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골로새서-2

녹취문: 십자가에서 죽는 타이밍과 죽는 목적_태승철 (골로새서 3:1~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2.23|조회수8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에서 죽는 타이밍과 죽는 목적>의 줄거리 :

십자가를 의식하며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려면 십자가를 의식하고 죽어야 하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내가 이 세상일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이 십자가를 기억하고 죽어야 할 타이밍입니다. 세상일에 관한 생각을 그냥 풀어 놔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게 됩니다. 타이밍 맞춘 십자가 죽음 통해서 생각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실천적 목적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타이밍과 죽는 목적

 

(골로새서 3:1~4)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는 목적은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시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의 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돈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돈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갖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노력합니다. 이것이 재물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우리의 마음가짐도 똑같지만, 차이점은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섬김에 대해서는 별다른 도움 없이도 좋아하고, 갖고 싶고, 가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좋아하고, 갖고 싶고,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생활화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의 근본 목적을 잘 알고 있지만 문제는 실천입니다. 생활 속에서 언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실천적인 면에서 언제 십자가를 붙잡고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줍니다.

 

말씀드렸듯이 십자가 생활화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안기는 것이고 내가 또한 하나님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다만 실천적인 목표는 좀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위’란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천국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을 보면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에는 다시 살리심을 받기 전에는 아래 것을 찾고 있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찾으라는 표현이 생각하라는 표현으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봤을 때 사람은 십자가 이전에도 생각을 하고 십자가 이후에도 생각을 합니다. 십자가 이전에는 땅의 것을 생각하다가 십자가 이후에는 하늘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란 쉽게 말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곧 땅에 대해서 생각이 작동되기 시작할 때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땅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지 말고 생각이 시작되려는 시점에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명령형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네이테(φρονεῖτε)는 ‘지속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전후로 바뀌는 것은 생각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할 때마다 십자가를 떠올려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땅의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몸으로 만나는 일들에는 생각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을 중단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란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전과 후에는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변화는 생각에서 나타납니다. 생각은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같지만, 대상이 달라집니다. 믿기 전에는 땅의 일만을 생각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한 후로는 땅의 일을 생각하는 나를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 여기고 하늘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나의 마음이 다시 살리심이 분명하다면 반드시 위의 것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는 뜻이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2장 11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언급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죽고 부활함으로 달라지는 것은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마음은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합니다. 이 마음이 육체와 분리되면 육체와 만나는 것들 중에서 생각할 일이 없어집니다. 생각은 인격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생각은 마음에서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는 대상을 향합니다.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좋음을 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할례가 이루어져서 마음이 육체와 분리된 사람은 십자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증거로 이 땅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땅의 일이 생각날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장 23절을 보면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이나 규정과 같은 일들이 육체 따름을 금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유익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육체를 따르는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이 육체를 따를 때 마음도 따라갑니다. 그것을 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로 세상을 살고 있기에 여전히 세상일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그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실천적 타이밍입니다.

우리는 세상일이 생각나려고 할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떠올리며 생각을 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에 대해 생각이 납니다. 그러한 생각이 드는 이유는 돈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다는 마음의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 바람을 따라서 생각하기에 앞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생각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돈 문제에 대한 욕구의 크기를 그대로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돈 문제가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돈 문제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기뻐지기를 바란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생활화의 타이밍은 생각입니다. 세상 일이 생각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떠올리며 생각을 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땅의 것을 생각함이 곧 하나님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도맡아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각해야 될 일은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이전에도 생각하고 십자가 이후에도 생각을 합니다. 다만 그 생각의 대상이 다릅니다. 십자가 이전에는 땅의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땅의 것을 생각한다면 그때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타이밍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는 이유는 소망과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을 통해 그 소망과 소원을 모두 하나님께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것을 생각함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믿어서 함께 죽었음이 진실이라면 늘 이루어지는 생각의 방향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땅의 것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는 땅에 대한 생각이 곧 하나님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함이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생각을 제쳐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제쳐놓았기에 땅의 것들의 있음과 좋음을 붙잡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죽음이자 절대로 땅의 것을 생각하면 안 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지금 돈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돈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돈만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좋습니다. 그런데도 돈을 생각한다면 돈의 존재감이 느껴지고 돈이 좋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원수의 존재감을 느끼고, 원수가 없어지는 것을 좋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좋은 것이지 원수가 없어야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원수의 존재감에 더 무게를 두고 원수가 내 좋음을 크게 좌우하는 존재로 여기기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의식과 욕구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세상 모든 사람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며 살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 죽었을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달라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생각에 대해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육체와 관련된 모든 일들은 전부 하나님이 도맡아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살아계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이는 곧 창조주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모든 만물들에 대해서 단 백분의 일초도 멈추지 않고 생각하고 계심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나의 아버지이시자 창조주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두고 계시는 한 몸이 만나는 모든 세상일에 대한 생각과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시기로 창세 이전에 예정하셨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아들들은 절대로 땅의 것을 생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반드시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아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직접 생각을 만들어 내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만을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이 세상 것을 위해서 절대로 내 생각이 나가서도 안 되고 만들어져서도 안 됩니다. 창조주로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나의 머리털 끝부터 발끝까지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렇게 붙잡고 계시는 몸이 만나는 일들에 대해 우연히 만나게 하시지 않으며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생각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만 향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위의 것을 향해서만 생각의 능력을 활용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면 안 되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연관해서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를 정리해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것에 대한 생각은 곧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제쳐놓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담은 타락해서 에덴을 상실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상실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 속에서는 지금도 아담의 죽음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상실이 곧 하나님에 대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상실은 삶의 현장에서 땅의 것을 생각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보다 사장님의 있음이 우선적으로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있음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장님의 있음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아담의 타락과 죽음이 역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에 대한 죽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사장님의 있음보다 우선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죽음입니다. 돈의 좋음을 추구함이 하나님의 좋음을 제쳐놓은 것이고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죽음이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고 나면 세상에 대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세상 것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도맡아서 하셔야 될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땅의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 세 번째 이유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땅의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본문 3절을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바로 하나님에 대해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아담은 타락해서 육체는 살아있으나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음을 잃게 되었고, 그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 또한 하나님에 대해 생명 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생명은 진짜 있음과 진짜 좋음이 의식과 욕구 안에 담겨져 있는 상태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잃었어도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바라는 욕구는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잃었기에 다른 것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다른 것의 좋음을 욕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진짜 있음과 진짜 좋음이 아니었기에 생명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우리의 의식은 유일한 있음이신 하나님의 존재감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욕구 안으로는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생명이 생겨나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 또한 영원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일시적인 것의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게 되면 생명도 일시적인 것이 됩니다. 영생을 잃고 영멸의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죽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참 많은 분들이 혼란을 느낍니다. 우리는 앞서 살펴본 내용을 통해 이 죽음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바로 십자가를 통한 세상에 대한 생각의 죽음입니다. ‘죽었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페다네테(ἀπεθάνετε)는 부정과거형입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이루어진 일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이미 죽었다.’라고 풀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전히 세상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나는 이미 죽었다.’라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여전히 세상일을 생각합니다.

성경 속에는 이러한 부정과거형으로 기록된 표현이 다수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앉히시니’라고 번역된 부분도 부정과거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 하늘에 앉히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다소 헷갈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니 지금 나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죽었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나의 죽음이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만들어진 죽음은 단번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계속 먹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이라고 십자가 생활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마치 혈압약과도 같습니다. 고혈압 환자들이 혈압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해야만 하는 이유는 혈압약이 고혈압을 억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려 표현해보자면 혈압약 속에는 고혈압이라는 증상에 대한 죽음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혈압약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혈압약을 계속해서 복용해야만 고혈압이라는 증상에 대한 죽음은 이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미 나의 죽음은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죽음을 지속적으로 복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혈압약을 중단하면 다시 고혈압 증세가 나타나듯이, 십자가 죽음을 중단하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세상일을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죽음의 상태가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일이 생각날 때를 타이밍으로 삼아 십자가 죽음을 복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죽을 때까지 이어져야 할 일입니다.

다만 십자가 생활화가 원활해질수록 세상일에 대한 생각은 싹이 잘려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세상일에 대한 생각을 한없이 따라가다가 힘들어 죽겠다고 여겨질 때쯤이 되어서야 ‘주님, 저 좀 살려주세요. 십자가를 붙잡습니다.’하고 돌아왔다면, 십자가 생활화가 원활하게 될수록 세상일에 대한 생각이 날 때마다 싹을 잘라버리게 됩니다. 세상일을 생각하려는 성향을 억제함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징검다리처럼 드문드문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차 레일처럼 억제됨이 쭉 이어져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평강과 자유와 기쁨이 주어집니다. 세상일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절대 평강과 자유와 기쁨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1장 24절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괴로움이란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는 괴로움이었습니다. 세상일을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어서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일들보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더 우선이고 더 크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가졌더라면 지금 겪는 일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좋음과 있음을 자꾸 생각하다보면 실제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분명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있음과 좋음이 분명했기에 세상에서 잠시라도 머무는 것이 괴로움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 또한 그 정도까지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괴로움이 항상 기쁨의 바탕이 됩니다. 괴로워야 기쁠 수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과 가족을 포기하고서라도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이들에게 가장 큰 괴로움은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없다는 현실입니다. 이는 곧 서로가 서로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내게 가장 큰 기쁨이 되는 존재와 함께할 수 없음이 괴로움입니다. 십자가를 타이밍 맞춰 생활화해나가면서 세상일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만을 생각함이 이어지다 보면 어느 시점에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너무너무 좋아집니다. 내가 줄리엣이라면 하나님이 로미오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육체의 살아있음이 한탄의 대상이 되고 괴로움의 이유가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이기에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이기에 육체 때문에 지금 당장 하늘에 올라갈 수 없음이 괴로움입니다. 이것이 괴로워야 기쁠 수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역설적인 괴로움과 기쁨의 혼연일체 상태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춤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세상 것이 생각날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싹을 제거합니다.

세상은 절대로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생각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 이유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로서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끌어 가실 준비가 다 되어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 놓고 이 세상일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위의 것인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좋음을 가졌더라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문제가 될 수는 없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것을 이용해서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십자가 생활화의 원활함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에 대해서는 십자가 붙잡고 죽기 살기로 싸우듯이 생각하지 맙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대해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세상 것이 생각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만을 생각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