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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생 포메이션을 흩뜨리지 말라>의 줄거리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삶은, 슬픔도 없고 실패도 없고 죽음도 없는 영원한 삶을 잠시 육체라는 옷을 입고 사는 겁니다. 영생은 일상의 삶을 오직 영원한 성분과 영원한 기운으로만 사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이 세상 성분이 섞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위한 특정한 포메이션이 있습니다. 이 포메이션을 모든 위협에서 지켜내야 합니다.
영생 포메이션을 흩뜨리지 말라
(골로새서 2:6~23)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본문에서도 영생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21~22절을 보면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이란 한때 쓰이고 없어질 것들을 의지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끝까지 지속되는 것을 의지해서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영생 포메이션을 흩뜨리지 말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예비 된 은혜와 축복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단과 사이비와 신앙적 오류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평생을 예배당에 출석하더라도 기쁨의 소리인 복음의 내용과 은총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오류와 결별하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어야 하고,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한때 쓰이고 없어질 것들에 관심하거나 의지하는 삶은 중단되어야 하고, 영생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영생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살아갈 때 영생을 살게 됩니다. 영생에는 슬픔이나 불안이나 두려움이 없고 실패나 죽음이 없습니다. 이러한 영생은 몸이 죽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돈도 건강도 승진도 자녀의 형통도 한때 쓰이고 없어질 것들이지만, 하나님으로 인한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는 끝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영생이란 한때 쓰이고 없어질 것들을 대상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기쁨으로 삽니다. 하나님은 한때 쓰이고 없어질 대상이 아니시기에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은 영생의 삶이 됩니다. 또 우리는 쉬지 않는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대화합니다. 대화에는 오가는 지식과 전달되는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철학자와의 대화, 책을 읽고 배우는 것, 스승에게 배우는 것 등 세상 모든 사람과의 대화는 한때 쓰이고 없어질 것들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하나님과의 대화는 끝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도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될 때 감사하고자 하지만 장사가 잘 되든, 승진을 했든 세상의 일들은 한때 쓰이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모든 상황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함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처럼 영생을 살아가는 자들은 슬퍼하지 않고 항상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쉬지 않는 대화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지혜와 지식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짐을 보고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영생은 육체가 죽은 다음에 시작되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을 믿을 때 영생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시작된 영생은 육체가 죽은 이후로도 영원토록 이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육체가 죽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육체를 씌워놓은 영생을 살아가는 구간을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영생은 하나이지만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이며, 두 번째 단계는 신령한 몸을 입고 사는 영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이 분명하다면 지금 영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을 때 영생이나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생을 어떤 대단한 성과나 일이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생은 우리의 일상에서 진행되어 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살림을 하고 청소하는 동안에 하나님과 맞닿아 있는 상태라면 영생을 살게 됩니다. 육체를 입고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지만, 한때 쓰이고 없어질 것들이 아닌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삶이기 때문에 영생인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할 영생의 기본 관념입니다.
영생의 특징은 세상 속에서 진행되는 삶이지만 세상적인 성분이 섞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영생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영원한 성분만을 가지고 순결을 지켜내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세상 성분이 섞이지 않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세상 성분이 섞이지 않은 영생을 위한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포메이션(formation)이 있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4-4-2나 4-3-3과 같은 표현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골키퍼를 기준으로 봤을 때 수비라인에 4명, 미드필더가 3명, 공격수가 3명이면 4-3-3 포메이션입니다. 농구로 말하면 자기 골대 밑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지역방어의 포메이션이나 각 선수를 방어하는 대인방어의 포메이션이 있습니다. 어떻게 공격하고 수비할 것이냐에 따라 포메이션을 바꿔가며 전략을 세웁니다.
세상 속에서 영생을 살 때도 포메이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시작된 영생은 육체를 씌워놓은 채로 이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 구간에서 영생을 유지하고 세상이 섞이지 않기 위한 일정한 포메이션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포메이션을 유지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생을 살지 못하고 한때 쓰이다 없어질 것들에 의존해서 사는 영멸할 자의 특징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갖춰야 할 포메이션은 바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에 참여하는 구체적 방식을 7절에서 간단하게 정리해줍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뿌리 내리기, 세워지기, 믿기, 감사하기가 언급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해서 사위일체 포메이션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위일체의 포메이션이 유지되어야만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영생을 살 수 있습니다.
육체를 벗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사위일체 포메이션을 유지하며 영생을 사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체를 벗음은 마치 외출했다가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은 당연한 수순일 뿐입니다. 영생을 사는 동안 육체를 입고 있는 것뿐입니다. 사위일체 포메이션은 육체를 입고 살 동안에 어떻게 세상이 섞이지 않게 하고, 한때 쓰이고 없어질 성분들이 끼어들지 않게 하느냐를 위한 답입니다. 그리고 이 사위일체 포메이션을 이루는 기본자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뿌리내리기, 세워지기, 믿기, 감사하기입니다.
우리가 뿌리내려야 할 예수님은 공생애 때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거쳐 보좌 우편에 이르게 됩니다. 뿌리내리기란 이렇게 예수님을 늘 의식함을 통해서 마음 흐름의 방향을 하늘로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워지기도 마음의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존재감을 의식하고자 하고 좋은 것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의식이 예수님을 붙잡을 때 마음은 하늘을 향하는 것이 뿌리내리기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상생활에서 유지되어 가는 것이 세워지기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다양한 생활 현장에서 예수 안에서 내린 뿌리를 유지하는 것이 세워지기입니다.
이 세워지기를 위해서 중요한 요소가 바로 믿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좋음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하나님만이 삶의 주체성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장사가 안 되는 상황에서 마음이 흔들린다면 뿌리내리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세워지기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올바르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불안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장사가 안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속은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한 이유는 좋으신 하나님을 충분히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건강이 안 좋아서 마음에 불안과 걱정이 생겼더라도 그것은 믿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충분히 채워지지 않아서 불안과 걱정이 생겨났음을 깨닫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문제 때문에 속이 상하는 것 같지만 실은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자녀가 문제를 일으켜도 기쁨과 평강 가운데 자녀를 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이 유지되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환경에 처할지라도 감사가 넘쳐나게 됩니다. 이 포메이션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뿌리내리기, 세워지기, 믿기, 감사하기의 포메이션을 유지하는 중에 삶의 현장에 나가서 살 때 영생을 살게 됩니다. 식물들을 보면 아래로 뿌리를 굳건히 내릴 때 위로 크게 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위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튼튼하게 세워지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다만 세상에는 이러한 영생의 포메이션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8절을 보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있을 때 영생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영생을 살아야 할 사람들 속에 세상의 성분이 끼어들어서 혼합된 것이 이단이고 사이비이며 오류입니다.
이어서 9~10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장사가 안 되면 먼저 세상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목사님들도 목회가 잘 안 된다고 하지만 안 된다는 것 자체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입니다. 그 기준대로 생각하기에 해결 방법도 세상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분명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지금 내 곁에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이 계십니다. 또 주님 안에서 만나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사위일체의 영생의 포메이션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해결법을 세상에 존재하는 이론이나 스승이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찾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바깥에서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삶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노력을 초등학문이라 규정합니다. 이러한 초등학문에 의지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다고 하면서도 영생은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이 충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성이란 신적인 성분의 모든 지혜와 지식과 답입니다. 우리가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세움을 입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골로새 교회에 퍼지고 있던 천사숭배를 염두에 둔 내용이지만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예수님보다 더 우선시해야 할 높은 자도 없으며 권세도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보다 더 우선시할 권세나 통치자는 없기에 그들로부터 답을 찾으려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성분이 끼어들 때 영생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우리에게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는 사위일체의 포메이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뿌리를 내린 채로 삶의 현장에 나가 세움을 입고, 그 세움을 입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위일체의 포메이션을 유지하다보면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신성으로부터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할 모든 지식과 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한편 11절을 보면 또 다른 위협적 요소로 할례가 언급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곧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낸 상태입니다. 태어난 지 8일 된 남아의 양피를 베어내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육체를 잘라낸다는 것은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는 마음이 육체를 따라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3절을 보면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학문이나 가르침이나 명령이나 규정도 내 마음이 육체를 따라가는 죄적 체질을 끊어냄에 대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늘 기억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그 누구도 마음이 육체를 따라가는 일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손으로 만지는 오감을 통하여 접하게 되는 대상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의 죄적 상황을 끊어내는 길은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그리스도의 할례뿐입니다. 설령 교황이나 교단의 총회장일지라도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는다면 마음이 육체를 따라가는 일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 그리스도 할례가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 하나님의 유일한 주체성에 대해 완전히 죽게 되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론을 찾게 됩니다. 내가 행동해야만 하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이 만들어낸 행동 원칙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율법과 규정과 규례와 원칙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죽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기운으로 사는 영생은 중단됩니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이 세상을 구걸하듯이 돌아다니며 삶의 답을 찾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대가이고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이루는 사위일체 포메이션 안에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지식이라는 추상적인 자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육체가 입고 먹고 하는 모든 것과 인간관계까지도 오직 사위일체 포메이션 안에서 완전히 충족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이고 주권적으로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각자의 독특한 삶을 위해서는 여러분이 대가입니다. 삶의 답을 얻고자 누군가를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는 이유 또한 이 포메이션을 유지함을 돕는 것이지 구체적 삶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누구도 여러분의 삶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단이고 사이비이며 오류투성이의 거짓된 설교자이며 스승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모습에 대한 답은 사위일체 포메이션 안에 있습니다. 사위일체 포메이션을 유지해가는 여러분이 삶의 문제들에 대한 전문가입니다. 절대 다른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자 할 때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세상의 기운이 들어옴으로써 영생은 끊어집니다.
영생은 삼위일체에 참여하는 사위일체 포메이션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조달되면서 지켜질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과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이론적으로만 십자가 생활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영생은 살 수 없습니다. 뿌리내리지 못하고, 세움을 입지 못하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믿지 못하고, 그 안에서 충족됨을 통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세상 것들을 기웃거리며 세상 것들을 혼합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완전히 퇴치되어야 합니다.
영생의 포메이션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초등학문으로부터 지켜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육체를 따르고자 하는 죄적 체질이 그리스도의 할례를 통해 잘라져 나가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으로부터 영원히 이어질 영생을 지금부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똑같이 세상을 살아도 한때 쓰이고 없어질 삶이 아니라 영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이기에 받게 되는 위협에 맞서서 영생의 사위일체 포메이션을 굳건히 지켜나갈 수 있도록 붙잡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