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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괴로움 잡아먹는 하늘 괴로움>의 줄거리 :
정통 신앙인이라면 그 증거는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괴로움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갖게 된 하늘 소망으로 인해서 이 땅에 머물러 있음 자체가 괴로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 괴로움의 지속적인 바탕 위에서만 그리스도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 있음이 진정한 효용과 가치를 발휘합니다. 이런 괴로움의 바탕 위에서만 세상 괴로움이 사라지고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가 나옵니다.
세상 괴로움 잡아먹는 하늘 괴로움
(골로새서 1:24~29)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24절을 보면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화법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왜곡된 인격의 소유자라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괴로움은 교회를 위한 사명과 연관돼 있습니다. 또한 이 괴로움은 27절에 나오는 ‘영광의 소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소망 때문에 생기기 때문입니다. 돈이 소망인 사람은 돈이 벌리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건강이 소망인 사람은 몸이 병약해지면 괴로워합니다. 자녀가 일류대학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자녀의 성적이 나쁠 때 괴로워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괴로움 또한 소망과 관계가 있습니다. 24절의 말씀을 풀어보자면 ‘너희를 위하는 마음이 내게 괴로움인 이유는 내가 지금 당장 갖고 있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은 그냥 읽어 넘어갈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제가 감히 생각하기에는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사도 바울의 영적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그 영적인 수준을 고려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본문의 내용은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괴로움은 소망과 연관돼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앞서 살펴보았던 빌립보서의 내용을 떠올려봅니다. 빌립보서는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서신이었습니다. 한편 골로새서는 하늘 소망을 노래하는 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 소망을 노래하는 중에 괴로움이 언급됩니다. 다만 이 괴로움은 하늘을 향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긴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소망에서 생긴 ‘세상 괴로움’과 대비되는 하늘을 향한 소망에서 생긴 ‘하늘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늘 괴로움은 세상 괴로움을 다 없앱니다. 이것은 참 신비한 영적 세계의 원리입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마음의 불편함과 괴로움은 전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생겨납니다. 크게 바라든, 작게 바라든, 순간적으로 바라든, 지속적으로 바라든, 무엇인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마음은 괴롭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에 어떤 사람은 체념하기도 하는데, 이 체념이 하늘 괴로움과 비슷한 형태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체념과 하늘 괴로움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괴로움은 하늘을 향한 소망,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 때문에 생긴 소망에 기인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가게 되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머물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이는 곧 소망의 전환을 가리킵니다. 그동안은 세상 안에서 지금과는 다른 상태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가진 상태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건강이 나쁜 사람은 건강을 가진 상태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진 상태에 도달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바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소망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 지속해서 머물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다만 이 소망은 몸이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괴로움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라기는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도달하고 싶은데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가졌던 하늘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빌립보서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도 바울은 기쁨을 노래하던 중에도 괴로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쉽게 말해 사도 바울은 항상 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범사에 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이 괴로움은 세상 소망이 아닌 하늘 소망으로 인해 생겨난 괴로움이었습니다. 이 하늘 괴로움이야말로 정통 교인의 증거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나 오류에 빠져있는 상태에서는 하늘 소망을 가질 수 없고 괴로워할 수도 없습니다.
정통 교인은 항상 하늘 때문에 괴롭습니다. 쉬지 않고 하늘 때문에 괴롭습니다. 범사에 하늘 때문에 괴롭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을 소망하게 되고 가고 싶은 곳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살아있기 때문에 마음이 온전히 하늘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이러한 상태를 괴롭게 느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빌립보서 1장 23~24절을 보면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는 입장에서 하늘 소망은 이룰 수 없는 소망이 아닙니다. 손에 잡힐 듯 약속된 소망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위한 사명으로 인해 아직 그 소망을 이룰 수 없기에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렇게 하고 싶으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하늘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정통 교인의 삶의 바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은 이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늘 소망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은 우리에게 이상한 현상을 일으킵니다. 하늘 괴로움은 몸이 살아있음 자체에 대한 괴로움입니다. 하늘에 가 있는 것이 소망이기에 몸이 살아있어서 하늘로 갈 수 없음이 원망과 괴로움의 이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이 하늘 괴로움이 그동안 세상에서 느끼던 모든 괴로움을 완전히 사라지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두고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하늘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이 세상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는 사라집니다. 하늘 괴로움은 가지면 가질수록 영적으로 강화됩니다. 몸이 살아있기에 지금 하늘에 가지 못하고 땅에 남아서 살아야 한다는 하늘 괴로움은 크면 클수록 영적인 슈퍼맨으로 만들어줍니다. 슈퍼맨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이 세상이 나에게 괴로움을 줄 수 있는 이유가 아무것도 없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돈을 못 벌어도, 몸이 아파도, 세상 일이 안 풀려도, 승진을 못해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괴롭지 않습니다.
하늘 괴로움의 특징은 그동안 이 세상에서 느꼈던 모든 괴로움을 전혀 괴로움으로 느끼지 않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울하고 괴롭고 힘들다면 아직도 하늘 괴로움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죽어서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소망과 가치관이 없는 것이 하늘 괴로움을 갖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지금 몸이 죽는 것을 열 배, 천 배, 만 배, 백만 배나 더 좋게 여긴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좋은 일이 벌어져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일을 누리고, 자랑하고, 심취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지금 죽어서 하늘로 가는 것을 열 배, 천 배, 만 배, 백만 배나 더 좋은 일로 여깁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기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울해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훨씬 더 좋은 곳임을 믿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 머무는 것을 괴로움으로 느꼈습니다. 이러한 하늘 괴로움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어떤 일도 괴로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늘 괴로움은 이 세상 삶의 모든 시간을 순도 100%의 사명의 삶으로 만들어줍니다. 다시 본문 24절을 보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몸 된 교회를 위함이란 곧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방인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 이들을 구분해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모래 속에 자석을 넣고 흔들면 쇳가루만 붙어 올라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이방 세계에 던져보면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아들들로 예정하신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라붙게 됩니다. 이렇게 묻혀있고 숨겨져 있지만 예정 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아들들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는 사도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이 하늘 괴로움을 가져야 했던 이유는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세상 기준에서 볼 때 최고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도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백만 배, 천만 배 더 좋은 일로 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바로 이방인 가운데 묻혀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찾아내서 교회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충당돼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면서 받게 되는 박해나 고생을 뜻함도 아닌 것은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삶의 내용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언젠가 자신이 죽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67년에 순교했기 때문에 골로새서를 기록하던 62~63년 무렵은 사도 바울의 말년에 가까운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죽을 날을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죽을 날을 이미 정해 놓으셨고, 언젠가 자신의 사명이 끝나는 날이 올 것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사명을 이루는 힘은 사도 바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9절에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죽는 그날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자신의 생을 채우기를 바랐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육체를 채운다는 것은 육체가 마치 주머니라도 되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채울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의식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잊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던 말씀과 같은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 괴로움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하늘 괴로움은 교인들에 대한 사명으로 인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이방인에 묻혀있던 자들을 교인으로 불러내고 발탁하는 사명 때문에 이 땅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거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통 교인이 가져야 될 삶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사명의 부분을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바꾸면 됩니다. 정통 교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워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라면 엄마의 직분을 하늘 괴로움 속에서 수행해나가는 것입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엄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아내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가지고 하늘 괴로움을 겪는 동안에 특이한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으로 인한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세상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모든 시간에 채워나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67년에 순교하셨습니다. 골로새서를 기록하던 시기로부터는 약 5년이 남아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남은 날 수를 몰랐지만 자신의 남은 모든 날에 주님의 죽음을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을 날을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날까지 삶의 현장에서 매 순간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의식에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행하시는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위해서 해야 될 일이란 하늘 괴로움의 바탕 위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워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늘 괴로움의 바탕 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갈 때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가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하늘 괴로움과 세상 괴로움의 차이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앞서 체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늘 괴로움을 가진 자들은 세상을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세상에 대해 체념한 자들에게서도 보이는 양상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해서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괴로움이 겹칠 때 세상에 대해 체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해도 신통치 않고, 건강을 원하지만 신통치 않고, 자녀에게서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을 기대하지만 신통치 않습니다. 또 배우자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남북을 봐도 이루어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세상을 지긋지긋하게 느끼며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세상에서 소망을 갖기에 체념하게 됩니다.
우리가 갖는 소망을 이루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학을 떼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학을 떼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하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을 싫어해서 죽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가고 싶은 곳으로 여기기에 세상에 사는 것을 괴로움으로 여기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체념한 상태에서는 하늘에 대한 좋아함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을 싫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전혀 세상에 등 돌린 상태가 아닙니다. 혹시 무엇이라도 잘되는 일이 생기면 마음은 금세 세상에 달라붙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체념적인 괴로움은 하늘 괴로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세상 괴로움이 체념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하늘 괴로움은 하늘로 가는 것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이 하늘 괴로움이 정통 교인의 증거입니다.
하늘 괴로움은 소망이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바뀔 때 갖게 됩니다. 이 괴로움 속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생애의 모든 시간에 채워나갑니다. 그럴 때 놀랍게도 세상으로 인한 모든 괴로움과 근심과 걱정과 불안이 다 사라집니다. 하늘 괴로움을 바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참으로 역설적이고 말도 안 되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실로 제시된 하늘 좋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을 누리고 즐기고 취하는 것보다 몸이 죽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임을 스스로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돈에 대한 바람이 생길 때 ‘지금 몸이 죽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돈이 없어서 생기는 괴로움을 하늘 괴로움으로 바꾸자.’라고 나 자신에게 가르칩니다. 반대로 돈이 많이 생겨도 ‘몸이 죽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하늘에 못 가는 것이야말로 나의 괴로움이다.’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살려두고 계시는 이유는 내가 해야 될 일과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이루고 싶어 하시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은 나의 여생을 십자가 죽음을 짊어짐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단과 사이비와 오류로부터 우리를 지켜내고자 골로새서를 기록하였지만 핵심은 하늘 소망입니다. 소망이 하늘 소망으로 바뀐 자들이 정통 교인입니다. 하늘 소망을 가진 자는 하늘 괴로움을 갖습니다. 이 하늘 괴로움은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없애버리고 우리를 순도 100% 사명 수행자로 만들어갑니다. 그럴 때 참으로 이상하게도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함이 가능하도록 해줍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하늘 괴로움이 강력하게 활성화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까지 참 다양한 세상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 보좌 우편이 내 자리임을 확신하게 해주셔서 하늘 괴로움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사명 수행과 아울러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가 실제로 내 삶에서 이루어짐을 경험하며 놀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