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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나무가 중앙에 선 인간 동산>의 줄거리 :
온갖 사상으로 혼합된 이단과 사이비를 경계하라는 권고의 취지를 담은 골로새서가 많은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면서 마무리됩니다. 가는 곳마다 십자가를 전한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들이 동산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종파도 조직도 없이 오직 십자가에서 시작하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하나를 공통점으로 묶인 인간 동산입니다.
십자가 나무가 중앙에 선 인간 동산
(골로새서 4:7~18)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8.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입니다. 이 중에서 빌레몬서는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쓴 편지입니다. 빌레몬서를 제외하면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로마와 에베소와 빌립보와 골로새를 비롯한 각 지역에 흩어져있는 교인들이 하나로 묶인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옥중에서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에 편지를 보냄으로써 흩어져있는 각 지역 교회들이 실은 하나의 교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옥중서신이 아닌 고린도,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서신도 포함됩니다.
사도 바울이 한 일은 각 지역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을 전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에 이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모든 진리의 기준임을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24시간 마음을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흐름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로 이어질 수 있었고, 사도 바울 안에서 활성화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그가 만나 복음을 전한 사람들 속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흑암으로 덮인 세상에서 각 지역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고 24시간 마음의 흐름이 활성화되는 상태를 유지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사도 바울 주변에 숲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이 ‘십자가 나무가 중앙에 선 인간 동산’이라는 제목의 의미입니다.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선악과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선악과나무가 중앙에 선 에덴동산’이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십자가 나무가 중앙에 선 인간 동산’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인간 동산을 이루었던 사도 바울의 주변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신의 마지막에는 주변인들에 대한 안부 인사가 이어집니다. 이러한 형식적인 내용들 속에서 특정한 메시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다소 특별합니다. 반복하여 말씀드렸듯이 골로새 교회는 사이비, 이단, 온갖 세상의 가치와 풍조가 섞인 신앙적 오류로 인해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혼합주의와 섞일 수 없는 온전한 복음과 진리와 교회에 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리고 서신의 마지막에서 이러한 온갖 혼합주의 속에서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고 있었던 사도 바울 주변 인물들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가 한 번씩이라도 그분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예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7~17절까지 언급되는 이름들은 우리의 영적인 조상들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의 존재 의미가 묻힐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특별히 7~17절까지 언급되는 모든 이름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24시간 활성화시키며 살았던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각자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이식받아 인간 동산을 이루게 된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한편 본문의 마지막 18절을 보면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생각하는 것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왜 은혜가 된다는 것일까요?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로마는 당시 어마어마한 판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로마제국의 수도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사도 바울을 로마 감옥에 붙박이로 두신 바람에 제국의 중심에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나님과 마주하고 계시기에, 우리의 마음이 육의 몸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입을 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만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럴 때 땅에서는 마음이 떠난 몸을 성령께서 장갑으로 끼시고 움직이시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의 기능과 몸을 성령께서 움직이시며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이식시켜주고자 하였습니다. 오직 십자가로만 일상생활을 해나가도록 전도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사도 바울이 로마제국의 수도에서 붙박이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붙잡혔으나 결과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중심에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우뚝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에 담긴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국의 수도인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사도 바울의 마음은 끊임없이 십자가를 시작으로 하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제국의 수도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세워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도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기억되고 의식되기를 바랐습니다. 각자의 마음에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이 로마제국의 판도 내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세우고 있듯이, 골로새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마음이 하늘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활성화된 상태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의 마음이 흑암에 덮인 세상 속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하나의 빛줄기가 되어서 끊임없이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바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경륜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퍼지고, 사도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진 로마제국 내의 모든 교회와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끊임없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그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감옥이라는 환경에 반응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따라 끊임없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음을 전해 듣게 됩니다. 로마의 모든 지역에서 마음에 십자가 씨앗이 뿌려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는 일들이 일어나게끔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이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이라는 범위 안에 사도 바울이 갇힌 로마시가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을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데살로니가,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등의 지역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사도 바울이 직접 전도해서 세운 교회도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가 사도 바울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해 듣고 세운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로마제국의 판도 내에서 각 사람이 자기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빛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빛줄기가 로마제국 곳곳에서 빛나며 하늘을 향해 이어지게 된 형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고 하는 우리가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서 이단사상, 사이비, 신앙적 오류를 잘라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강조합니다. 앞서 본 2장에서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마음이 육체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육체 때문에 맺게 되는 모든 관계를 벗어버림을 가리킵니다. 그 대상이 배우자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몸으로 해야 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관계를 마음에서 잘라내고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어지는 3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위의 것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 곁에 계시는 하나님과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사람에게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이고 유일한 바람입니다.
이로부터 이 땅에서는 새사람의 삶이 시작됩니다. 10절을 보면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새사람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또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갈 때 이 땅에서는 몸이 성령의 장갑으로 움직이면서 새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마음에서 몸이 잘려 나가는 그리스도의 할례가 이루어지고 나면 마음은 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위의 것을 찾게 됩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유일한 있음으로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유일한 욕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럴 때 이 땅에 남아있는 몸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새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기준이 되어서 어느 하나라도 벗어남이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할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거나 주저한다면 그것이 이단이고 사이비이며 신앙적 오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으로 간구하면서 24시간 하나님을 소망하고 어떤 대상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우선시함은 이단과 사이비와 신앙적 오류를 갈라내는 기준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몸으로 살고 있는 세상에서 새사람의 모습이 나타나느냐가 기준이 됩니다.
정리해보자면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마음과 육체를 십자가에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분리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바라며 추구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 땅에서 새사람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이루면서 사도 바울 주위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자기 것으로 삼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 주변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참으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언급된 사람 중에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의사 누가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 바울을 교회로 인도하여 열두 사도에게 소개했던 인물로서, 회심한 이후 사도 바울의 멘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바나바의 조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마가를 언급하며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첨언을 한 이유는 이전의 행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가는 여정을 견디지 못하고 도중하차하게 됩니다. 이에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 때에 다시 마가를 불러 동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때 사도 바울은 반대하였고 바나바와 갈등을 겪고 헤어지게 됩니다. 이후에 마가는 스스로 뉘우치고 사도 바울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마가를 다시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만 마가가 1차 전도여행에 중도하차했다는 소문은 이미 퍼져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 마가를 감싸줍니다. 마가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를 것을 분명히 표명했기에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서 편견을 갖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추측됩니다.
이러한 마가는 이후에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한편 누가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의사였던 누가는 이후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들의 기록은 사도 바울의 서신 못지않게 중요한 신약성경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사도 바울 주변에서 인간 동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두기고, 오네시모, 아리스다고, 유스도, 에바브라, 아킵보, 눔바 등도 신앙적으로 사도 바울 주변에서 인간 동산을 이루게 됩니다. 이들은 각자 생전에 서로를 알지도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같은 신앙의 인간 동산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붙잡고 교회 생활을 열심히 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요즘 같은 교회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눔바라는 여인이 언급되는데 이 여인의 집에서 모이던 사람들이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당시의 교회를 생각할 때 지금 같은 예배당 중심의 조직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이해로는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조직도 없고 종교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십자가로 일상생활을 해나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의 의미에서 예배당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하나만 붙잡고, 십자가 하나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마가는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고,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 쓴 서신들과 사도 바울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기록한 신약성경을 합치면 16권에 달합니다. 27권의 신약성경에서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한 일, 사도 바울과 관계된 이들이 한 일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전한 것도 십자가뿐이었습니다. 그 십자가 복음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시작점입니다. 이것을 놓친다면 신앙은 올바르게 성숙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 다시 말해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는 것은 육체로 관계하는 모든 대상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사건이든 잘라내고 마음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의 몸을 입은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게 됩니다. 눈앞에 누가 있든지 하나님의 존재감을 우선시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울 주변에서 인간 동산을 이루고 있다가 마가와 누가 같은 신앙의 위인들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두기고는 에베소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전달하였으며 사도 바울과 동역하다 순교하게 됩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살던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을 등지고 로마에 가서 숨어 살던 중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통하여 십자가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 이후에 오네시모는 회심하였고 사도 바울은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함께 골로새로 보냅니다. 그러면서 오네시모를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고 합니다. 도망친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세간의 평가로는 신실한 사람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골로새로 돌라온 오네시모는 주인이었던 빌레몬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당시에는 그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망갔던 종과 주인이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형제가 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종과 주인의 사회적 격차는 도무지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오네시모는 주인을 피해 도망갔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되자 도망갔던 종과 주인이 한 형제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10~11절을 보면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가 언급됩니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이나 할례와 같은 구약의 잔재를 씻어내지 못한 자들이 다수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는 사도 바울과 똑같이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진리의 기준으로 붙잡고 삶의 현장 어디에서든지 활성화시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11절에서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었으나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는 에바브라가 언급됩니다. 아시다시피 에바브라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는 삼각 지형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에바브라는 십자가를 이식받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세 도시에 복음을 전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는 사도 바울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이식되어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한 이후로 유대 종교에 속해있을 때 가졌던 모든 인간관계가 다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방을 돌아다니며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이식하였고 결과적으로는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사도 바울의 행적은 사도행전에도 구체적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추측될 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일시적으로 풀려난 후에 현재 스페인인 서바나 쪽으로 전도를 한 후에 돌아와서 다시 감옥에 갇히고 순교했다고 합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로마 감옥은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의 마지막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사역은 오히려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더 크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복음을 전했던 모든 지역의 교회들이 로마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생각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 속에서 24시간 활성화되고 있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각자 자기 속에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중심에 선 상태에서 인간 동산을 이루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4절을 보면 누가와 데마를 묶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디모데후서 4장 10~11절에서도 누가와 데마가 함께 언급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렸다는 표현으로부터 십자가를 통하여 마음에서 육신을 잘라내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반복함에 실패하고 말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마음이 육체가 만나는 세상 쪽으로 빨려 들어갔음을 가리킵니다. 가족에게 빨려 들어갔든지, 일에 빨려 들어갔든지, 육체로 만나는 어떤 대상이나 사물에 빨려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할례를 통해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일에서 실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데마와 누가를 묶어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오직 십자가를 붙잡는 자신처럼 되기를 바랐습니다. 곳곳에 흩어져있는 교인들이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의 흐름을 24시간 유지하며 하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동역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골로새서를 마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자신을 생각하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 속에 담긴 취지와 애틋한 염려와 사랑을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2000년의 간격이 있지만 오늘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십자가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마음이 하늘에 머물게 하시고, 이 땅에서는 새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십자가 나무가 중앙에 선 인간 동산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