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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2

녹취문: 십자가 토끼 잡으면 두 마리 다 잡는다_태승철 (빌립보서 3:17~2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1.28|조회수3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토끼 잡으면 두 마리 다 잡는다>의 줄거리 :

양토실실(兩兎悉失)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다가 둘 다 놓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하실 때의 의미가 바로 사력을 다해서 도망가는 토끼를 뒤쫓는 사냥개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는 십자가라는 필수적인 토끼와 삶의 현장마다 주어지는 과제나 의무 등 또 한 마리의 토끼를 앞에 두게 됩니다. 이때 두 마리 토끼 다 잡는 법이 있어 알려드리려 합니다.

 

십자가 토끼 잡으면 두 마리 다 잡는다

 

(빌립보서 3: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20절에서는 하늘의 시민권이 언급됩니다. 하늘에 시민권을 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십자가 토끼 잡으면 두 마리 다 잡는다’라는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천국 시민권자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십자가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20~21절을 보면 구원하는 자로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특징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란 우리의 낮은 몸을 변화산 모습 때와 같이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를 재료로 영광스러운 몸을 만드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살아있는 동안은 마음이 육체라는 옷을 입고 있는 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육체의 몸을 낮은 몸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육체를 영광의 몸으로 바꿔주시리라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말씀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바로 천국 시민에 대한 내용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십자가 토끼 잡으면 두 마리 다 잡는다’라는 제목은 천국 시민으로 사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이 이 세상에서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의식의 특징은 몸을 둘로 구분해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몸은 낮은 몸입니다. 그런데 영광의 몸으로 변할 것을 알고 살아갑니다. 낮은 몸이란 영원하지 않은 소모품입니다. 자동차를 보면 여러 가지 소모품이 있습니다. 1만 킬로미터를 달리면 엔진오일과 필터를 갈아야 합니다. 때가 되면 에어필터도 갈아야 하고, 안전 운행을 위해 브레이크 패드도 갈아줘야 합니다. 이러한 소모품은 아까워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쓰다가 버릴 생각을 해야 안전 운행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육체라는 낮은 몸으로 이 세상 만물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 세상 만물은 예수님께 복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만물 위에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거쳐 보좌 우편에 오르셨습니다. 세상 만물 중에는 이렇게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보다 높은 대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사람이라면 예수님 아래에 있는 만물들을 향해 마음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아래에 있는 만물 중에는 내 몸부터 시작해서, 가족도 있으며, 몸으로 하는 모든 일도 속해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곧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천국 시민은 지금 천국에 계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천국 시민의 특징은 마음이 예수님 아래에 있는 만물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 아래에 있는 만물에 마음이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렸듯이 믿음이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천국 시민의 마음은 천국에 계신 예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 아래에 있는 만물에 관심을 둘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아래에 있는 만물에 관심을 둘 수 없는 형편에서, 낮은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하는 일이 만물과 만남입니다.

우리에게는 몸이 움직이면서 해야 될 의무와 과제가 있고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만물을 떠나 예수님께로 마음이 달려가야만 합니다. 낮은 몸으로 세상을 만날 때 해야 할 일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만물에 속하지 않고 만물이 있는 세상을 떠나는, 이 두 가지 일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서 잡아야 하는 두 마리의 토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삶이 천국 시민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천국에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에 대한 믿음이란 마음이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들이 천국 시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 있음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마음이 주님께로 가서 주님 안에 머물면서 있음을 의식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입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부모와 형제 앞에서, 직장 동료나 상사 앞에서, 언제나 마음은 예수님께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에 계신 예수님 안에 마음이 머무는 한 내 마음이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의 대상은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 시민의 특징은 낮은 몸이 어디에 처해있든지 하나님의 존재감을 언제나 가장 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공백이 있기 때문에 채워지고자 하는 욕구를 갖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만물 위에 계시는 예수님께로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께로 간 상태에서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12~14절을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달려가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오코(διώκω)는 ‘뒤쫓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력을 다해서 도망가는 토끼를 뒤쫓는 사냥개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사냥개가 토끼를 쫓기 시작하면 토끼는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로 깡충깡충 뛰며 도망갑니다. 그럴 때 사냥개는 오직 토끼에게만 시선을 집중한 채 달려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력을 다해 도망가는 토끼와 같아서 여차하면 놓치기 쉽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두 마리 토끼를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토끼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고, 두 번째 토끼는 낮은 몸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어떤 삶의 현장에서도 예수님 믿기는 중단되어서는 안 되며, 내 마음은 계속 예수님을 향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물 위에 등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아래에 있는 만물에게 마음을 두어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자체가 성립할 수 없고 천국 시민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예수님을 쫓아갈 수 있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토끼를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을 때 마음은 부활과 승천을 따라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로 가게 됩니다. 십자가를 놓치면 예수님을 믿는 자체가 중단됩니다.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 마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몸을 소모품처럼 사용해서 이루어야 할 일이나 과제가 있습니다. 대처해야 될 상황들이 계속해서 주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만 낮은 몸으로 해야 되는 토끼를 잡을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로부터 시작하여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눈여겨보라는 것은 십자가 토끼와 삶의 현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모습을 눈여겨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토끼를 붙잡기 위해서 달려간다고 삶의 현장이라는 토끼를 놓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토끼를 붙잡아야 하는 곳은 예배당이나 기도원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토끼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토끼로 비유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십자가를 놓치는 일이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낮은 몸을 가지고 삶의 현장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가를 붙잡아야 하는 이유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계신 곳까지 가면 그 증거로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만을 욕구하게 되는 하나님 소망으로 가득 차는 하나님 부자가 됩니다. 이것이 천국 시민의 특징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낮은 몸으로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모습을 눈여겨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토끼를 붙잡고 삶의 현장이라는 토끼도 놓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만물이 있는 이 세상과 천국 사이에 끼어있는 경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을 24시간 의식함이란 사냥개가 토끼를 향해 달려가듯이 십자가를 향해 마음이 계속 흐르게 함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육체가 죽을 때까지 도망가는 토끼와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의 흐름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십자가를 쫓아갈 수 있습니다. 잡았다고 생각해도 마음의 흐름이 끊어지는 순간 다시 놓쳐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쫓아감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십자가 토끼를 쫓아감을 중단하고, 만물이 있는 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중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아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무관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장사하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 집사님은 장사를 하는 동안에도 천국 시민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지속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곧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그 예수님 아래에 있기에, 장사도 예수님 아래에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께서 예수님 대신 장사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손님이 많이 오기를 기대하고, 이윤을 많이 얻기를 바라게 되었다면 이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닌 돈을 믿게 된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믿음은 곧 마음을 드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 마음 드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장사하는 동안에도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십자가가 장사라는 삶의 현장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출구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음이 지속될 때 마음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장사하는 중에도 마음은 손님보다 먼저 하나님의 존재감을 크게 느낍니다. 그리고 또한 마음은 이윤이 아닌 하나님의 좋음으로 가득한 상태가 되어서 천국 시민이 됩니다.

이렇게 천국 시민의 상태일지라도 몸으로 살아가는 일은 계속됩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늘로 올라감이 충만해지면, 낮은 몸이 있는 곳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옵니다. 이 세상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있게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에도 이미 하나님의 마음과 관심은 흘러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낮은 몸으로 대하는 모든 삶의 현장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관심밖에는 필요 없습니다. 무엇인가 더 이상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 있게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늘로 가지 않고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은 방해를 받으시게 됩니다.

십자가를 붙잡을 때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만물 위에 계시는 예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붙잡지 않는다면 낮은 몸으로 만나게 되는 만물에 마음을 주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천국 시민에게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출애굽 사건처럼 출세상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복종하게 하셨기에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복종하는 만물에 마음을 줄 수 없습니다. 이 만물에는 나의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족, 하는 일과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절대로 예수님께서 복종하게 하신 것들로 향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출구가 되는 십자가를 의식에서 놔버리고, 등지고, 잊어버려서 예수님이 복종하게 하신 만물에 마음을 쏟아붓는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중단되고 맙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토끼를 잡으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 삶의 현장에서 낮은 몸으로 만나는 만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관심이 내려와서 내 몸을 소모품으로 사용하시게 됩니다. 그럴 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등지고 만물 위에 계시는 예수님께로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주님 아래에 있는 만물에 마음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르면서도 멸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천국 시민권을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배는 육체의 배가 아닌 마음의 공백을 가리킵니다. 낮은 몸에 밀착된 마음의 공백을 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공백을 낮은 몸을 통해서 채우고자 하기에, 오직 이 세상 것들을 구걸하다시피 추구합니다. 이어서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재력, 학벌, 지위, 인기 같은 것들이 가치 있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설령 이러한 것들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부끄러운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멸망으로 가는 추진력을 더 강화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얻었다는 자기만족에 취하면 취할수록 점점 더 멸망으로 치닫는 속도는 가속화됩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마음이 낮은 몸에 붙어서 이 세상의 만물을 추구하는 상황을 똥에 비유하였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하나님의 관심과 뜻을 이룰 때 삶의 현장이라는 토끼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토끼를 놓치면 하나님의 관심과 뜻을 방해하게 되고, 결국 삶의 현장이라는 토끼도 놓치게 됩니다.

 

 

십자가는 붙잡아야 하는 토끼입니다. 토끼는 뒷다리가 길어서 도망갈 때 위쪽으로 향합니다. 위로 도망가는 토끼를 사냥개가 뒤쫓듯이, 우리는 십자가를 푯대 삼아서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냥개가 토끼를 쫓듯이 우리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고 있으면 마음은 하늘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천국 시민이 됩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해지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 하나님 충만을 간구하지만 먼저 십자가 토끼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충만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 삶의 현장에도 하나님 뜻의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몸을 하나님의 뜻이신 성령께서 소모품으로 사용해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십자가 토끼를 붙잡음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낮은 몸으로 세상에 대한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땅의 일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땅의 일은 예수님 아래 복종하는 일이기에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예수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생각은 충만한 마음 상태로부터 나옵니다. 내가 돈 문제에 대해서 마음이 계속 흘러가는 상태라면 마음이 돈 문제로 충만한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돈으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어떻게 해야 돈을 벌까? 어떻게 해야 돈 문제를 해결할까?’라고 돈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됩니다. 천국 시민이라면 절대 땅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땅의 것들이 달려갈 푯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땅을 생각한다면 예수님 아래 복종하는 세상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푯대 삼아 마음이 달려가서 충만해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녀도 예수님 아래에 있는 만물 중의 하나입니다. 자녀를 푯대 삼았다면 마음은 더 이상 예수님을 믿는 상태가 아닙니다. 땅의 것을 생각한다면 마음이 땅을 항해 충만해졌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생각이 내려와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생각 속에 담기게 됩니다.

땅의 일에 대해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땅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것들을 마음에 담을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 토끼를 붙잡고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내려와서 내 생각과 몸을 움직여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땅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땅의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려는 나를 십자가에서 계속 죽여야 합니다. 땅에서 기쁨과 만족을 바라는 것은 곧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고 천국 시민권을 놔버렸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의식은 십자가라는 토끼를 잡는 사냥개가 되어야 합니다. 의식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내 마음이 떠난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관심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내 생각과 몸을 움직여나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토끼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사냥개와 같은 의식이 되게 해주심으로 하늘과 땅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내는 기가 막힌 사냥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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