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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2

녹취문: 마음이 실제 하늘로 달려가 상 받는 법_태승철 (빌립보서 3:12~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1.26|조회수4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이 실제 하늘로 달려가 상 받는 법>의 줄거리 :

내 마음이 진짜로 4차원 천국으로 달려가는 법을 아십니까?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내 마음이 도착했다는 증거까지 분명하도록 달려가는 법 말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정조준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십자가 예수님에게로 보냅니다. 의식하기를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 뒤로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통로가 있습니다. 이 통로 안으로 내 마음이 계속 쌓여서 하늘에 닿아야 합니다.

 

마음이 실제 하늘로 달려가 상 받는 법

 

(빌립보서 3:12~16)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 마음이 지금 4차원 천국으로 달려가서 실제로 상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로 달려갈 것인가, 그리고 마음이 하늘에 도착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이 없다면 마음이 4차원 천국에 달려갈 수 있다는 말은 공염불이 되고 맙니다. 그저 종교답고 멋스럽게 하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지금 살아서 내 마음이 하늘로 달려가는 법을 모르면 하늘은 예수님의 종말 때나 가는 곳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상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 때나 받게 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가 달려가야 할 4차원 천국과 그곳에서 받게 되는 상은 지금 이루어져야 할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관건이 되는 말씀은 14절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푯대’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는 표현이 본문을 강하게 인상 짓는 단어들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너무나 귀중하고도 유익한 내용이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 속에 담겨있는 보물 같은 엄청난 은혜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개의 온전함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12절과 15절에서는 각각 온전함이 언급됩니다. 먼저 12절을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15절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얼핏 비슷한 내용처럼 보입니다만 실은 여기서 언급되는 온전함은 성격이 각각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온전히 이룬 자들에게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온전함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우리는 이 소중한 본문에 대해 올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온전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는 ‘목표’라는 뜻의 텔로스(τέλος)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온전함이란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했음을 가리킵니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했다면 더 이상 목표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목표는 결핍과 부족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목표란 결핍과 부족이 없어진 이상적인 상태를 향하여 가기 위하여 세우는 푯대이자, 바라보면서 갈 수 있는 표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함이란 목표를 다 이루어서 더 이상은 목표가 필요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12절을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늘을 향한 온전함을 말합니다. 하늘을 향해서는 아직 목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한편 15절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은 이 세상을 향한 온전함입니다. 마음의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목표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는 마음을 채울만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향한 온전함과 하늘을 향한 온전함을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세상을 향해서 목표를 세울 필요가 없는 상태의 온전함이 있고, 하늘을 향해서 목표를 세울 필요가 없는 온전함이 있습니다. 다만 땅을 향해서는 지금 온전함을 이룰 수 있지만 우리 몸이 살아있는 한 하늘을 향한 온전함은 완결될 수 없기에 하늘을 향해서는 끊임없이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대해 온전함을 이룬 자들은 12~14절의 내용대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땅을 향해서는 더 이상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어떤 것도 목표로 세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온전해졌지만,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다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하늘을 향하여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하늘 기쁨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몸이 있는 세상에서 어떤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는 큰 소원이든 작은 바람이든 갖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는 더 이상 세상이 전혀 필요치 않은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온전함을 이룬 사람입니다.

다만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요구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온전히 채우는 것입니다. 세상이 필요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하늘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초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진 마음이 다 채워진 것은 아닙니다. 몸이 죽어서 하늘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여전히 온전함을 향한 길을 달려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늘을 향한 온전함에 대한 졸업은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 달려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마치 사냥개가 토끼를 쫓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사냥개가 쫓아오면 토끼는 사력을 다해서 도망칩니다. 그리고 사냥개도 여유롭게 추적하지 않습니다. 깡충깡충 도망치는 토끼에 사냥개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집중합니다.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토끼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하늘을 푯대 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절의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달리 생각한다는 것은 온전함에 대해서 사도 바울과 같은 생각이 아니라면 세상을 향한 방향에서 아직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직 세상을 향해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붙잡는 푯대나, 세상을 향해서 온전함을 이룬 사람이 붙잡는 푯대는 똑같은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한 푯대를 향해 가면 언젠가 땅을 향한 온전함은 이루어질 것이고, 이미 온전함을 이룬 사람들과 같이 하늘을 향한 온전함을 이루기 위하여 달려감도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사람에 따라 온전함의 단계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향한 온전함의 초보 단계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조건이 주어져도 상관없이 하늘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보이든 성숙하든 푯대는 하나입니다. 그 푯대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14절을 보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말이 어렵지만, 주제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달려가야 할 푯대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외의 다른 것을 바라보게 한다면 모두 거짓말이고 가짜입니다.

푯대란 눈으로 응시하여 달려가야 하는 곳입니다. 마라톤 선수는 모두 결승점을 바라보며 달려갑니다. 출발점에서 결승점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마라톤 선수는 경기 시작 전에 코스를 확인하며 결승점을 머리에 기억합니다. 그리고 달리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 결승점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푯대인 이유는 내가 달려갈 수 있는 부분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보고 달려가면 십자가는 땅에서 이루어진 사건인데도 상은 하늘로부터 주어집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늘을 바라보려야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푯대 삼아서 달려가다 보면 마음은 이상하게도 하늘로 부르심을 받아 부름의 상을 받게 됩니다.

당시 로마 시대에 경기를 해서 우승자가 되면 면류관과 상을 받았습니다. 상을 수여하는 지체 높은 사람은 항상 높은 무대 위에서 경기를 관람하였습니다. 우승자는 아래에서 위에 있는 높은 사람을 우러러보게 됩니다. 높은 사람이 올라오라고 부르면 비로소 올라가서 면류관과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연상하며 본문의 말씀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상을 받으려면 마음이 하늘까지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까지 올라온 마음에 대해 잘했다고 하시며 상을 주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십자가라는 푯대를 향하여 열심히 달린 것을 참 잘했다고 여기시며 하늘로 올리셔서 상을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실제로 하늘에 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달려간다는 표현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하늘에 닿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향해서 갈 뿐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라볼 대상은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감이란 곧 마음이 계속해서 십자가를 향해 흘러감을 의미합니다. 사냥개가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토끼를 쫓듯이,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직장에서는 상사 앞에서, 학교에서나, 군대에서나 우리는 사냥개가 토끼를 쫓듯이 집중해서 십자가를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십자가를 향해 계속해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음이 달려가면, 그 십자가 너머에는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는 통로가 있습니다. 이 통로는 내가 올라가는 곳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의 흐름이 십자가를 향하여 유지되면,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예수님이 만드신 통로 속에서 나의 마음의 흐름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그 흐름이 쌓여서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도달한 마음에 대해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나에게도 상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고 계시는 모든 사랑의 내용물이 내 마음에 전달되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지만 중간중간 푯대를 향하는 마음의 중단되기 때문입니다. 푯대를 향한 마음의 흐름은 쌓이면서 하늘에 닿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눈을 팔면 조금 쌓이던 마음의 흐름은 다시 세상으로 빠져버립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물이 차오르는 함정에 빠진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오히려 물을 이용해서 떠올라 함정을 빠져나옵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주인이 쓸모없는 늙은 나귀를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지고 흙을 끼얹는데, 늙은 나귀는 영리해서 발로 흙을 다지며 밟고 올라왔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의 흐름은 이렇게 차오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푯대로 삼아서 사냥개가 토끼를 쫓듯이 십자가에 집중할 때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통로에 점점 더 차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쌓인 마음이 하늘까지 닿으면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받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7장 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있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강처럼 흘러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내게서 충만해지면서 바깥으로 흘러나갈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생수의 강처럼 흘러서 내게 임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강물처럼 십자가 푯대를 향하여 지속하여 흘러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물이 차오르듯 마음이 쌓여서 보좌 우편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너무 예뻐하시면서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에게 주시는 모든 사랑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만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과 연결시켜 보자면 어려운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에 대해 엉뚱한 방향으로 가던 자신을 예수님이 가로막으신 것으로 이해하고 이야기합니다. 앞선 말씀을 떠올려보자면 자신은 배설물과 같이 여겨질 수밖에 없는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던 사람이었는데 그러한 자신을 예수님께서 가로막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방향을 틀고 보니 그곳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건을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다고 하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사람 보게 되는 푯대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한 번 달려가서 붙잡으면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의 흐름이 십자가로 끊임없이 이어지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은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표현대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있든 직장에 있든 마음은 십자가를 계속해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냥개가 토끼를 쫓을 때 집중하듯이, 마음을 십자가에 집중하여 달려가는 만큼 마음은 쌓이게 되고 이윽고 하늘에 도달하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마음이 하늘에 닿을 만큼 쌓이지 못하여 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쌓이듯 하다가 다시 세상일들에 마음을 향하게 됩니다. 사냥에 관심이 없는 사냥개가 도망가는 토끼는 내버려 둔 채 옆에서 울고 있는 개구리만 쳐다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세상 것들이라는 개구리 소리가 가지가지로 들려올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 십자가를 푯대로 삼아 흘러야 하는 마음의 흐름은 중단될 수밖에 없고, 하늘까지 쌓여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온전함의 진도를 더 나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미 빌립보 교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하늘 기쁨을 누리는 믿음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기대하거나 바라는 바가 없는 온전함을 이룬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늘을 향해서도 온전해질 것을 권유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향한 온전함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얻었거나 온전함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온전함이란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달려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만큼 쌓여서 누적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쌓인 만큼 아버지께서는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상은 독생자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상입니다. 그리고 독생자의 자리에서 받는 상인만큼 상을 받을수록 점점 더 예수님과 똑같아집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시는 것 이상의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전능하시지만 예수님에게 주시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이미 당신 전체를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 전체를 주시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를 향하여 마음을 흐르게 하고 쌓이게 하는 것입니다. 사냥개가 토끼를 쫓아가다가 엉뚱한 대상에 관심을 주면 사냥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세상에 관심을 향하게 되면 마음은 하늘까지 닿지 못한 채 빠져나가게 됩니다. 마음의 흐름은 계속해서 차올라야만 하늘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이신 성령을 강에 비유하셨듯이, 우리의 마음도 강처럼 계속해서 흐르고 차올라서 누적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바라보고 달려갈 푯대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를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흐름이 그리스도 통로에 가득 채워지고 보좌 우편에 이르러서,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매일매일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순간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듯 나도 그 사랑을 받으려면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통로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내일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십자가 안에서 마음을 하늘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마음을 하늘로 밀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을 받는 중에 이 땅을 향해서는 아버지의 마음이신 성령께서 생수의 강이 되셔서 끊임없이 흐르며 이 세상일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를 푯대로 삼아 하늘을 향해 달려가서 실제로 상 받는 삶이 되고, 성령의 생수의 강이 끊임없이 흐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단 하나의 푯대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부자 됨도 아니고, 건강함도 아니고, 형통함도 아니고, 세상에서 재미있음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푯대를 향해서 마음의 흐름이 누적되게 하시고 하늘에 도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에 이어 내일도 이 누적이 계속되어 넘치도록 십자가만 바라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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