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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2

녹취문: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삶_태승철 (빌립보서 1:12~3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1.14|조회수5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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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삶>의 줄거리 :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삶이 뭘까요? '차라리'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방식은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이 잘되게 애를 쓰느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자고 다짐하기를 생활화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그리고 사도 바울이 언제나 세상 떠남을 최고로 여기셨듯이 그렇게 그분들을 믿고 차라리 세상 떠남을 항상 최선의 길로 믿고 다짐하고 스스로 가르치며 사는 겁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방식의 삶

 

(빌립보서 1:12~30)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구절은 23절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둘 사이에 끼었다고 고백합니다. 둘 사이에 끼었다는 것은 내 몸이 죽는다는 사실과, 내 몸이 살아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사실 사이에 끼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아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언제나 죽음의 위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과 살아서 복음을 전하는 두 가지 사실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를 훨씬 더 좋은 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살아 움직이는 이유는 복음 전파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훨씬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삶을 배워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삶을 위해 이 세상 떠남을 매 순간 연습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현장에서 좋은 일이 벌어지든지 나쁜 일이 벌어지든지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 기억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러한 시도가 세뇌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만, 세뇌는 이데올로기의 주입이나 사실이 아닌 거짓을 머릿속에 고정시키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거듭해서 확인하며 자기 자신에게 설교해야만 되는 복음은 영적인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는 말은 우리가 계속 반복해서 연습해야 됩니다.

만약에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면 살아서 승천한 엘리야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또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면 우리에게 있어서 천국은 죽어서 마지못해 가야만 하는 곳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분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도 바울 혹은 엘리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진리는 세상은 지금 떠나기에 합당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이 죽어서 주와 함께 하늘에 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놓친다면 수렁에 빠지듯이 세상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어 가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아버지 보좌 우편에 오르심을 따라가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 근본적 이유는 세상을 떠날 곳으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은 하늘로 가는 길이자 방법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로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서른세 살에 모든 사명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천국이 좋다는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 좋은 것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주님께서 천국을 선택하신 이유는 천국이 훨씬 더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이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천국을 본 적이 없기에 당장 천국의 좋음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똑같은 처지에서 세상 떠나기를 가장 좋은 일로 여겼습니다. 세상을 훌쩍 떠나서 천국으로 가신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믿음으로 천국이 가장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늘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키며 살았습니다. 그러자 실제로 천국의 좋음을 느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천국의 좋음에 대한 믿음이 확인되고 거듭 각인될수록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천국의 좋음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이 두렵고,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에 십자가의 죽음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승천하셨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천국의 좋음을 믿고 자신을 내던졌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믿는다면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늘 기억하고 새기며 살아갔습니다. 지금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는 것이야말로 최선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 생활화도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삶은 연습해야 됩니다. ‘차라리’라는 말은 대비되는 두 가지 사실 중에서 상대적으로 더 나은 대상을 가리킵니다. ‘버스를 타기 애매하면 차라리 지름길로 걸어가는 게 낫다.’ 혹은 ‘자유를 빼앗길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라는 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나온 말이 아닙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이러한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연습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승천에 담겨있는 마음속 의도와 취지와 바람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사명을 위해서 사셨지만,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가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가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주님의 생각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삶을 산다는 것은 실천적인 문제입니다. 회사에서 승진이 결정되는 시기가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럴 때 ‘승진 못할 것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지금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승진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기뻐하느니, 차라리 지금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승진 같은 문제로 인해 좌우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승진이라는 문제에 마음이 빨려들어 갈수록 십자가 생활화는 요원해집니다. 과제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차라리 지금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겠다.’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회사에서 다른 동료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승진을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다면 차라리 지금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임을 자기 자신에게 반복하여 연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상의 모든 경우에 적용되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거나 안 될까 걱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지금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거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생각이 없으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아버지 보좌 우편에 오르신 주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를 수 없습니다. 말로만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동안에는 세상에 대해 죽을 수 없습니다.

 

 

앞서 빌립보서는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서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천국과 이 세상을 통틀어서 제일 좋은 것을 찾는다면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한한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이 세상을 합친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서 기쁨으로 충만해지고, 그 기쁨을 이 세상에 지불하며 살아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만 나타나는 일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예로 보여줍니다. 세상을 기준으로 일이 안 풀리면 좌로 쏠리고, 일이 잘 풀리면 우로 쏠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때 세상에서 좌우로 치우치며 사느니,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생각을 하며 살자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마음이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야말로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좋은 일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의 연합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상황이 좌로 흐르던 우로 흐르던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것을 훨씬 더 좋은 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반복하여 자기 자신에게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세상에 빨려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범법한 사실이 없었기에 감옥에 갇혀야 할 이유도 없었고,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만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의 기준에서는 억울하고 분노해야 될 상황이 주어졌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혔다고 해서 자신이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치관에서 유익이란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방 세계로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 손해 볼 것이 없다고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지 못할 환경이나 조건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지 못할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주님 품으로 가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임을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앞뒤가 꽉 막힌 상황일지라도 그 사람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절대 막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을 계기로 황제의 친위대와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로마제국 중심부의 사람들과 접촉을 이룰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다른 범법자들과는 다르게 범법행위가 없었음에도 갇힌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사람을 메시아라고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시기를 받아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예로부터 우리가 어떤 연습을 해야 되는지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 자신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아플 때 ‘몸이 건강하기를 바랄 바에는 차라리 지금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습해야 하는 이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일이 잘 풀려도 안 풀려도 마음이 빠져들기 쉽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빠져들려고 할 때마다 예수님이 곧바로 승천하신 모습을 기억하며 자기 자신에게 ‘차라리 지금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겠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엘리야가 살아서 승천하였듯이, 그 일이 지금 나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일임을 기억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막힘은 없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막힌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상황은 바깥에서 보기에는 분명한 막힘의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떠하든 하나님이 이루시지 못할 뜻과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자극을 받는 자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14절을 보면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자신들보다 훨씬 더 평안함을 보게 됩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으로 살고 있는 한 십자가 생활화는 원활할 수밖에 없고, 그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입술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반복해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내 몸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최고라는 믿음이 있어야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속임수가 아닌 실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세상에서 잘 살고 싶은데 마음만 살짝 하늘로 올라가서 기쁨만 따올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것이 최고라는 마음을 먹고 있었기에,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는 십자가 생활화가 원활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평안을 유지하고, 감옥 밖에 있는 자신들보다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본 그리스도인들은 놀라게 됩니다. 황제숭배를 법으로 정해놓은 로마에서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을 담대하고도 강력하게 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을 쏟게 되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으로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5절을 보면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잘못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폄하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것으로부터 이들이 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으로 사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투기와 분쟁을 하는 자들조차도 문젯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이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투기하는 자들 중에는 돌로 쳐서 죽이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감옥에 갇혀있었기에 이들의 투기심과 분쟁은 사도 바울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칠 수 없었고 하나님의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어 갈 수 있었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으로 살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 중에 안 될 일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 안 될까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한 하나님의 계획은 머리털만큼의 착오도 없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게 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해 내가 원하는 뜻과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 마음은 세상을 좋아하게 되고 세상에 붙어버리게 됩니다.

 

 

19절을 보면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이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새삼스럽게 구원을 언급하는 이유는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이 오히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일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감옥은 사도 바울의 마음이 세상에 빠져들지 않고 하늘로 가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마음이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환경에 빠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로마 감옥이라는 다소 불편한 상황은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 아버지께로 가는 일에 박차를 가하게 해주고, 더 단단하고 확고하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일을 조금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나, 복음 사역의 차원에서나,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입장에서나 하나도 손해 볼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으로 사는 사람은 천하무적입니다.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 반복해서 가르치고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곧장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이 가장 좋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무슨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안고 사느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최고로 좋다.’라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지금 내가 죽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런데 살려두고 계신다면 오직 아버지의 뜻만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지 못할 바에는 제가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것이 최고로 좋은 일임을 믿습니다. 다만 떠나지 않고 살려두고 계신다면 아버지의 뜻이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마음은 차라리 세상을 떠남이 가장 좋음을 믿기에 주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연습입니다. 이러한 연습을 통해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가는 십자가 생활화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좋은 일이고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라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반복하여 가르쳐서 믿음을 확고히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이 확고해질수록 어떤 상황에서든지 전천후 천하무적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차라리 세상을 떠나기’ 방식의 삶에 달인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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