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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알몸은 몰라도 알마음은 필수다>의 줄거리 :
빌립보서는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책입니다. 하늘 기쁨을 받고 누리기를 유지하며 강화하기를 위해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늘 기쁨과 세상 기쁨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서로 근원적으로 다른 기쁨을 구분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겸손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십니다. 그러나 이 겸손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인격적인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이 참 중요합니다.
알몸은 몰라도 알마음은 필수다
(빌립보서 2:1~11)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전에서 ‘알몸’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두 가지 풀이가 나옵니다. 첫 번째 뜻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이고, 두 번째 뜻은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재산이란 꼭 물질적인 재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적재산을 포함한 추상적인 모든 재산을 포함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알몸이라는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 3장 10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에 하나님의 낯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어서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유일하고도 최고로 좋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스스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되었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와 유사한 묘사가 욥기 1장 21절에도 나옵니다. 모든 재산과 열 명의 자녀까지 다 잃은 욥이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고 하였습니다. 알몸이 두 번 언급됩니다. 첫 번째 알몸은 알몸으로 태어나는 것을 가리키고, 두 번째 알몸은 세상적인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알몸이 그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을 때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가지고 갈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재산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재산을 광범위한 의미에서 생각해보자면 세상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모든 가치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필수적으로 알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알마음이란 세상 가치가 마음에 스며들 수 없는 상태입니다. 세상 가치가 스며들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새로 샀더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기분이 좋은 이유는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재산으로 삼았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잃어버릴 때 아깝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갖고 싶어 합니다. 세상 가치가 스며들어온 상태이고 알마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세상 가치와 내 마음이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상태가 알마음입니다. 세상 가치를 가졌든 갖지 못했든 좋고 나쁨의 판단이 생기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가치와 우리의 마음이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가 된다면 무엇인가를 가진 상태에서 알마음은 될 수 있고, 갖지 못한 상태에서 알마음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든 아니든 반드시 알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학자들도 자주 오해하는 내용입니다. 2절을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의미의 말이 네 번 반복되며 강조됩니다. 또 이어지는 3절을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였습니다. 낮춤, 겸손, 다툼, 허영 같은 개념이 언급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표현으로부터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대한 개념도 간접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표현으로부터 빌립보 교회에서 분열 현상이 일어났으리라 추측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분열을 우려하여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필요한 말을 의도적으로 반복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타당치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열 현상을 경계하여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표현은 앞서 살펴보았던 하늘 기쁨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다툼과 허영은 하늘 기쁨이 주어지고 유지될 수 없게 하는 가장 치명적이고 대표적인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1장의 내용을 통해 빌립보 교인들이 하늘 기쁨을 누리는 상태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절을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너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하나님과 성령을 만나 권면을 받고, 사랑으로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자비를 입은 사람이라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2~3절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면 한마음 한뜻을 가져야 되는 공통된 마음가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않는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과 사랑의 위로와 성령을 통한 교제와 긍휼과 자비를 입은 증거로 하늘 기쁨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극심한 가난 중에서도 어떤 교회도 하지 못한 구제나 후원을 위한 적극적인 참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늘 기쁨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방법으로 겸손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겸손과 연관하여 그리스도의 낮추심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겸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오해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겸손으로 번역된 헬라어 타페이노프로쉬네(ταπεινοφροσύνη)는 노예가 주인 앞에서 굽신거리며 복종하는 모습을 묘사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겸손이란 당시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인격적 덕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의 굽신거림이기에 가능하면 피해야 될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본문의 내용이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될 기본적으로 공통적인 마음가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예의 굽신거림같이 낮은 자의 자아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겸손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낮은 자의 자아의식이 없다면 하늘 기쁨이 유지되고 강화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겸손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적 덕목으로써의 겸손을 생각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겸손은 실제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나는 낮은 사람이다.’라는 자아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호텔에 벨보이가 있습니다. 벨보이는 방문한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짐을 들어주고 안내합니다. 그런데 이 벨보이가 굽신거리며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서 인격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거나 겸손해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벨보이의 친절함은 직업상 역할과 기능적으로 요구되는 태도일 뿐입니다. 그런데 호텔 사장님이 벨보이와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라면 어떨까요? 모든 호텔 사장님이 벨보이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이 사장님의 태도는 선택적이고 개별적인 겸손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겸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겸손이란 벨보이의 친절에 가깝습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기쁨을 받고 누리면서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낮은 자리에 있는 자가 보이는 태도로서의 겸손이 필요합니다. 낮은 자리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자리입니다. 굳이 낮은 자리를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한 것을 겸손함의 미덕으로 생각하지 일부러 굽신대기 위하여 낮은 자리로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겸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아예 낮은 자리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 하늘 기쁨은 유지되고 강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리란 알몸의 자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인정해서 가지고 싶어 하는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가치는 곧 세상적인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사람들은 돈 벌면 기뻐합니다. 건강이 지속되면 기뻐합니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면 기뻐합니다. 인기가 많으면 기뻐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 가치이고 세상 기쁨입니다. 그런데 세상 기쁨을 유발시키는 모든 가치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마음이 올라서는 발판이 됩니다. 돈이 많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높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높아진 마음에서는 높은 자의 자아의식이 나오게 됩니다. 돈이 많거나, 지식이 많거나, 재능이 많거나, 인기가 많거나, 건강하거나, 외모가 뛰어나거나 세상적인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들이 마음에 스며들면 그것을 가진 만큼 높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높아질수록 하늘 기쁨과는 담을 쌓게 됩니다.
이 세상의 가치로 기뻐함은 곧 영적인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기뻐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타락하였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이 세상 것들 중에서 마음을 채울 거리를 찾게 되었고, 그것을 가질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가질 때는 잠깐 기쁘지만 결국 마음이 높아지는 교만만 남게 됩니다. 가졌다는 의식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높아지는 교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갖는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영적 간음의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향을 염두에 두고 겸손을 언급합니다. 하늘 기쁨과 세상 기쁨이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쁨을 발산하고 누리는 상태를 보면 하늘 기쁨이나 세상 기쁨이나 기쁨 자체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흔히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세상 가치를 얻어서 기뻐하는 중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잘돼서 돈을 많이 벌자 기쁜 마음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라이벌 관계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가치는 하나님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라이벌인 세상 가치를 좋아하는 간음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외도를 잘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다는 뜻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기뻐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세상 가치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알마음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육체적 차원에서는 돈도 있고, 건강도 있고, 인기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이란 하늘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게 육체적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주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이 두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은 하나님이 내게 두신 것들로부터 물과 기름처럼 분리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기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낮은 자의 자아의식이라는 의미의 겸손을 언급한 것입니다. 교인이라면 육체적 차원에서 세상의 가치가 있든 없든, 부자든 아니든, 한마음 한뜻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부자도 알마음이 되어야 하고, 가난해도 알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인기 배우도 알마음이 되어야 하고, 인기 없는 배우도 알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부자나 인기 배우가 알마음이 된다는 것은 돈이나 인기에 대해 마음이 끊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이나 인기 없는 배우가 알마음이 된다는 것은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나 인기를 얻고 싶은 마음이 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마음이 될 수 없다면 하나님으로 인한 하늘 기쁨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겸손이란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완전히 낮은 자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이 겸손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제하는 미덕이 아니라 노예와 같은 낮은 자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이는 태도입니다. 3절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이 세상 가치에 대해 물과 기름처럼 겉돌 때 무엇을 가졌든지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위에 서지 않습니다. 그럴 때 마음은 높아질 수 없는 낮은 자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누구를 보아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사셨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6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본래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에 비해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 되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하신 예수님이 스스로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 되심을 버리십니다.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은 아니되 마음으로 하나님 되심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그대로 사용하셨다면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왕들의 높음보다도 더 높은 분으로 군림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나 미국을 가다 보면 로키산맥 상공을 지나가게 됩니다. 지상에서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산맥이지만 비행기에서 보면 성냥갑처럼 보입니다. 역사상 왕이었던 모든 자들의 높음을 쌓아올려도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에 올라서셨다면 비행기에서 로키산맥을 바라보듯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상 가장 부자였던 사람들의 재산을 다 모아서 쌓아올렸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 위에 올라서셨다면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 되심의 크고 높으심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시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힌 자라는 자아의식에서 나오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아니면 하나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 가치와는 어떤 것과도 연결되지 않고, 이 세상 가치가 스며들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없다면 영적으로 간음하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 없고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의 자리는 노예보다도 더 낮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게 하시려고 십자가 자리로 가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동일시할 때 나도 주님의 자리로 가게 됩니다. 십자가 자리는 노예보다 낮은 자리입니다. 노예도 사지를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모든 가치가 하나도 없는 마음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는 조금도 갖고 싶어 하지 않는 죽은 자의 상태가 될 때, 1절에서 말씀하신 하늘로부터 내려온 권면과 사랑의 위로와 성령의 교제와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되고 하늘 기쁨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이 겸손은 실제로 세상 가치를 갖지 못한 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갖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노예가 굽신거린다는 의미의 겸손이 우리의 일관된 마음가짐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가졌던 바람이 우리에게도 적용되게 하시므로 하늘 기쁨을 지금 누리게 하시고, 점점 더 확장되어가며 점점 더 굳건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