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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2

녹취문: 형편 수용의 자족, 형편 단절의 자족_태승철 (빌립보서 4:11~1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2.06|조회수6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형편 수용의 자족, 형편 단절의 자족>의 줄거리 :

헌금이 이익을 위한 정당한 투자일 수 있는 경우가 있을까요? 물론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쨌든지 헌금은 본질적으로 미래의 이익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예정하심 안에서 헌금을 미래의 이익을 위한 투자로 하도록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의 사명이 예정하심 안에서 택함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형편 수용의 자족, 형편 단절의 자족

 

(빌립보서 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족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형편을 수용해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과 형편과 단절한 채로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자족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자족(自足)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자족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의 상식 속에 있는 자족의 의미를 분리해서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자족이란 내 분수를 넘지 않고 지금 주어진 형편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흔히 물질에 대한 욕구, 의식주 개선에 대한 바람을 죽임으로써 지금의 상황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입니다.

‘부족해도 넉넉하다고 생각하면 항상 여유가 있고, 넉넉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항상 부족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형편이 일반적인 기준에서 부족하다고 해도 넉넉하다고 생각하며 나를 타이르면 결핍감에 시달리지 않고 이겨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자족의 의미입니다.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욕구를 제어함이 자족의 핵심입니다. 제목에서 말씀드린 ‘형편 수용의 자족’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어떤 형편이 주어졌을 때 부족을 느끼면 개선하려고 합니다. 형편 개선의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편 수용의 자족’으로서의 마음가짐은 내 마음을 타일러가며 주어진 환경과 형편을 수용하려는 시도입니다. 예를 들어 ‘나보다 더 못한 사람도 많은데 이 정도면 괜찮다. 당장 먹을 쌀이 있고, 쓰러져 가는 초가라도 누울 곳이 있으면 됐지. 자식들이 공부는 못해도 착하고 건강하니 됐다.’라고 생각한다면 형편 수용의 자족입니다. 지금 형편에 나의 분수를 맞추어가는 자족의 모습이자, 스스로의 마음을 타이르는 마인드 컨트롤의 자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자족은 근본적인 시작점이 다릅니다. 형편을 개선하려는 자족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형편을 수용하려는 방식의 자족도 아닙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족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타르케스(αὐτάρκης)는 신약성경을 통틀어 여기서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표현을 차용한 이유는 이 표현이 성경이 말하는 자족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아도 성경의 자족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스토아 철학자들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마음 상태를 아파테이아(απάθεια)라고 합니다. 아파테이아는 ‘아니다, 없다’라는 뜻의 부정접두사 아(ἀ)에 ‘겪음, 당함’을 뜻하는 파토스(πάθος)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이 파토스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드리자면 마음이 몸을 통해 만나는 형편과 환경을 겪을 때 나타나는 반응을 가리킵니다. 겪는다는 것은 마음이 형편이나 환경과 접하고 반응함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마음이 형편에 당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다시 11절을 보면 ‘궁핍’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궁핍이라는 환경에 처하게 되면 마음은 궁핍을 벗어나기 위한 욕구와 바람이 생기게 됩니다. 쉽게 말해 ‘돈벼락을 한 번 맞아봤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것을 마음이 주어진 환경에 당하여 반응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마음 상태는 바로 이 마음의 겪음과 당함에서 나오는 욕구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몸으로 만나는 형편이나 환경적 조건을 마음에서 단절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마음을 환경과 단절시키고 평정을 유지하면서 이성을 따라서만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을 환경에 밀착시키고 살아갑니다. 무엇인가를 겪고 당할 때마다 생각하고 감정적인 반응들을 보이며 그 과정에서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파테이아는 몸으로 만나는 형편과 환경에서 마음을 분리시키고 객관적인 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족하는 이상적 마음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아파테이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자족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이 아우타르케스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궁핍한 형편에 대해 마음이 단절되어서 당하지 않는다는 점이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아파테이아의 상황과 일치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11절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내가 헌금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은 궁핍이 마음에 스며들거나, 궁핍함에 마음이 당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떠한 형편에든지’라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면해보면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있다. 그러면서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있다’라는 표현이 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있음을 가리키는 헬라어 동사 에이미(εἰμί)는 영어로 (am)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있다는 것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그 형편을 개선하려 하지도 않고, 마음을 타일러서 그 형편을 수용하고자 하지도 않는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좋아함이나 싫어함의 판단 없이 그냥 주어진 형편에 처해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편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은 마음 채움의 비결을 따로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자족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아파테이아는 마음의 평정상태에 대해서는 몸이 만나는 형편에 대해 마음이 당하지 않고, 단절이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근본적인 내용은 달랐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했습니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현상과 단절되는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질문거리로 남아있습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이성적으로 그러한 상황을 그림 그리듯 설명해놓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몸이 만나는 형편과 마음이 서로 분리됨을 설명하기에는 스토아 철학자들의 설명이 유용하다고 여겨졌기에 그 표현을 차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이성으로 형편과 마음을 단절시키려고 시도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실제로 ‘형편 단절의 자족’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의 집중력을 가지고 십자가 푯대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십자가에서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을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사수하는 군인처럼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내 몸에 어떤 형편이 주어지든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강릉에서 서울로 갈 때 KTX를 이용합니다. 제 몸이 KTX 안에 머무는 동안 바깥 환경은 계속 바뀝니다. 어떨 때는 깜깜한 터널을 지나기도 하고, 넓은 들판을 지나기도 하며, 산을 지나기도 하고, 도심을 지나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 몸에 주어지는 형편은 계속해서 바뀝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이라는 KTX 안에 타고 있다는 환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깜깜한 터널을 싫어한다고 해서 불만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내가 있는 곳은 KTX 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도심의 풍경이 좋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이유는 내가 있는 곳은 KTX 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라는 KTX 안에 타고 있으면 몸이 처한 환경은 차창 밖 풍경처럼 계속해서 흘러 지나가게 됩니다. 나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환경과 무관하게 KTX 안에서 편하게 만족하고 있으면 됩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말에는 ‘주님 안에 있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파테이아를 이상적인 상태로 추구하는 스토아 철학자들은 전혀 알 수 없는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족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자족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 안에 있음을 통해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 들어가는 방법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 머물며 세상과는 단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주님 안에 들어갈 때 마음이 환경과 분리되고 단절된다는 의미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의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주 안에 들어가면 가만히 있어도 자족이 이루어지게 될까요? 여기서 우리는 오해를 풀고 넘어가야 합니다. 앞서 우리는 세상의 자족과 성경의 자족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의 자족이 주어진 환경을 수용하면서 마음을 타이르는 자족이라면, 성경의 자족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상적으로 말하는 현상과의 단절을 일상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자족이란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주님 안에 들어가 있음으로써 몸이 처한 환경으로부터 단절이 되었다면 이제부터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자족하기 위해 애쓰고 수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자족은 내 마음에 완전히 다른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있는 동안에는 몸이 만나는 상황이 마음의 환경이 됩니다. 몸이 만나는 세상적인 상황을 마음이 겪고, 당하고, 스며들게 됩니다. 그런데 주 안에 있으면 환경으로부터 단절이 이루어지고 마음이 마주할 다른 환경이 필요해집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자족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12절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주님 안에 들어가 있는 자에게 허락되는 사실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가져도 되고 관계해도 되는 사실은 하나님의 있음이고 좋음이며,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천국이 현실이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부지런히 내게 가르치고 일깨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형편을 수용할 때 ‘이 정도면 괜찮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중간은 간다.’라는 식으로 형편 개선의 의지와 욕구를 죽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도는 좋게 말하자면 나 자신을 타이름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다만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고, 잊히게 되고, 외면하게 되는 사실입니다.

별은 깜깜한 밤하늘에서만 밝히 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 안에 들어가서 세상에 대해 죽고, 의식 속에서 세상이 깜깜해지면 가려져 있던 사실들이 별빛처럼 부각되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있음이 보이고, 가려져 계시던 하나님의 영광이 좋음으로 보입니다. 내 마음이 주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사실로 느끼게 되고 생각을 통하여 붙잡을 수 있습니다.

 

내 몸이 만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어지는 세상 형편들은 아버지의 주권이 붙잡고 계십니다. 주님 안에서 나 스스로에게 그러한 사실을 일깨워 줌으로써 하나님과 접촉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마음이 동쪽으로 가면 하나님의 있음에 닿고, 서쪽으로 가면 하나님의 좋음에 닿고, 남쪽으로 가면 하나님의 주권에 닿고, 북쪽으로 가면 하나님이 계신 보좌와 천국에 닿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 주어져야 하고 벗어나면 안 되는 새로운 환경입니다.

주님 안에 들어갔던 마음이라도 십자가 바라봄을 놓치면 주님 바깥으로 튀어 나가 세상이라는 환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은 다시 몸이 당하는 형편을 당하고 겪는 파토스가 생겨납니다. 우리에게 파토스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파토스여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주님 안에서 생각함으로써 내 마음이 하나님을 겪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내 마음은 하나님께 닿게 됩니다.

지금 이 세상의 형편에 대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하자마자 마음이 세상에 닿게 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것을 마음이 당하고, 겪는 파토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들어가면 세상은 단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사실임을 깨닫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고 배제한 채 살아가고 있기에 이것을 마음이 처할 환경으로 삼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 하나님의 주권, 천국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마주할 때 마음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세상에서 느끼는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몸에 주어진 형편을 당합니다. 궁핍을 겪고, 불통을 겪고, 건강의 안 좋음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환경으로 겪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파토스, 영적인 정열, 영적인 힘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족입니다.

 

 

12절 하반부를 보면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궁핍한 형편에서 자족을 누림에 대해서는 배울 바가 있다고 느껴지지만, 과연 풍부한 형편에서 자족한다는 것에 어떤 비결이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부에 처할 때도 자족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풍부한 형편에 대해 바르게 처하는 방법을 모른 채, 풍부한 형편에 당하고 겪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파토스에 넘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풍부한 형편에서도 풍부가 내 마음을 채울 수 없음을 느끼며 공허함을 느낍니다. 마음이 공허하기에 짜증과 신경질이 나고 교만까지 겹치면 약자에 대한 갑질로 나타나기 쉽습니다. 사람들을 홀대하고 무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풍부에 처할 줄 모를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궁핍에 처함보다 풍부에 처함이 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궁핍에 처할 때 자족함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만, 풍부에 처할 때 자족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기껏 배워봐야 ‘이 정도면 됐다.’라는 식의 세상적인 자족입니다. 이것은 처함이 아닌 취함입니다. 술에 취하듯 형편에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르게 처할 줄을 알아야만 합니다.

궁핍에 처함과 궁핍에 취함은 다릅니다. 풍부에 처함과 풍부에 취함도 다릅니다. 궁핍에 취하면 술주정을 하는 것처럼 불평불만이 나옵니다. 풍부에 취하면 술주정을 하는 것처럼 나보다 부족한 타인에 대한 무시가 나옵니다. 궁핍도 술이고 풍부도 술입니다. 이 술에 취하지 않고 처하기 위해서는 있음과 자족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궁핍한 형편에 처할 때도 ‘있음’으로 자족하고, 풍부한 형편에 처할 때도 ‘있음’으로 자족할 수 있습니다.

다시 12절을 보면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궁핍한 형편이든 풍부한 형편이든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있음이 일어나야 처함이 가능합니다. 물론 비어있는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다만 있음이 우선되어야만 하나님으로 채워짐도 가능합니다. 어떤 형편이 주어질 때 그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있음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몸에 아픔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그냥 있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내 마음은 주님 안으로 들어가서 세상에 대해서는 단절을 일으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는 자리이고,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단절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표현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할례 의식에서 표피를 잘라내듯이 주님의 십자가로 마음에서 세상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주님 안에서 허락되는 특권으로서의 영적인 사실들이 환경으로 조성됩니다. 끊임없이 아버지의 좋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좋음이 지금 내 몸으로 만나는 형편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게 됩니다. 내가 느껴야 할 존재감은 배우자도 아니고 자녀도 아니고 사장님도 아니고 ‘아버지의 있음’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환경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몸에 주어지는 형편을 받아들여서 당하고 겪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주님 안에서 주어지는 아버지에 대한 사실들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형편을 단절하고 자족하는 비결은 먼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있음’이란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음을 가리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 지금의 형편을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내버려 둔다고 해서 버려지지 않습니다. 나의 형편은 하나님의 주권이 24시간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으로써의 영적 사실들을 생각함으로 마음의 환경을 조성해갈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세상과 단절을 이루었다면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통해 죽음으로써 그냥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허락된 영적 사실들을 생각함으로써 내 마음의 환경을 조성해주고, 그 영적 사실들로 둘러싸여 있는 상태에서 만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로 어떤 형편에서든지 있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주어진 영적 사실들을 생각함으로 내 마음에 하늘 환경을 조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언제 어디서든지 만족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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