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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2

녹취문: (S) 정통 인간 정통 삶, 오류 인간 오류 삶_태승철 (골로새서 3:12~1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2.27|조회수93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정통 인간 정통 삶, 오류 인간 오류 삶>의 줄거리 :

종파나 교단이나 집단만 사이비와 이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자체가 오류 인간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지구는 오류 인간으로 홍수가 난 상태입니다. 사이비 인간으로 넘쳐 납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였지만 인간이 아닌 상태입니다. 오직 정통 인격 상태의 인간만이 정통의 삶을 삽니다. 오류 인간은 그 삶도 오류로만 가득 찹니다. 무엇을 하든 얼마나 이루던 무조건 오류가 됩니다.

 

정통 인간 정통 삶, 오류 인간 오류 삶

 

(골로새서 3:12~17)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본문은 좋은 소리로만 가득하기에 실제 생활 현장 속에서, 과연 나와 관계가 있겠는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한 번 읽어보고 넘어갈 만한 내용이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분위기의 내용을 앞서 로마서에서부터 계속해서 접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의 말씀은 매 서신마다 다른 맥락에서 제시되며 우리에게 다시 그 의미를 생각하게끔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정통 인간은 정통 생활을 하고, 오류 인간은 오류 생활을 합니다. 본문에서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과 같은 덕목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러한 덕목들을 성령의 열매로 언급하였는데, 비단 갈라디아서뿐만 아니라 모든 서신에서 틈틈이 반복되는 내용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정통과 오류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골로새 교회의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아닌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다만 골로새 교회는 이단사상, 헛된 철학, 초등학문, 금욕주의, 율법주의 등이 혼합되어 복음이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에바브라는 로마에 있는 사도 바울을 찾아와서 이러한 형편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서 기록된 서신이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사이비와 이단과 신앙적 오류를 가려내는 맥락 속에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야 할 덕목들을 언급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러한 덕목들을 성령의 열매로 언급했을 때와 비교하자면 내용은 같지만 바라보는 측면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통 인간의 정통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과연 삶에 정통이나 오류라는 말을 써도 되는가에 대해서부터 따져봐야만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사람을 만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접합니다. 이러한 관계와 환경에서는 신체적인 조건, 건강상의 조건, 가족관계의 조건, 재정적인 조건, 회사업무의 조건 같은 다양한 조건들이 주어집니다.

정통 인간이 정통 삶을 살 때는 누구를 만나든, 어떤 환경이 주어지든, 어떤 조건과 변수가 발생하든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완벽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 속에서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났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통 삶에서는 그러한 수용적 자세에서부터 사람과의 만남과 주어지는 환경이나 조건들에 대해서 더 뺄 수도 없고 더 더할 수도 없이 온전히 합치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삶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꽉 찬 삶을 산다는 느낌이 나 스스로에게 생겨납니다.

꽉 찬 삶이란 세상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일을 하거나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살고 있어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환경과 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마찬가지로 더할 수도 없고 뺄 수 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며 살게 됩니다. 이러한 정통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취지에 맞는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만드실 때 구상하셨던 모습입니다.

반면 오류를 사는 오류 인간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만남도 환경도 조건도 항상 부족하거나 과하다고 느낍니다. 부족하게 여겨져서 싫어하거나 거부하고, 과도하게 좋아해서 몰입하고 빠져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편견과 선입견이 자기 기준이 되어서 삶을 묶는 쇠사슬이 됩니다. 스스로 감옥 속에서 사는 상태를 만들고 있기에 마음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꽉 찬 충만함 대신 균형이 깨지고 조화가 없어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늘 갈등과 상충이 일어납니다. 평생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결국 헛짓이 되고 맙니다.

 

정통이 아닌 오류의 삶은 이단의 삶이며 사이비의 삶입니다. 이단, 사이비는 교단이나 교파와 같은 단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격 자체에 이단적인 인격, 사이비적인 인격, 오류투성이의 인격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단과 사이비와 신앙적 오류의 혼합주의에 의한 위협을 받고 있던 골로새 교회에 정통 인간의 기본 요소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정통 인간의 기본 요소는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는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되는 거룩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분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이유는 사랑하시기 위함입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덕목이 겉으로 드러나도록 옷을 입는다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다면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증거이며 구별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고 구별되어서 하나님이 사랑하심으로 내가 받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24시간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연합할 수 있게 해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이 정통인지 사이비인지 오류인지 그 기준 또한 이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24시간 가지고 있다면 정통 인간입니다. 하나님과 24시간 짝이 되어야만 하나님이 본래 구상하신 정통 인간의 모습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과 24시간 함께할 때만 본래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는 정통 인간의 모습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24시간 함께하는 것을 필수적인 조건이 되도록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대체물을 끌어들이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정통 인간에서 벗어나 사이비 인간이 된 것입니다.

정통 인간은 본래 인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묶여야만 비로소 본래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24시간 묶이지 않으면 인간 자체가 사이비가 됩니다. 그리고 사이비 인간은 사이비 삶을 살아갑니다. 사이비 삶이란 인간이 본래 느껴야 될 기쁨, 만족, 생명, 사명이 없는 삶입니다. 사이비 기쁨, 사이비 만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불평이나 불만조차도 사이비가 되어서 올바른 불만과 불평을 갖지 못합니다. 갖고 있는 기준이 사이비이기에 그 사람의 판단과 생각이 모두 사이비가 됩니다. 사이비 생각, 사이비 판단, 사이비 말, 사이비 행동에서 비롯되었기에 기쁨도 사이비, 행복도 사이비, 만족도 사이비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가짜입니다. 평생을 살아봐야 아무것도 산 것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얼마나 사이비로 살아왔는지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정통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머물며 세상 사람과 구분되고 구별된 자들은 하나님 자신을 받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옷 입는다는 말씀이 뜻하는 대로 바깥으로 표출되는 인격의 모습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긍휼입니다.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이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덕목입니다. 높음과 낮음의 격차가 긍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높음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도달해서 땅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무조건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노숙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면 대통령도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노숙자가 대통령을 불쌍히 여기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고 정신병자로 취급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있다면 실제로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마음이 땅에서 뒹굴고 있다면 그 사람이 설령 대통령일지라도 불쌍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땅에서 뒹구는 사람을 볼 때 높음과 낮음의 격차에서 긍휼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에 땅 높음이 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가 말하듯 산이 아무리 높더라도 그것이 땅에 있는 한 하늘보다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가졌다고 의식할 때 그 가치를 발판 삼아 위에 서고자 하는 자들은 땅에서 높음을 이룬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긍휼이 아닌 교만이 나타납니다.

 

두 번째는 자비입니다. 이 또한 땅 높음과 하늘 높음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땅에서 높음을 추구하는 동안에는 자비함이 아닌 무자비함이 나타납니다. 반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간 사람은 이 땅에서 마음이 뒹구는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김으로 이로부터 나오는 실질적인 행동이 자비입니다. 긍휼이 사람을 볼 때 마음에서 생기는 불쌍히 여김이라면, 자비는 긍휼히 여기는 가운데 구체적인 모든 말과 행동에 배어 있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아 세상으로부터 구분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하늘 높음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 먼저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상태에서 대할 때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은 자비의 속성을 지니게 됩니다. 자비는 정통 인간이 사람을 만날 때의 기본 바탕인 것입니다. 24시간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오류 인간의 상태에서는 절대 긍휼과 자비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겸손입니다. 겸손을 흔히 인격적으로 나를 낮추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적 의미에서 겸손이란 세상 가치를 토대로 삼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이 세상적인 가치를 토대로 쌓아서 올라서고자 할 때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통장에 100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는 부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라면 ‘나는 잘생겼다’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박사라면 ‘나는 배운 사람이다’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이 딛고 올라설 토대가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적인 가치들을 딛고 올라설 때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24시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이 세상적인 가치가 주어졌을지라도 그 위에 서지 않습니다. 통장에 100억이 있고, 박사학위를 받았고, 어떤 지위를 갖고 있고, 외모가 출중할지라도 마음의 있음과 좋음을 위한 용도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세상 가치들이 마음에서 겉돌기에 그것을 토대로 삼아 마음이 올라서지 않습니다. 마치 세상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게 겸손입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가치는 티끌조차 남지 않은 곳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토대로 쌓아올릴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가치에 대해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가진 대상들만 마음이 올라설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조차 앞으로 가질 것을 계획하고 소망하는 중에 마음이 올라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가치에 대한 꿈과 바람이 마음이 올라설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이 세상 것은 주어져 있든지 주어져 있지 않든지 마음이 올라설 토대로 삼지 않는 상태입니다. 세상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는 상태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것은 24시간 하나님과 함께하는 정통 인간이라면 반드시 나타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기 때문에 돈과 함께할 필요가 없고, 건강과 함께할 필요가 없고, 세상적인 지위와 함께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함이 겸손입니다. 반면에 조금만 가져도 가졌다는 의식을 가지고 토대 위에 서면 교만해집니다. 자기만큼 갖지 못한 사람을 보면 교만해지고, 자기보다 더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비굴해집니다. 교만과 비굴은 항상 같이 갑니다.

오직 24시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 것을 많이 가진 사람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아무리 세상 것이 없는 사람 앞에서도 그를 존중하고 귀히 여깁니다. 이것이 정통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꽉 찬 만남의 비결입니다.

 

네 번째는 온유입니다. 온유는 단지 부드럽고 따듯한 심성이 아닙니다. 온유의 근원은 24시간 나와 함께하는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에 대해서 유일한 주권자이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나와 함께하는 하나님이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만나는 환경, 내게 주어진 조건에 대해 유일한 주권자시라는 믿음이 있을 때 나타납니다.

행여 원수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이 그를 주장하고 이끌고 계신다고 믿어지기에 억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과 빌라도의 재판조차도 아버지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로 받아들이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도 받아들이시고 빌라도의 재판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이 정통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온유입니다.

온유는 성격이 부드럽고 따듯해서 나타나는 받아들임이 아닙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 조건과 환경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믿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함 없이는 꽉 찬 느낌의 정통의 삶도 없습니다. 원수가 있다고 해서 싫어하고 거부한다면 항상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체로 정통의 삶, 꽉 찬 삶, 다 이루는 삶을 놓치게 됩니다. 원수가 나타나도 원수의 생명도 아버지가 붙잡고 계심을 믿는다면, 설령 욕을 먹는다고 해도 그 입을 움직이도록 허락하신 이가 내가 24시간 함께하는 하나님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원수와의 관계에서 후회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꽉 찬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정통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온유입니다.

 

다섯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함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오래 참음이 나타납니다. 자비는 내 모든 반응의 기본 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이 나타나는지가 오래 참음으로 드러납니다. 똑같은 밀가루 반죽이라도 갖가지 모양의 도넛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똑같은 자비를 결로 삼아 생각과 말과 행동이 결정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24시간 함께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나를 통해 나타나도록 기다리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이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몸으로 만나고 있는 삶의 현장이라는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실 수 있도록 틈을 내드리는 것이지 맹목적인 인내가 아닙니다. 분통이 터져도 억눌러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래 참음의 원조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오래 참음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재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듯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주어진 환경과 상황과 조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13~14절에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였습니다. 불만을 서로 용납하라함은 내가 느껴야 될 고충의 이유를 제공하는 자, 다툼의 이유를 제공하는 자를 용납하라는 뜻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하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용서하시는 방식은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고충과 다툼을 제공하던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일 때 용서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롭지 못한 내가 죽었으므로 용서가 된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는 말씀은 바로 주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나의 죽음을 붙잡고 사람을 대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고충을 제공할 때 나야말로 하나님께 고충을 제공하던 자였음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나를 대신해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죽은 자로서 나에게 고충을 제공하는 자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용서하시는 방식입니다. 내게 고충이나 다툼을 주는 사람을 갈등과 불만과 다툼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이루신 죽음을 기억하며 그 사람 앞에서도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고충을 제공하던 못돼먹은 죄악 덩어리였던 내가 죽었음을 사람 앞에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 덕분에 이루어진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며, 나에게 고충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죽은 자로서 대할 때 하나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게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정통 인간의 삶을 살되 이단적 인격성, 사이비적 인격성, 오류적 인격성의 상태를 용납하지 말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왕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은혜를 받았으니 아무쪼록 정통 인간으로서 정통의 삶을 살다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는 고백과 함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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