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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관계, 새사람끼리 하기 외인과 하기>의 줄거리 :
십자가를 통해 마음에서 육체를 벗어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가 새사람입니다. 이런 새사람은 오직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삽니다. 이럴 때 나는 새사람으로서 다른 새사람을 대할 때나 외인을 대할 때나 사위일체의 이 땅에서의 대표로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사위일체를 이룬 새사람이 다른 새사람을 관계하기와 다른 옛사람을 관계하기는 양상이 아주 다르게 나타납니다.
관계, 새사람끼리 하기 외인과 하기
(골로새서 3:18~4:6)
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5.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사도 바울은 앞서 에베소서 5장 22절에서 6장 9절을 통해 인간관계 중에서도 특별히 가족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본문 3장 18절에서 4장 1절의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한편 이어지는 4장 2~6절에는 ‘외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외인에 대한 부분에 집중해서 말씀을 살펴볼 것입니다. 여기서 외인이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4절을 보면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고 하였고, 6절에서도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으로부터 외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새사람끼리 관계하기, 새사람이 외인과 관계하기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읽지 않은 3장 18절~ 4장 1절에서는 부부관계, 부모 자녀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가 언급됩니다. 골로새서에는 가족관계를 새사람끼리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새사람과의 관계는 에베소서에서도 이미 언급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 복종할 것을 권고한 후에 가족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을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였고, 25절을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만을 보면 부부관계에 한정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교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교회를 이루었다면 이러한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녀가 교회를 이룰 때 나타나야 하는 모습을 가르쳐줍니다.
한편 골로새서는 이단과 사이비와 신앙적 오류를 염두에 두고 쓴 글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새사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좀 더 확고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위일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해석해봅니다. 본문의 전반부에는 관계의 대상자가 모두 새사람일 경우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모두 새사람일 경우의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가 모두 새사람일 경우의 부모 자녀 관계, 종과 상전이 모두 새사람일 경우의 종과 성전의 관계가 언급됩니다.
당시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보면 거의 이러한 관계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예배당 모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 가정에서 몇몇 세대가 함께 모이는 식의 교회였습니다. 그렇게 몇몇 세대가 모일 때 보이는 관계는 부부관계, 부모 자녀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 정도로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새사람이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육신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는 육신을 통해 만나게 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 반응하면서 말하고 행동하지 않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마음에서 육신을 잘라낸 사람입니다. 그리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사위일체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24시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독대하는 새사람의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5절에서 언급되는 옛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외인입니다. 옛사람은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할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 마음이 육신과 붙어있는 상태에서 반응하며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새사람은 언제나 각자가 맺는 사위일체의 대표자로서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사위일체를 이루고 새사람의 상태를 유지한다면 몸은 사위일체의 독특한 단위의 대표자가 되어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둘 다 새사람이라면 남편은 남편대로 사위일체를 이룬 새사람의 상태에서 아내를 대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사위일체를 이룬 새사람의 상태에서 남편을 대합니다. 사위일체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대변하는 자로서 서로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 자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꺼번에 뭉쳐서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자 사위일체를 이루고, 아들과 딸이 사위일체를 이루고 각자가 이룬 사위일체 속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일에 대하여 대표자로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각자 사위일체를 이룬 사람이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참여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종과 상전이 서로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게 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3장 18~19절을 보면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복종하고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아내와 남편이 모두 새사람이라면 각자의 안에서 일어나는 사위일체의 상황이 서로에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자 사위일체를 이룬 삼위일체 하나님은 같기 때문입니다. 남편이라는 위치와 아내라는 위치에서 동시에 참여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뜻을 서로를 통해 전해주시기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 자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이러한 새사람끼리의 관계는 가족이 아닌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도 적용됩니다. 22절을 보면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고 4장 1절에서는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종과 상전이 각자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룬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어떤 일이 생긴다면 종은 상전에게 복종하고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전의 권력에 고개 숙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위일체를 이룬 주인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전해주신다면, 종 또한 사위일체를 이룬 자로서 그 뜻을 주인과 함께 이루기 위해서 복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전은 상전대로 종에 대해서 언제나 의로움을 드러내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새사람끼리의 관계만을 갖는 경우는 드뭅니다.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부관계를 보자면 사위일체를 이루어 새사람인 아내와 옛사람이자 외인인 남편이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새사람인 남편과 외인인 아내가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로가 사위일체의 대표자가 되어 살아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앞선 두 경우에 비해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모 자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새사람인 부모와 외인인 자녀의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자녀는 새사람이 되었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외인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는 현대에서는 직장에서 발견됩니다. 사장님도 새사람이고 직원도 새사람인 경우는 참 보기 힘듭니다. 사장님이 사위일체를 이룬 새사람일지라도 직원은 외인일 경우가 있고, 직원은 사위일체를 이룬 새사람일지라도 사장님이 외인일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기도 요청이 나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외인들과 관계를 해나가야 하는 자신을 위해 골로새 교인들도 기도해달라는 내용입니다. 다만 이 말씀은 단순한 요청이 아닙니다. 5~6절의 내용을 보자면 새사람으로서 외인과의 관계에서 보여야 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룬 새사람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 중에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새사람으로서 로마인이라는 외인들과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리스도의 할례도 모르며 새사람도 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땅히 해야 될 말을 할 수 있도록 골로새 교인들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전도할 문’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부분을 원문으로 보면 ‘말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외인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말해야 될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정이나 생업이 없었으나,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가정이 있었고 생업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있기에 전도할 문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외인을 만날 때 취해야 될 기본적인 태도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외인’이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삼위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사위일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이 로마인이든, 배우자든, 자녀든, 직장 상사든, 친구든 애인이든 드러나야 할 태도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5절을 보면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외인은 마음이 육신을 따라가서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음란과 더러움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분노와 노여움과 악의와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로 나타납니다. 새사람이 등진 상태를 아무런 반성 없이 주저앉아 머물러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날 때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세월은 수직의 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카이로스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생각이 지금 이 순간 내게로 내려와서 이루어지는 때를 의미합니다. 새사람은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뜻이 나를 통하여 이 땅에 직접 개입해 들어오는 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새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생각과 뜻과 계획을 수직으로 받아서 말하고 행동하며 이루어가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다만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어쩔 수 없이 옛사람이자 외인인 사람들과도 만나고 관계를 가져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대상은 배우자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으며 이웃이나 직장 상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동에서 우리는 자극을 받아 반응하게 됩니다. 선동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 앞에서 지금 하나님이 나를 통해 말하고 행동하도록 준비하신 일들은 막힙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막히고 허비되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십자가로 육신을 잘라내고 마음이 부활해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만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몸은 성령님의 장갑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외인은 이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이러한 외인이라면 새사람인 아내는 자극을 받고 선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극과 선동에 넘어가서 말하고 행동하면 위로부터 내려오는 카이로스의 시간은 막히고 허비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외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을 알고 계시기에 내가 해야 될 말과 행동도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사람을 파악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말하고 반응하지 않아도 됩니다. 새사람은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육신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는 십자가로 잘라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께 지금 만나는 외인에 대해 해야 될 말과 행동을 묻는 자들입니다. 이 태도가 바로 지혜입니다. 이것이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우리는 외인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묻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 지금 제가 대면하는 이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됩니까?’라고 묻는 마음을 가질 때 외인들의 영향력은 차단됩니다. 그리고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면 지금 몸으로 마주하는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할 필요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내 기쁨과 좋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직면하게 되는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설령 대면한 사람이 나를 원수처럼 취급하더라도 이 외인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행함으로써 카이로스의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를 원수처럼 취급하는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 앞에서 내가 해야 될 말과 생각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내려와서 나를 통해 나타날 때 카이로스의 시간은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낭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묻는 지혜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아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누구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묻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 사람을 만나서 말하고 행동해야 될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우호적으로 대한다고 해서 마음에 받아들일 일도 아니며, 원수처럼 대한다고 해서 마음에서 거부할 일도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고 계심을 믿으며, 그 사람에 대해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해야 될 말과 행동을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묻는 마음가짐으로서의 지혜이고, 이러한 간구를 잊지 않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지혜의 태도입니다.
세월을 아끼면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자는 외인의 말과 행동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마주하는 대상이 배우자든 자녀든 직장 상사든 외인은 나 스스로 반응해야 될 필요가 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그들에 대한 말과 행동은 하나님을 통해 오는 지시로 이루어져 나가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외인이면 배우자든 자녀든 부모든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외인은 내가 반응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일이 아닙니다.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마찬가지이며,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전문가이든 몰상식하든 그들이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외인이라면 우리의 말과 행동을 유발시키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내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옛사람의 모습을 유지하는 외인들의 말과 행동에 따라 움직인다면 생각과 마음은 버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으로서의 외인의 특징은 사위일체를 이루지 못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무시하는 상태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무시하는 상태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개 짖는 소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설령 나를 칭찬하더라도 진정한 칭찬일 수 없고, 나를 거부하고 원수 취급하고 손해를 끼치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손해일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내 길로 갈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10장 19~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과 동일한 의도의 이야기를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이 로마의 외인들을 만날 때도 이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 6절을 보면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외인을 만났을 때 마땅히 해야 될 말을 알기 위해서는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을 은혜 가운데서 하라는 표현이 다소 어렵습니다. 주석 학자들은 말을 은혜롭게 해야 한다,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말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은혜가 무엇인지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은혜(恩惠)는 말 그대로 공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말을 은혜 가운데서 하라는 것은 내 인격 속에서 발생하는 말이 아닌, 내 인격 외부로부터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말을 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소금으로 맛을 냄에 비유했습니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이 맛이 없습니다. 외인과 만남이 유효하고 열매있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음식에 소금을 뿌려 간을 맞추듯이 내 말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은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인격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인격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말이란 마주하고 있는 외인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선동되어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모든 외인을 향하는 말은 외부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말이어야 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카이로스의 말이 되어야만 합니다.
은혜는 주님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24시간 주야장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을 24시간 독대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24시간 독대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사위일체를 꿈꾸지도 못하는 외인들을 만날 때 그들의 말과 행동에 반응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들 앞에서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 카이로스 시간을 살게 해주심으로써 조금도 아버지와 생각과 뜻이 허비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항상 기도와 이 다짐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배우자가 외인일 수 있습니다. 자녀가 외인일 수 있습니다. 집 밖에서 만나는 사람 대부분은 외인일 것입니다. 외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말과 행동에 자극받고 선동되어 반응하지 않기 위해서는 새사람의 상태를 유지해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은혜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말과 행동을 해나갈 때 모든 외인과의 관계는 소금으로 간을 한 음식 같을 수 있습니다. 새사람으로서 맺는 모든 외인과의 관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맛있는 관계가 되고, 그런 관계로 채워지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유지하며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보좌 우편까지 따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독대함이 24시간 지속되는 가운데 외인을 만날 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땅한 말과 행동만을 하게 하시고, 온전히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꽉 채워지는 튼실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