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골로새서-2

녹취문: 이단과 구분되는 경계, 소망 믿음 사랑_태승철(골 1:1~1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2.09|조회수6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단과 구분되는 경계, 소망 믿음 사랑>의 줄거리 :

골로새 교회는 종교적 혼합주의와 이단으로 인해 복음과 신앙이 위협받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골로새서를 기록하십니다. 그래서 편지의 서두에 벌써 이러한 혼합주의와 이단 사상에 대해 복음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지키기 위한 경계를 그어주십니다. 그 경계가 바로 소망과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과는 조금 다른 이 올바른 생각의 경계를 살펴봅니다.

 

이단과 구분되는 경계, 소망 믿음 사랑

 

(골로새서 1: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우리는 흔히 믿음, 소망, 사랑을 하나로 묶어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은 본문과 연관하여 소망, 믿음, 사랑에 대해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이 지역은 지금의 튀르키예인 소아시아 지역 내륙에 위치한 곳으로써, 서쪽으로 에게해에 맞닿아있던 에베소에서 내륙으로 160km 정도 동남쪽으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 주변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 등이 있었는데, 당시 골로새에는 동서를 잇는 큰 도로가 있었기에 꽤 발전했었다가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가 발전하면서 상대적으로 쇠락하고 위축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넘게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골로새에 살던 에바브라를 만나게 됩니다. 앞서 빌립보서에서 등장하였던 ‘에바브라디도’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에바브라는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게 되었고 골로새에 와서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이후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갇히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에바브라는 소아시아에서 로마까지 불원천리 찾아와 골로새 교회의 상황을 알립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는 이단사상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라에게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고, 이것을 염두에 두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기에 골로새서 내용 전체는 이단과 혼합주의로부터 복음과 신앙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골자를 이룹니다.

 

이단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지만 혼합주의라는 말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혼합주의는 순수한 복음의 진리인 십자가 복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앙체계에 다른 요소를 혼합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혼합주의적 성향은 2,000년 교회사를 관통해서 지금까지도 만연하고 있습니다. 꼭 이단으로 규정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인본주의, 실용주의, 도덕주의 같은 철학적 사상이나 문화적 경향을 결합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문화적 경향이라 함은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무속의 기복주의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불교의 수련과 고행 같은 것들이 로마 가톨릭의 수도원 주의와 비슷하게 여겨지면서 교회 안에서 명상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신비주의, 자유주의, 종교다원주의 등으로 혼합이 일어났고 계속해서 이단이 발생해왔습니다. 이러한 혼합주의는 이단이 생기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합주의는 특정한 사상이나 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합 상태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갈 때 이단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혼합이 나타나는 이유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세상이 깊이 침투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마음 채움꺼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세상에 머무는 상태입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깊이 침투하여 장악해버립니다. 쉽게 말해 세상에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면 세상의 가치관이 혼합된 상태에서 복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정통 교단에 속한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 그 누구도 이단이라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 개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세상이 침투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복음을 상대하고 다루고 전할 때에는 표면적으로는 이단이 아닐지라도 혼합주의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혼합주의적 상태의 문제점은 복음이 열어주는 영적 세계에 대한 사실들에 대해 우리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정확하게 상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였을 때 열리는 영적 세계의 사실들이 제외되고 망각되고 왜곡되기에 결과적으로 복음에 대해 멋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이단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입니다. 결국 이단도 혼합주의도 일종의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에 퍼지고 있던 이단 사상들 중에는 유대 율법주의, 영지주의, 금욕주의, 천사숭배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혼합을 막고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골로새 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를 시작하는 첫머리에서부터 이것에 관심을 두고 생각을 지켜내야 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단적 생각으로부터 복음적으로 생각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것을 해나가기 위한 일종의 경계이자 기준을 제시합니다. 울타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경계 안에서 생각이 움직일 때 복음에 합당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이 경계 밖으로 이탈한다면 혼합주의적 위험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방치된 혼합주의는 결국 이단사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단이라는 단체에 속해야만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 정통교단에 속해있을지라도 얼마든지 이단적 사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솔직하게 느끼는 바대로 말씀드리자면 거의 80~90%가 이단적 사상을 알게 모르게 유지한 채로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복음적 생각의 울타리 밖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단과 구분될 수 있는 복음적 생각의 경계이자 울타리로 바로 소망과 믿음과 사랑을 제시합니다. 4절을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믿음과 사랑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절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5절을 연결시켜 보면 믿음과 사랑은 소망으로부터 생기고, 소망은 바로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순서대로 나열해보자면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소망이 생기고 그로부터 믿음과 사랑이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곧 십자가의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으면 마음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소망이 실제로 채워지는 과정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익숙하게 여겨왔던 믿음, 소망, 사랑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소망에 이어서 믿음과 사랑이 나타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소망이 특히 강조된 이유는 소망이 복음적인 생각을 지켜나가며 이단으로부터 구분되고 극복하기 위한 생각의 경계이고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단은 잘못된 믿음의 확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들은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하기에 믿음을 가지라는 말에 대해서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일단 믿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 나타나는 일을 통해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쳐주고자 합니다. 믿음의 다음 단계는 바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앞으로 살펴볼 골로새서 3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살리심을 받았다는 표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골로새서를 기록하던 사도 바울의 생각의 위치가 어떤 지점에 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예수를 바르게 믿었으면 나타나야 하는 소망의 단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다는 믿음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로부터 이단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소망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은 하늘에 머물게 됩니다. 마음은 공백이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로 채워지고자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바람이 바로 소원이고 소망입니다. 무엇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루었으면 좋겠다, 채웠으면 좋겠다고 여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믿음이 온전하다면 소망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절대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을 향한 소망이 존재하는 상태라면 애초에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모든 생각과 사상은 이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이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하늘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가지고 싶고 채워지고자 하는 대상이 이 세상 안에 있음을 조장하거나 인정하는 생각과 설교와 사상은 무조건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면 세상에 대해 바랄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소망이 남아있다면 이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소망을 강조한 이후에 다시 믿음을 언급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채움의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 채움을 위해서 무엇을 바라느냐가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돈은 이 사람의 믿음의 대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건강이나 자녀의 형통이 믿음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바라는 모든 대상에게는 좋음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좋음이란 가질 때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돈이 좋다고 하는 이유는 돈을 가지면 내 마음이 채워진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좋다고 하는 이유는 건강하면 만족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고, 승진이 좋다고 하는 이유는 승진하면 만족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좋음에 대한 확신이 믿음의 이유입니다.

한편 하늘에 소망을 둔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만을 좋음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유일한 존재감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생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비가 내려도 하나님이 내리게 하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녀가 말썽을 부려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가운데 일어난 일로 여겨집니다. 모든 생각의 출발점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믿고 천국이 현실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소망은 하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좋음에 대한 생각과 연관되어서 가려지는 복음적 생각과 이단적 생각의 경계입니다.

설령 당장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있음이시고 좋음인 것을 믿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생각으로 이 사실을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럴 때 이단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고 혼합주의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내가 아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심을 온전히 믿지 못하더라도,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과 좋음이라는 사실을 붙잡고자 할 때 이단과 구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예배당에서 목사님이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가정도 편안하고, 사업도 잘 되고, 하는 일마다 잘 됩니다.’라는 말씀을 전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얼핏 이러한 말씀은 잘못된 점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망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가정의 편안이고, 사업의 형통이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혼합주의에 빠진 이단의 상태입니다. 한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다면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복음적 좋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늘을 향해 소망하는 사람은 하늘에 있는 것만을 좋게 여깁니다. 땅에 있는 것을 좋다고 믿지 않습니다. 직접적이든 은근히든 땅의 것을 좋음의 대상으로 믿는다면 혼합주의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아무리 정통 교단의 목사님이라도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면 이단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배당을 잘 지어서 하나님께 바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했다면 이미 그 목사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는 예배당을 지어야 좋다는 믿음이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혼합주의적 상태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당의 간판이 정통 교단이라고 해서 생각까지 정통은 아닐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소망을 확인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그 소망이 하늘을 향해 있어야만 그 믿음 또한 올바른 믿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하늘을 향해있는 사람은 더 이상 기쁨과 만족 거리를 이 땅에서 찾지 않습니다. 소망이 하늘에 있는 사람이라면 좋음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오직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지금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관한 이야기만 해야 맞습니다.

믿음은 좋음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늘을 향해 소망을 가진 자는 하늘에 있는 것만을 좋다고 믿습니다. 땅에 있는 것을 좋다고 믿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좋음에 대한 믿음의 기미를 보인다면 그 사람은 혼합주의의 길에 들어선 것이고, 이단의 성향과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성도에 대한 사랑을 언급합니다. 하늘을 향하는 소망으로부터 하늘에 있는 것만이 좋다는 믿음이 생겼다면, 마음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좋음은 온통 하늘에 다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람을 만날 때 반드시 만나는 상대방만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믿음으로부터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사람이 내게 좋음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에, 상대방에게서 마음의 채움 거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만나는 상대를 주인공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 상대가 주인공이기에 그 사람을 위해서 생각하고 감정이 움직이고 의지가 움직이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끌어당기지 않고 발산하는 사랑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소망이 하늘로 간 상태에서 오직 하늘 것만이 좋다는 믿음을 유지한 채 사람을 향하여 사랑만 하게 됩니다. 소망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따라가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믿음은 하늘 것만을 좋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늘 것만을 좋다고 여기기에 땅에서는 좋음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땅에서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 상대를 위해서만 생각하는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9~12절에서는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기도가 이어집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하늘 것만이 좋다는 믿음과 땅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소망, 믿음,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골로새 교인들의 생각이 머물 때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에 대한 기도가 이어집니다.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소망은 하늘을 향한 마음의 방향입니다. 이 소망에서 하늘 것만이 좋다는 믿음이 확신으로 이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하늘만 좋기에 땅에서는 좋음을 구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덕과 좋음을 끼치려는 사랑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 소망과 믿음과 사랑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모든 혼합주의와 이단사상으로부터 지켜낼 것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세상이 침투되어 들어온 나 자신이 죽었다는 고백을 견고히 유지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그로부터 이어지는 소망과 믿음과 사랑 안에서 여러분의 생각이 머리털만큼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소망과 믿음과 사랑을 울타리 삼게 하시고, 언제 어디서든지 조금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