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정통 교인의 예수님 생각 법 (上)>의 줄거리 :
이단이나 사이비와 구별되는 정통 교인의 예수님 생각 법이 따로 있습니다. 이 베이식한 예수님 생각 법이 확실하고 견고하지 못하면 그 위에 아무리 많은 신앙적인 지식을 쌓아도 실제로 아무런 영적인 유익이 없습니다. 예수님 생각의 출발점은 '그리스도인'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내가 속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모든 예수쟁이는 다 이단이 됩니다.
정통 교인의 예수님 생각 법 (上)
(골로새서 1:13~17)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에바브라에게 골로새 교회의 상황을 전해 듣고 기록한 서신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각종 이단사상에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이단사상에 대처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새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교인 각자가 정통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고 강력하게 갖게 됨으로써 이단을 물리칠 수 있는 면역력을 갖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살펴볼 13~23절까지는 정통 교인이 예수님에 관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지식들과 생각법이 설명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기본적이지만 무척 중요하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을 상하로 나누어서 말씀드리되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주일날 저녁에 십자가 온라인 교회에서 추가적인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통 교인이 생각해야 될 첫 번째 사항은 흑암의 나라와 빛의 나라의 차이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흑암의 권세’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대조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흑암의 나라’와 ‘빛의 나라’로 표현해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히 밝혀줍니다. 특히 이단의 위협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생각하는 방식은 정통(正統)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올바른 계통이 되어야 합니다. 정통 교인이 될 수 없다면 아무리 예수님을 불러도 혹은 정통 교단에 속해있어도 이단으로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빛의 나라로 옮겨지지 못하고 흑암의 나라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함은 흑암의 나라로부터 빛의 나라로 옮겨짐입니다. 빛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해서 육체적으로 세상을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의 나라는 흑암의 나라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8장 23~2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으로부터 세상에 속함이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빛의 나라를 염두에 두자면 흑암이 지배하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는 마치 대사관과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광화문에 가면 미국 대사관이 있습니다. 미국 대사관은 한국 땅에 있지만, 미국의 영토입니다.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에서 살아가지만, 미국의 지시를 따릅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황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하늘에서 전달되는 방식을 따라서 삽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라는 흑암의 나라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빛의 나라인 아들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물리적, 환경적으로 울타리를 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입니다. 이들은 세상 속에서 울타리를 치고 구별을 시도하지만, 모조리 이단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깊이 세상에 속하는 탁월한 방식입니다. 세상에서 내 영역을 갖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속한 아들의 나라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사도 바울의 행적에서 잘 드러납니다. 우리는 로마서로부터 시작하여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 이어 골로새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떤 서신에서도 삶의 현장을 떠나서 별도의 울타리를 만들라는 지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명확한 지시가 아니더라도 그러한 암시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영역의 울타리를 치는 자들은 절대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 속하기 위하여 더욱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흑암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동기와 어떤 과정과 어떤 역사적 전개를 통하여 기독교 종교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 개신교를 지배하는 편만한 방식은 개교회(個敎會) 주의입니다. 지역의 예배당을 중심으로 내 교회, 우리 교회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근원을 따지자면 이단입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의 의식을 예배당 조직에 가두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해서 자기의 몫을 가지려는 탁월한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생각하는 교회는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여 세상에 대해 울타리를 치고 내 몫, 우리 몫을 챙기려는 의도가 있는 교회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교회가 공인된 이후로 지배되어 온 예배당 중심의 조직체는 계속해서 강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단입니다. 저 또한 조직에 속해 있었기에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라고 하였습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은 우리가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흑암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흑암의 나라 속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아들의 나라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흑암의 나라는 상징적이고 시적인 비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생활해나갈 때 흑암의 나라에 속했다면 구체적인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흑암은 빛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의 마음에 대해 빛이 없는 깜깜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 유일한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에 빛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은 타자의 있음을 느낌으로써만 자기의 존재 근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외의 타자의 있음을 의식하고 존재감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채워지기 위하여 좋음을 추구하고 욕구합니다. 이러한 좋음을 추구하기 위해서 주체성이 발동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고 주체성이 발동하는 상황에서 빛이 필요합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에 대해서 빛이고, 좋음으로 채우고자 하는 욕구에 대해서 빛이고, 주체성이 필요한 상태에 대해서 빛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빛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의 성분을 분석해보자면 세 가지 색깔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일한 있음이라는 색깔입니다. 두 번째는 유일한 좋음이라는 색깔입니다. 세 번째는 유일한 주체성이라는 색깔입니다. 물감의 삼원색을 합치면 검정색이 되지만, 빛의 삼원색을 합치면 하얀색이 되듯이 하나님의 색깔은 우리에게 빛이 되십니다. 이는 마치 변화산에서 하늘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을 묘사할 때 마가복음 9장 3절에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라고 표현한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여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빛에 대해서 단절되었습니다. 이렇게 빛이 없는 상태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에 세상을 흑암의 나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받아들이는 곳이 아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체성이심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엄연한 사실에 대해 맹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의식과 욕구와 주체성이 차단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흑암의 나라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빛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은 교리로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예배당에 출석해서 예배드리고 성경 공부를 하는 교인들은 모두 교리로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빛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흑암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대표적 사건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8장 24~25절을 보면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풍랑만을 보고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풍랑에 앞서 하나님을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풍랑은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건강의 풍랑, 재정의 풍랑, 가족 문제의 풍랑, 승진 문제의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풍랑에 앞서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에 대해서는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이 흑암 속에 머무는 상태였습니다. 똑같은 현장 속에서 제자들은 흑암의 나라에 있었고 예수님은 빛의 나라에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흑암의 나라에 속해 있었기에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임에도 반영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체성이 그대로 들어와 반영되고 있었기에 제자들과는 다르게 깊이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의 빛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과 행동에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 늘 반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정통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속함은 결코 예배당에 출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상명세서 기독교란에 체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목사, 장로, 권사라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 유일한 좋음, 유일한 주체성이라는 사실이 생각과 말과 행동에 반영되는 사람이야말로 이단과 구분되는 정통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서는 풍랑 속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정통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흑암의 세계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의 빛이 비취지 않는 맹인들의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속하신 빛의 나라에 속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같은 배에서 같은 풍랑을 만났을 때 빛의 나라에 속함과 흑암의 나라에 속함이 대비되어 나타났듯이,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빛의 나라,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속한 자들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정에 있을 때, 직장에 나갈 때, 흑암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 속에서 아들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들의 나라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흑암의 나라에 사는 이유는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의 빛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통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14절을 보면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죄와 속량이 언급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죄란 흑암의 나라인 세상에 속함입니다. 그리고 속량은 건져내는 것입니다. 이 흑암의 나라로부터 건져내는 것입니다. 죄에서 건져냄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의식하고 반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면 다른 있음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추구하면 다른 좋음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인다면 나의 주체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의식하고, 세상을 추구하고, 나의 주체성을 주장한다면 아들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아닌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흑암의 나라에 살고 있는 상태에서도 마음의 기능은 작동하며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필요로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흑암의 나라에 살고 있는 상태에서는 있음에 대한 의식을 세상의 피조물 중에서 확보하고자 합니다. 좋음에 대한 추구와 욕구도 피조물 중에서 확보하고자 합니다. 주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주체가 되고자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어지는 15절을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그저 외형이 하나님과 닮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본문의 맥락에서는 그 뜻이 다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고, 주체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단절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흑암의 나라에 사는 사람과 아들의 나라에 사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조건은 같습니다. 마음을 갖고 있고, 그 마음은 언제나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고 주체성을 필요로 합니다.
이 똑같은 구조 안에서 아들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빛을 의식하고 욕구하고 주체성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써 형상을 띄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라는 빛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형상을 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고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며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욕구하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이 세상의 삶을 위한 유일한 주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이 우리 눈에 보이도록 오셨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동안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 나의 마음에 들어와서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피조물 중에서 있음의 존재감을 확보하고, 좋음을 욕구할 수 있는 대상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또한 그럴 때 나의 주체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셨음을 강조합니다. 피조물 중에서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회사에 나가면 사장님의 존재감이 제일 강하고, 나라에서는 대통령의 존재감이 제일 강하다지만 세상의 어떤 존재도 하나님이신 예수님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아들의 나라에 속한 자라면 대통령이나 사장님의 존재감에 눌릴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는 배우자의 존재감에 눌릴 수 없습니다. 먼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은 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사람이 된 자들은 예수님 다음에 생긴 피조물의 어떤 것들의 있음과 좋음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참 빛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분석하면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빛이 반영되는 상태에서 사는 사람이 아들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만 흑암의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떠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 반영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시기에 예수님을 바라봄이 곧 하나님을 바라봄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후에 생긴 피조물을 바라보며 그것들에 의해서 존재감과 좋음을 느끼고, 그것들을 얻겠다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살아간다면 흑암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정통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대한 기초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정통 그리스도인의 예수님 생각 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고 그동안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견고하게 들어와 있는지를 돌이켜보고 묵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왕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정통으로 믿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예수님에 대한 생각의 기본적인 방식을 굳건히 숙지하고 익히고 실행할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