해질 때 감옥에 갇히든 말든, 장사가 잘되든 안 되든, 몸이 아프든 말든, 하늘과 연결됨으로써 주어지는 평강이 깨어지지 않는 영적인 강골들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간구의 내용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강골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해지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24시간 담고 다니는 그릇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간구가 여러분을 위한 기도이고 여러분에게서 성취되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질그릇에 보배를 담듯이 우리의 의식의 그릇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담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해지는 영적인 강골들로 이 세상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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