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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구원받음, 구원이룸, 소원의 관계>의 줄거리 :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복종하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받아야 하며 그 받은 구원은 이루어야 합니다. 우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여야 할 일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사실에 항상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복종이 유지되면 나타나는 일이 바로 이상한 소원입니다. 이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 내 소원으로 나타나는 신비한 소원이지요. 구원을 이루는 이 신비한 소원을 알아봅니다.
구원받음, 구원이룸, 소원의 관계
(빌립보서 2:12~18)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본문은 무척 귀하고도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중심 내용은 12절의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로마서로부터 시작해서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서신에는 여러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빌립보 교인들은 가장 온전한 신앙 상태를 보여줍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이들에게는 하늘 기쁨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교회도 보여주지 못했던 신앙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지원은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요청을 합니다. 얼핏 평범한 조언처럼 보이지만 실은 흥미롭고, 심오하며, 기록된 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까지 들게 하는 내용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 세상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하늘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를 지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늘 기쁨을 누리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니 참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천국행 티켓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면서 구원의 문제는 완전히 매듭지었고 졸업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갖고 있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합니다.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사람 속에 소원이 생긴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원과 나의 소원을 구분하는 기준이 14절에 제시됩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완결된 구원론을 간결하게 해줍니다. 구원과 소원을 밀접한 관계에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취지를 따라서 구원과 소원을 연결시켜 생각해볼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구원받음과 구원이룸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복음적 의미에서 구원받음과 구원이룸의 차이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로부터 구원이룸과 소원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복음적 의미에서 구원받음이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함을 가리킵니다. 주님에 대한 고백이라는 단순한 마음의 행위가 바로 믿음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조차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부여받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된 자격을 사랑으로 받았으면 이제 아들 된 자격에 맞는 아들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구원을 이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입니다. 이 말씀은 의무감이나 부담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 나타나는 마땅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을 연관시켜 생각해보자면 마음으로 돈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똑같은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돈을 좋아하기에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돈 버는 일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을 좋아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돈을 벌려고 하듯이,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벌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이룸이고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입니다.
구원이룸은 아무에게서나 발견될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하나님을 좋아해서 하나님을 벌고자 노력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구원이룸의 자격은 주어집니다. 이처럼 구원받음과 구원이룸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복종하라’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복종이라는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주어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제시하신 말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 복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복종함이란 이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마음은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는 인격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며, 채움에 대한 만족감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십자가에 복종함으로써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두렵고 떨림으로 유지해나갈 수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바깥으로 나가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두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들 된 자격을 얻은 자는 하나님을 벌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을 좋아해서 돈을 벌려고 노력하듯이, 하나님을 좋아해서 하나님을 많이 가지려고 하나님을 버는 노력을 하는 자입니다. 그 하나님을 가지려는 노력이란 바로 그리스도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항상 의식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고,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머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을 때 구원을 이룸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을 좋아해서 돈을 벌려고 행동하는 것처럼, 내 마음이 하나님을 좋아해서 하나님을 벌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벌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복음적 의미에서 말할 수 있는 구원받음이란 아들의 자격을 받는 것이고, 구원이룸이란 아들답게 아버지를 많이 버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받음과 구원이룸이 소원과 연결이 됩니다. 쉽게 말해 구원받음이란 소원이 없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소원은 부족과 결핍을 느낄 때 생겨납니다. 구원이란 더 이상 부족과 결핍을 느낄 수 없어서 소원이 없어진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구원받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주는 구원은 소원을 없애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곧 나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소원은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나가면 사장님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직원들은 항상 사장님의 존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더 이상 사장님의 존재감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마음의 욕구는 채움을 위해서 작동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엇을 가져서 채우기 위하여 소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런 있음을 느끼는 의식도 없고, 좋음을 욕구하는 소망도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면 구원은 끝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내 마음은 비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을 이룸은 곧 마음 채움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소원함이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사셨고 부활하셔서 곧바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부족이나 결핍을 느낄 필요가 없음을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께 구원을 받은 자에게서는 예수님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 세상에 대한 소원이 중단됩니다.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존재감을 의식하지 않게 되고, 나의 기쁨과 만족을 구걸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소원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채움이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 다음에 요구되는 것이 소망과 사랑입니다. 구원이룸은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과 친해지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랑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음은 소원이 세상을 향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구원은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24시간 채워지고자 욕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본성대로 마음은 작동하며 무엇인가를 빨아들이려고 하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소원이 끝나는 구원받음의 상태에서 멈춰버린다면 마음은 빨아들일 대상을 찾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이 세상을 향하여 눈곱만큼이라도 무엇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가지기를 원하는 소원이나 바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구원받은 것조차도 아닙니다. 구원을 이루지 않았기 때문에 받은 구원조차도 무효화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랑의 단계로 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음이 무효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 없이 살면서도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는 무엇을 소원해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것을 소원하는 대로 갖지 않아도 될 만큼 마음이 온전히 채워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세상 것 없이도 마음이 채워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음 채움을 위하여, 영원한 기쁨을 위하여, 끝끝내 세상이 필요치 않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배우자도 필요 없고, 자녀도 필요 없고, 건강도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고, 세상에 있는 것인 한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전히 세상 것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단계조차 아닙니다. 구원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깁니다. 이제는 정말로 구원받아야만 합니다.
구원은 세상 것 없이도 온전히 채워질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된 자격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구원받음에 대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구원이룸이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바깥으로 튕겨나가지 않도록 두려움과 떨림으로 십자가에 복종함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렇게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줍니다. 마음이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는 하늘 기쁨으로 충만할 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늘 기쁨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머리 둘 곳 없이 사시고, 부활하셔서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셨던 것처럼 하늘 좋음을 아셨듯이, 빌립보 교인들은 하늘 좋음을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하늘로 인한 기쁨을 가진 자들에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사건은 죽음입니다. 지금 죽어서 그렇게 좋아하는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 최고이자 최선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고 계시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합당한 모습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란 세상 것을 마음이 붙잡지 않는 상태입니다. 내게 주어져 있는 세상 것이 있다 할지라도 마음이 거기에 스며들지 않고, 내게 없는 것에 대해서는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것을 알몸에 비유한 알마음이라는 표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알마음이 되는 것이 곧 구원이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구원이룸의 과정에 대해서 소원이라는 마침표를 찍습니다. 구원이룸이 이루어질 때 다시금 세상을 향하여 소원을 갖게 된다는 것이 참 오묘한 이야기입니다.
구원받음은 세상을 향하여 소원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존재감을 의식하고자 하고 좋음으로 여겨지는 대상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세상을 향하여 전혀 소원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 구원받음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얻게 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구원이룸은 마음이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채움이 하늘에서 다 이루어지기에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깁니다.
구원받음에서 세상 소원을 버리고, 구원이룸에서 하늘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마침표로서 이 세상을 향한 소원이 다시 생기게 됩니다. 분명히 나의 마음은 세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만족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서 왜 다시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겨난다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최선은 지금 죽는 것입니다. 아직 내 마음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이것은 논리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가장 좋아한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인정할 때에 말씀을 받아들이는 단계로의 발전도 가능합니다.
다만 내게는 지금 죽는 것이 최선임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살려두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실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이루는 방식이 내가 이 세상을 향하여 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내게서 나오는 소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소원이 내게 임하고, 나의 의욕과 나의 소원의 정신작용을 통하여 이 땅에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소원의 형태로 나타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인지 내 소원인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지만,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감탄하게 됩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말은 성경적 분위기 안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13절의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는 말과 연결시키면 너무나도 신비한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은 24시간 소원하며 살아갑니다. 남북통일 같은 큰 바람만 소원이 아닙니다. 회사에 출근해서 거래처 사람과 만나도 바라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바람이 있고, 어떤 일을 하든지 바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바람이 바로 소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시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소원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구원을 이루며 이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누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향한 소원을 갖게 하십니다. 다만 나로부터 발생한 소원과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은 완전히 다릅니다. 소원의 결실에서 나타나는 원망과 시비에 차이가 있습니다.
소원만 가지고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소원한 대로 움직이고 결실해야 마음이 채워지고 만족과 기쁨이 주어집니다. 원망과 시비의 원인은 불만입니다. 내 멋대로 세상에 대한 소원을 갖게 되면 그 소원대로 행하고 움직였는데도 주어진 결실에 대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갖는 소원의 십중팔구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생겨난 불만이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대한 원망과 시비로 나타납니다. 나는 잘못이 없는데 남의 잘못으로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 멋대로 갖게 된 소원에는 반드시 원망과 시비가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 만큼 원망과 시비가 따라오게 됩니다.
한편 구원을 받아서 마음 채움을 위해 세상 것이 필요 없어지고, 또한 구원을 이루어서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랑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에게 소원이 생길 때에는 이상하게도 원망과 시비와는 반대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소원대로 행하지만 그 결말에 대해서 머리털 끝만큼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람이 소원하는 대로 행하는 이유는 마음 채움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미 하나님으로 채워진 가운데 생기는 소원이라면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어떤 결말이 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책을 내고자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소원이 내 소원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요? 그 책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게 됩니다. 혹시나 많은 사람들이 책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내 멋대로 하는 소원입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하루를 사시는 동안 마음에서는 여러 가지 바람이나 소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의 결말에 대해 무관심하실 수 있다면 그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 내려온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 내가 의욕을 가지는 일들의 결말에 대해서 정해 놓은 답이 있고 그대로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소원이 아닙니다. 소원하는 일들의 결말에 대해 원망과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바라는 바가 크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소원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구원이룸의 과정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구원받음의 단계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시작함을 두려워하거나 창피해할 일은 아닙니다.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향해 바라는 이 상태로부터 구원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이루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면 결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생기지 않는 이상하고도 신비한 소원의 주인공들이 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원은 결말을 바라지 않는 이상한 소원이고, 한 바퀴를 빙 돌아와서 다시 하는 소원임을 알았습니다. 구원을 이룸에 마침표를 찍는 소원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셔서 평생을 이 소원만 가지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