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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2

녹취문: “이해의 영”이 바뀌어야 새사람 된다_태승철 (에베소서 4:13~2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2.24|조회수8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해의 영”이 바뀌어야 새사람 된다>의 줄거리 :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이해의 영"이 바뀌어야 합니다. 말씀에 따르자면 사람의 이해력은 철저히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면 이런 "이해의 영"을 나에게서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욕심'과 관련되어 답이 있습니다. 욕심이 아니라 참 소원이 내 안에서 발생하면 이해의 영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해의 영”이 바뀌어야 새사람 된다

 

(에베소서 4:13~24)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려면 이해의 영이 바뀌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본문은 두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문단은 13~16절까지이고, 둘째 문단은 17~21절까지입니다. 이 두 문단의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공통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들이 대비를 이루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먼저 ‘온전한 사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 새사람’이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는 표현이 다소 난해합니다만 실은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일정한 양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로 채워짐이 충만했을 때 그 양에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표현으로 ‘어린아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이방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잘 속고 간사한 유혹에 잘 넘어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옛 세상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났음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옛 세상에서부터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는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사지를 움직이지 않아도 배꼽의 탯줄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 태어난 후에는 입을 움직여 젖을 빨아야만 하고 움직이는 법을 처음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이처럼 아기는 세상에 대해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아무것도 못하던 아기가 장성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지를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적응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고 말한 이유는 예수님을 믿어서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났음에도 아직 예수님을 믿기 전에 행하던 구습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영양분만 공급받으려 한다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옛 세상에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새로운 세상에 태어났다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 세상에 살 때처럼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옛 세상과 새로운 세상이라는 두 세상을 전제로 하여 비교를 해나갑니다. 새로운 세상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다만 교회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성립과 유지는 교회를 어떻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교인 각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교인 각자가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서 적응하고 성장하여 새사람이 되어야 교회는 서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교회 그 자체가 아닌 교인 각자의 성장에 집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전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교회란 지구상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3절을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표현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직 몸이 죽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 전부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특징은 땅에 살면서도 마음은 하늘을 향하여 흐름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이 끊임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와 교인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땅에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는 마음의 흐름이야말로 이러한 에베소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핵심입니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어떤 신학 박사라 할지라도 에베소서 말씀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 안에서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는 동안에만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통하여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의 흐름이 소망함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채워지기 위한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무엇인가를 향하여 흐른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가지고 싶어 한다는 뜻이고, 채움거리로 쥐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돈을 소망한다면 마음이 돈을 향해 흐르는 상태입니다. 돈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함이 진행 중인 것입니다. 이처럼 소망함이란 마음의 흐름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본문을 이해함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을 구분하는 핵심은 소망이 바뀌었느냐는 것입니다. 소망이 사람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소망을 통해 새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소망은 곧 마음의 흐름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소망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옛사람과 새사람이 결정됩니다.

 

22~24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으로부터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새사람을 입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면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이 된다고 이해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정확한 해석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심령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심령이라 번역된 원문을 보면 마음의 영(πνεύματι τοῦ νοὸς)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가리키는 헬라어 노오스(νοὸς)는 이해, 납득, 식별, 의견과 같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너희의 심령이란 이해의 영(The spirit of your understanding)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해의 영이 새롭게 되어야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것을 앞에 있는 구절과 연관시켜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욕심은 무엇인가를 소원하고 바라고 소망함입니다. 유혹을 받았다는 것은 욕심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라는 상태가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의 상태입니다.

앞서 소망은 곧 마음의 흐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마음의 흐름이 잘못된 상태를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것이라 말합니다. 유혹은 마귀의 전공과목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으로 흐르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원하는 이유는 돈이 정말로 좋은 대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돈을 원하도록 유혹한 마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마음의 흐름인 소망은 사람의 이해력을 결정짓습니다. 똑같은 문제를 놓고 어떤 사람은 A라고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은 B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이들의 소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돈을 소망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의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영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흐름이 이 세상을 향해 흐르는 상태가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라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바라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우리의 이해력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뜻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새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인격적 새사람의 핵심은 이해에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바뀌지 않으면 이해가 달라질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4절을 보면 소망을 바꾸는 방법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기준과 생각을 따를 때 새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생각을 붙잡을 수 있는 이해력을 가지려면 마음의 흐름은 땅이 아닌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소망의 내용이 바뀌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흐름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은 우리의 싱크탱크(Think Tank)이십니다. 축구팀이 운영되는 구조를 보면 감독 곁에서 전술을 짜기 위한 지혜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싱크탱크입니다. 생각을 담고 있는 큰 웅덩이와 같은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흐름이 향하는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계획을 남김없이 다 흡수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께 마음의 흐름을 향해야 함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새사람이 되어야 교회는 든든해질 수 있습니다. 교인이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따라 말하고 사랑 안에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기 전과 똑같이 구습을 따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속임수를 따르게 되고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 세상 풍조에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속임수를 이야기하게 되고 간사한 유혹에 빠진 상태를 노출시킵니다.

한편 마음의 흐름이 하늘을 향하는 경우에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연결되어 흐름을 유지할 때는 예수님이라는 싱크탱크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생각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따르는 말과 행동을 하는 새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새사람 되기는 무엇을 소망하느냐는 것입니다. 즉 무엇에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이해력이 달라져야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력은 영이 지배합니다. 내가 마음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나와 다른 것도 그 사람의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소망하는 것에 따라서 이해도 달라집니다. 땅에 있는 것을 소망하면 그 사람의 이해력을 마귀가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망하면 우리의 이해력을 성령이 지배하시게 됩니다. 이런 말씀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소망하느냐, 무엇을 향해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느냐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에 따라서 악령이 내 생각을 지배할 수도 있고 성령이 내 생각을 지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지배하심을 통해서 생각과 이해력이 바뀌어야만 우리는 새사람이 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고 간사한 유혹에 빠지고 세상 풍조에 밀려서 흔들리고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요동치는 중에 나 자신도 끊임없이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상대하게 되는 사람과 사건과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은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없는 사람이나 사건이나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전부 싱크탱크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흐름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을 향하게 되면 이 땅에서의 삶은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는 하나님의 생각만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으로 충만한 분량에 이를 때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한 분량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에게 마음의 흐름을 지속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 마음의 흐름이 지속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도달한다는 것은 나로부터 나오는 말 한마디, 생각 하나까지도 아버지의 뜻과 생각에서 벗어남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고 새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아서 교회라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흐름이 하늘로 향함을 지속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사람의 속임수에 빠지고 세상의 간사한 유혹에 넘어가고 세상 풍조에 흔들리는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마음의 흐름이 하늘로 향하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썩어가는 구습을 따르는 이방인의 특징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땅을 향한 흐름을 유지할 때 바라는 것은 세상에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허망합니다. 마음이 세상 것을 향하는 한 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건강을 소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이 유지되어도 마음의 채움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흘러가면 올바른 이해력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하지 않는 상태에서 세상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마귀에게 속은 거짓말입니다. 돈이 안 벌리는 상황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마귀에게 속아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해력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해력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삶의 문제들을 상대하고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문제라도 마음의 흐름이 하늘을 향할 때와 땅을 향할 때의 반응은 다릅니다. 잘못된 이해와 소망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마음에는 채워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18절을 보면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흐름이 이 세상을 향하게 되면 총명이 어두워집니다. 스스로 바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길지라도 사실은 어둠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분명하고 틀림없다고 확신하면서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해도, 실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굳어졌다는 것은 마음의 흐름이 세상을 향해 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지하고 굳어졌기에 하나님으로 인한 영원한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단절되고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흐름이 땅을 향하느냐 하늘을 향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해력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에 대해 올바른 이해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이해력은 무엇을 소망하느냐에 따라 바뀝니다. 땅을 향하여 소망을 갖고,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마귀가 이해력을 지배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을 소망하고, 예수님께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성령께서 이해력을 지배하십니다.

이해력이 바뀌어 새사람이 되면 13절에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싱크탱크이신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성령께서는 그 뜻과 계획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함을 통해 온전한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의 흐름을 하늘로만 유지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소망하여 성령님이 나의 이해력을 지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정한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하게 하시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이 충만한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려면 이해의 영이 바뀌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본문은 두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문단은 13~16절까지이고, 둘째 문단은 17~21절까지입니다. 이 두 문단의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공통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들이 대비를 이루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먼저 ‘온전한 사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 새사람’이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는 표현이 다소 난해합니다만 실은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일정한 양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로 채워짐이 충만했을 때 그 양에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표현으로 ‘어린아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이방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잘 속고 간사한 유혹에 잘 넘어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옛 세상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났음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옛 세상에서부터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는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사지를 움직이지 않아도 배꼽의 탯줄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 태어난 후에는 입을 움직여 젖을 빨아야만 하고 움직이는 법을 처음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이처럼 아기는 세상에 대해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아무것도 못하던 아기가 장성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지를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적응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고 말한 이유는 예수님을 믿어서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났음에도 아직 예수님을 믿기 전에 행하던 구습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영양분만 공급받으려 한다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옛 세상에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새로운 세상에 태어났다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 세상에 살 때처럼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옛 세상과 새로운 세상이라는 두 세상을 전제로 하여 비교를 해나갑니다. 새로운 세상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다만 교회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성립과 유지는 교회를 어떻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교인 각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교인 각자가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서 적응하고 성장하여 새사람이 되어야 교회는 서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교회 그 자체가 아닌 교인 각자의 성장에 집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전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교회란 지구상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3절을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표현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직 몸이 죽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 전부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특징은 땅에 살면서도 마음은 하늘을 향하여 흐름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이 끊임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와 교인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땅에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는 마음의 흐름이야말로 이러한 에베소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핵심입니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어떤 신학 박사라 할지라도 에베소서 말씀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 안에서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는 동안에만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통하여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의 흐름이 소망함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채워지기 위한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무엇인가를 향하여 흐른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가지고 싶어 한다는 뜻이고, 채움거리로 쥐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돈을 소망한다면 마음이 돈을 향해 흐르는 상태입니다. 돈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함이 진행 중인 것입니다. 이처럼 소망함이란 마음의 흐름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본문을 이해함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을 구분하는 핵심은 소망이 바뀌었느냐는 것입니다. 소망이 사람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소망을 통해 새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소망은 곧 마음의 흐름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소망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옛사람과 새사람이 결정됩니다.

 

22~24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으로부터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새사람을 입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면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이 된다고 이해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정확한 해석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심령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심령이라 번역된 원문을 보면 마음의 영(πνεύματι τοῦ νοὸς)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가리키는 헬라어 노오스(νοὸς)는 이해, 납득, 식별, 의견과 같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너희의 심령이란 이해의 영(The spirit of your understanding)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해의 영이 새롭게 되어야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것을 앞에 있는 구절과 연관시켜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욕심은 무엇인가를 소원하고 바라고 소망함입니다. 유혹을 받았다는 것은 욕심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라는 상태가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의 상태입니다.

앞서 소망은 곧 마음의 흐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마음의 흐름이 잘못된 상태를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것이라 말합니다. 유혹은 마귀의 전공과목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으로 흐르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원하는 이유는 돈이 정말로 좋은 대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돈을 원하도록 유혹한 마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마음의 흐름인 소망은 사람의 이해력을 결정짓습니다. 똑같은 문제를 놓고 어떤 사람은 A라고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은 B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이들의 소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돈을 소망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의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영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흐름이 이 세상을 향해 흐르는 상태가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라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바라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우리의 이해력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뜻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새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인격적 새사람의 핵심은 이해에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바뀌지 않으면 이해가 달라질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4절을 보면 소망을 바꾸는 방법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기준과 생각을 따를 때 새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생각을 붙잡을 수 있는 이해력을 가지려면 마음의 흐름은 땅이 아닌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소망의 내용이 바뀌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흐름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은 우리의 싱크탱크(Think Tank)이십니다. 축구팀이 운영되는 구조를 보면 감독 곁에서 전술을 짜기 위한 지혜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싱크탱크입니다. 생각을 담고 있는 큰 웅덩이와 같은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흐름이 향하는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계획을 남김없이 다 흡수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께 마음의 흐름을 향해야 함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새사람이 되어야 교회는 든든해질 수 있습니다. 교인이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따라 말하고 사랑 안에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기 전과 똑같이 구습을 따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속임수를 따르게 되고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 세상 풍조에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속임수를 이야기하게 되고 간사한 유혹에 빠진 상태를 노출시킵니다.

한편 마음의 흐름이 하늘을 향하는 경우에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연결되어 흐름을 유지할 때는 예수님이라는 싱크탱크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생각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따르는 말과 행동을 하는 새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새사람 되기는 무엇을 소망하느냐는 것입니다. 즉 무엇에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이해력이 달라져야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력은 영이 지배합니다. 내가 마음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나와 다른 것도 그 사람의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소망하는 것에 따라서 이해도 달라집니다. 땅에 있는 것을 소망하면 그 사람의 이해력을 마귀가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망하면 우리의 이해력을 성령이 지배하시게 됩니다. 이런 말씀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소망하느냐, 무엇을 향해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느냐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에 따라서 악령이 내 생각을 지배할 수도 있고 성령이 내 생각을 지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지배하심을 통해서 생각과 이해력이 바뀌어야만 우리는 새사람이 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고 간사한 유혹에 빠지고 세상 풍조에 밀려서 흔들리고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요동치는 중에 나 자신도 끊임없이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상대하게 되는 사람과 사건과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은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없는 사람이나 사건이나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전부 싱크탱크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흐름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을 향하게 되면 이 땅에서의 삶은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는 하나님의 생각만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으로 충만한 분량에 이를 때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한 분량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에게 마음의 흐름을 지속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 마음의 흐름이 지속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도달한다는 것은 나로부터 나오는 말 한마디, 생각 하나까지도 아버지의 뜻과 생각에서 벗어남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고 새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아서 교회라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흐름이 하늘로 향함을 지속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사람의 속임수에 빠지고 세상의 간사한 유혹에 넘어가고 세상 풍조에 흔들리는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마음의 흐름이 하늘로 향하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썩어가는 구습을 따르는 이방인의 특징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땅을 향한 흐름을 유지할 때 바라는 것은 세상에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허망합니다. 마음이 세상 것을 향하는 한 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건강을 소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이 유지되어도 마음의 채움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흘러가면 올바른 이해력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하지 않는 상태에서 세상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마귀에게 속은 거짓말입니다. 돈이 안 벌리는 상황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마귀에게 속아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해력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해력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삶의 문제들을 상대하고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문제라도 마음의 흐름이 하늘을 향할 때와 땅을 향할 때의 반응은 다릅니다. 잘못된 이해와 소망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마음에는 채워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18절을 보면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흐름이 이 세상을 향하게 되면 총명이 어두워집니다. 스스로 바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길지라도 사실은 어둠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분명하고 틀림없다고 확신하면서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해도, 실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굳어졌다는 것은 마음의 흐름이 세상을 향해 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지하고 굳어졌기에 하나님으로 인한 영원한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단절되고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흐름이 땅을 향하느냐 하늘을 향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해력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에 대해 올바른 이해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이해력은 무엇을 소망하느냐에 따라 바뀝니다. 땅을 향하여 소망을 갖고,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마귀가 이해력을 지배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을 소망하고, 예수님께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성령께서 이해력을 지배하십니다.

이해력이 바뀌어 새사람이 되면 13절에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싱크탱크이신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성령께서는 그 뜻과 계획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함을 통해 온전한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의 흐름을 하늘로만 유지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소망하여 성령님이 나의 이해력을 지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정한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하게 하시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이 충만한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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