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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참사람으로 거듭난 똥 먹던 개>의 줄거리 :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제 주 밖에서 기쁨을 얻으려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리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한 마디로 행위 주의자입니다. 행위를 통해서 자기가 속한 사회가 정한 기쁨 거리를 얻으려는 자들입니다. 과거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밝히며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똥 먹는 개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참사람으로 거듭난 똥 먹던 개
(빌립보서 3:1~11)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오늘은 일요일 주일임과 동시에 대한민국에서는 설날로 지키는 날입니다. ‘참사람으로 거듭난 똥 먹던 개’라는 제목은 설날 아침부터 입에 올리기에는 거북한 표현입니다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과거의 자기 모습을 똥 먹던 개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랬던 자신이 참사람으로 거듭났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참사람이며 또 어떤 사람이 똥 먹던 개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언뜻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나온 말씀 같습니다. 물론 그런 의도가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주제는 기쁨입니다. 1절에서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라고 한 것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아무리 말해도 수고롭지 않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며, 물리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볼 4장 4절에서도 반복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내용이 강조되어 이어집니다.
또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함을 강조하면 할수록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전함의 반대되는 위험함이란 곧 주 안에 머물지 않고 주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 밖으로 튕겨져 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주 안에 있는가를 진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기쁨입니다. 내가 지금 기뻐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는지를 진단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보자면 슬픔, 불안, 두려움, 시기와 질투, 분노, 불만, 못마땅함 같은 기분이 들어서 편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드는지 진단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쁨을 기준으로 내 기분 상태가 어떤 상태이며 왜 기뻐하고 혹은 왜 기쁨이 없어졌는가를 보면 지금 내 마음이 주 안에 머물고 있는지, 주 밖에 머물고 있는지를 가장 쉽고 빠르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주 안에 머무는 것이 안전입니다. 우리 마음이 주 밖에 머물 때 모든 것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센서가 바로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1절 앞부분으로 돌아가 보면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끝으로라는 것은 주 안에서의 기쁨을 유지하는데 위험이 될 만한 여러 가지 사항들 중에 마지막으로 강조할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끝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주의 사항에 대해 말해보겠다.’라고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요주의 사항이라는 것이 무척 특이합니다. 2절을 보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개들에 대한 언급에 앞서 몸을 상해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바로 육체적으로 행하는 할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삼가야 될 개들과 행악하는 자들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특별히 유대 율법주의 성향을 고수하던 자들을 가리킵니다.
다만 이것은 단순히 유대 율법주의에만 국한되는 지적은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행위원칙을 따라 사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행위원칙을 따라 사는 것이 주 안에서의 기쁨을 유지하는데 위험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경계하고 삼가야 하는 이유는 주 밖에서 기쁨을 찾을 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이 행위원칙 주의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말 그대로 주 안에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마음은 이 세상의 기쁨 거리와는 단절됩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은 24시간 기쁨과 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의 존재감을 의식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의식하고 기억할 때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됩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동안에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감을 의식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좋음으로 채워지기 위하여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기뻐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행위도 필요치 않습니다. 한편 이렇게 주 안에서 하나님으로 기쁨을 이루는 동안에 이제 하나님이 이루고 싶으신 뜻들이 소원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행동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계속해서 강조해 온 카이로스의 시간이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지금 하늘에서 내려오는 뜻을 따라 움직이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하면 내 모든 말과 행동은 지금 하늘에서 내려오는 따끈따끈한 뜻을 따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주 밖으로 나간 마음에서도 기쁨과 채움에 대한 추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기쁨과 채움을 소망할 수 없기에 이 세상에서 기쁨과 채움을 추구하게 됩니다. 주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채움을 에너지로 행동하지만, 주 밖에 있는 사람들은 행동을 함으로써 기뻐하려고 합니다. 행위를 통해서 기쁨의 자리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바로 행위원칙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행위원칙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이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주 안에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함이란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시대와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 있을 때 이루어지던 성전 중심의 예배 생활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내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성전이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12장 1절을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몸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삶은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성령을 통해 전달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전달된 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함이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떤 것이나 어떤 사건보다도 오직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육체를 의지해서 이 세상에서 기쁨 거리를 찾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만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에서 기쁨 거리의 자격을 박탈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강, 형통, 재물, 승진, 외모를 비롯한 모든 일들은 육체가 있기 때문에 만나게 됩니다. 기쁨 거리를 찾아야만 하는 마음이 육체를 의지하게 되면 이런 것들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 있는 자들은 육체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기쁨의 자격을 박탈해버립니다.
이렇게 주 안에 있는 자들의 특징을 언급한 사도 바울은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과거에 자신은 육체로 만나는 기쁨 거리를 추구하며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육체 의존적인 행위 주의자들을 개와 행악자이고 몸을 상해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5~6절을 보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라고 하였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함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은 민족을 구분하는 차원에서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베냐민 지파라 함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지파 소속이라는 것이고,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분열됐을 때에도 유일하게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이었음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함은 히브리인들의 모든 관습과 가치관을 완전히 습득한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율법으로 바리새인이라 함은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다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게 행동한다고 여겨지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박해할 정도로 철두철미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이전에는 최고로 자부할만한 유대인 중의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을 고백하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이나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과거에 자랑스럽게 여겼던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속해 있었던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의 이런 요소들을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나는 재벌 3세였고, 우리 가문은 3대째 의사 집안이었으며, 3대째 국회의원을 배출한 명문가였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세상에서 소속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나라와 민족이 있고, 내가 속한 사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속된 사회에서 최고로 여기는 가치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가치는 학벌이나 집안일 수 있습니다. 대학을 SKY에서 나왔다고 하면 대단하게 여깁니다. 집안이 3대째 의사 집안이라고 하면 대단하게 여깁니다. 사는 곳이 강남의 도곡동 타워팰리스라고 하면 대단하게 여깁니다. 이처럼 그 사회가 소중하고 좋게 여기는 가치들이 있는데,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 가치가 출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민 이스라엘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였고, 바리새인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좋다고 인정하는 가치들을 많이 가진 자였습니다. 율법주의자로 대표되는 행위원칙 주의자들의 특징은 바로 이렇게 사회에서 인정하는 가치들을 많이 가지기 위해 행동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자부심을 가지고 율법을 열심히 지켰고, 교회를 박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분이라는 토대 위에서 기쁨을 추구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높은 출신성분을 가진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출신성분을 가진 사람은 그들 나름의 출발점에서 인정받고자 합니다. 사회가 인정하는 가치들을 얻기 위하여 행동함으로써 기쁨의 자리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바로 개들의 삶에 불과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학벌, 집안, 재력,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우러러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품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서 우러러보는 가치들을 기쁨 거리로 삼고 주 밖에서의 행위를 통하여 얻으려 하는 것은 개가 똥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렇게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야말로 인간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얻기 위하여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행위를 하던 똥 먹는 개와 같았다고 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은 주 밖에 있는 자들의 삶을 삼가는 것은 그들을 시기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SKY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학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대학총장을 못 해봤기 때문에 높은 자리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 밖에 있는 자들의 삶을 삼가는 것은 못 먹는 호박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비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배설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스키발라(σκύβαλα)는 그야말로 똥, 음식물찌꺼기, 쓰레기를 가리킵니다. 또한 특별히 당시 사람들이 개에게 던져주던 내용물을 가리킵니다. 지금은 개를 애완견이나 반려견이라 부르며 소중하게 대하지만 당시의 개는 가장 저열한 인간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사회에서 인정해주는 가치들에 대해 개라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모자라서 똥이라고 못 박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기쁨을 추구함은 주 안에서든 주 밖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주 밖에서 기쁨을 추구할 때는 행위원칙에 얽매인다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육체가 속한 사회가 좋다고 인정하는 가치를 행위를 통하여 붙잡음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똥 먹는 개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런 똥 먹는 개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강한 어조로 고백합니다.
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똥 먹는 개로 여긴 이유가 나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앎이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즉 경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앎이 어떠한 것인지 10~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에 참여함이란 마음에서 기쁨 거리로 여겨지는 이 세상 것들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좋다고 하는 가치, 다시 말해 사람들이 정해놓은 똥을 향하려는 기질이 있습니다. 이 기질을 잘라내는 것이 고난입니다. 이는 곧 3절에서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라고 하였던 것과 상통합니다. 할례는 양피를 베어서 잘라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곧 예수님에 대한 앎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앎이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 연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의 할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그동안 좋다고 여겼던 이 세상의 똥을 베어서 잘라내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해 침 흘리며 살아갑니다. 건강, 승진, 재물, 형통, 인기를 얻고자 추구합니다. 이렇게 인간사회에서 좋은 가치로 추구하고, 기쁨 거리로 여기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앎, 다시 말해 예수님과의 연합을 위해서는 반드시 끊어져야 합니다. 이것들이 끊어져도 되는 이유는 예수님을 앎에서 비롯되는 기쁨과 비교하자면 똥으로 여겨질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서 세상의 가치들을 붙잡는 시도가 습관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난으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이 고난을 끊어내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고백할 때 부활의 권능에 참여함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이 세상의 가치를 끊어내는 고난은 육체적인 고통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똥 같은 것임을 알아도 끊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침 흘리며 먹고 싶어 하는 똥을 나도 똑같이 추구해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한 번에 끊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이 지속될 때에 이러한 성향은 끊어지고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부활에 참여하게 되면 놀라운 권능이 나타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소망할 수 있게 됩니다. 똥 덩어리를 추구하던 개가 십자가에서 죽자,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는 참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권능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9절을 보면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의롭다 여김을 받는 칭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의로움이란 떳떳함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가치를 가졌을 때 어깨가 펴집니다. 외제차라도 타면 어깨가 펴지고, 강남의 비싼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당당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행위를 통해 사회에서 인정하는 기쁨 거리를 추구하려는 이유는 긍지와 자부심과 떳떳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가진 떳떳함이란 이렇게 인간사회에서 인정하는 기쁨 거리를 가짐으로써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떳떳함으로 이 세상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 세상의 기쁨 거리는 똥 덩어리와 같았습니다. 똥 덩어리이기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더라도 아쉽지 않으며, 주어졌을지라도 마음에서는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결별해야만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인정해주심을 통해 떳떳함과 당당함과 긍지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늘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요주의 해야 할 것은 바로 내가 속한 인간사회가 인정하는 가치들입니다. 똥과 같은 것들을 추구하여 기쁘겠다고 행위를 하려는 습관으로부터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행위는 주 안에 있는 한 성령이 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성령이 행위를 하실 때는 기쁨을 향하는 행위가 아닌 기쁨으로부터 나오는 행위가 됩니다.
무엇을 하시든 어디를 가시든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주 안에 머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서 육체로 누릴 수 없는 기쁨을 마음에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기쁨이 발산되는 과정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주 안에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해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마음이 주 안에 머물게 하시고 똥 먹던 개로 살던 시절이 완전히 단절되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