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데살로니가전후서-2

녹취문: (S) 환난 앞에서 드러나는 택하신 증거_태승철 (살전 1:1~1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3.06|조회수10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환난 앞에서 드러나는 택하신 증거>의 줄거리 :

불과 3주간의 회당 설교를 한 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사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납니다.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박해를 가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이런 극심한 박해 아래서 복음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훌륭히 믿음을 지켜나가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보시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확신하며 그 증거들을 열거하십니다.

 

환난 앞에서 드러나는 택하신 증거

 

(데살로니가전서 1:1~10)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셔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택하신 사람들에게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택하심의 증거는 보통 환난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라 여겨지지만, 실은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드러나야만 합니다. 다만 본문의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주듯이 환난 속에서 택하심의 증거들은 더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살펴볼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서신들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반도의 북쪽에 있었던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이자 항구도시였습니다. 빌립보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빌립보 교회에 이어서 유럽 지역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49~52년까지 2차 전도여행을 하였습니다. 50년경에 빌립보에서 극심한 박해와 고난을 받았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이동한 후에 유대인 회당에서 3주 정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박해를 가해왔기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베뢰아로 쫓겨갑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사도 바울을 박해하였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아덴(아테네)으로 이동합니다.

박해를 피해 아덴에 도착한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짧은 기간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로 이동하여 무려 18개월을 체류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그 기간과 비교하면 데살로니가에서 머문 기간은 3주에 불과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 이후에 사도 바울이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여 전도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다시 돌아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좌절되었고 아덴에 머물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유대인들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 믿음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하여 아들과도 같았던 디모데를 파송하였고 이후에 고린도로 향합니다.

한편 데살로니가로 온 디모데는 한동안 교인들을 독려하고 위로하며 함께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고린도로 가서 사도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디모데로부터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기록합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가 기록된 시기는 51~53년 사이로 여겨집니다. 연대를 보자며 사도 바울의 모든 저작물 중에 데살로니가 전후서가 가장 먼저 쓰였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로 약 23~24년 정도가 지난 뒤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저작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특별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이 큰 주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매 장마다 재림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고, 후반에서는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언급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유대인의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켜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무척 기뻐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습니다. 외부적인 박해에 대해서는 견고한 믿음을 유지하며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에 비해, 내부적으로 재림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서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혼선을 겪고는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재림 신앙이 있었기에 외부의 박해도 견뎌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자면 1절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인사가 나온 후에 2절부터는 사도 바울의 감격이 이어집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기간은 무척 짧았습니다. 유대인 회당에서 고작 3주간 복음을 전하고 폭동으로 인해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18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했지만 고린도 교회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영적인 상황에 대해서 그 내막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3절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언급됩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실제 삶에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짧은 기간 동안에 들은 복음 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일을 드러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감격해합니다.

 

믿음의 역사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동일시가 출발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골로새서 3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하게 됩니다. 그럴 때 어쩔 수 없어서라도 접하게 되는 환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과 하나님의 유일하신 좋음, 하나님의 유일하신 주체성과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을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인격 자체가 있음을 의식해야만 하고, 좋음을 욕구해야만 하며, 주체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에서 있음을 의식함과 좋음을 욕구함과 주체성을 뺀다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은 인격의 3대 요소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체성이 환경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백화점에 가면 물건도 사고, 푸드코트에서 음식도 먹고, 같이 온 사람들과 대화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백화점 안에서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백화점 밖에서의 모습과 많이 다릅니다. 혹은 직장에 출근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퇴근할 때까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은 집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나타나는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과 천국이라는 영적인 사실이 불변의 환경으로 주어지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백화점 안에 들어갔을 때 온갖 화려한 상품들이 진열된 환경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여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는 내 마음이 만나는 환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 유일한 좋음, 유일한 주체성, 천국이라는 환경에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새롭게 주어진 환경 속에 마음이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주어지는 영적인 환경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백화점에서 온갖 새로운 물건들을 구경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듯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과 천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잃지 않고 그 상태에서만 할 수 있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디모데로부터 전해 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놀라운 영적 상태였습니다.

 

사랑의 수고란 마음이 영적으로 새롭게 주어진 환경에 머물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불변의 영적 환경에서 사람을 대할 때는 이 땅에 머물고 있는 사람에게서 어떤 유익도 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 대상은 가족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으며,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 나의 유익이 아닌 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수고란 사람의 인격이 훌륭해서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자면 자동적 진행 과정입니다.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여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간 하늘은 마음이 마주하는 새로운 영적 환경입니다.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만을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육체를 통해 이 땅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에는 자동적으로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모두 사랑이 됩니다.

수고라는 표현으로부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30절에서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나의 유익을 위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할 때가 훨씬 더 힘이 듭니다. 그러한 삶과 비교하자면 타인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합니다. 믿음에 의해 제공되는 새로운 환경 안에 있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삶은 나의 유익을 위하는 삶에 비해 십분의 일도 힘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타인의 유익을 생각하는 삶은 쉽고 가볍습니다. 내 유익을 구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지옥입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할 때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살듯이 가볍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소망의 인내란 몸으로 이 땅을 사는 것이 괴로움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가벼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땅을 사는 것이 괴로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믿음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라는 말씀 속에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과 천국이 환경이 되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하나님과 천국은 우리의 환경이 됩니다. 이렇게 새롭게 주어진 영적인 환경에 대한 친숙함과 적응이 점차적으로 강화되고 커질 때 몸으로 이 땅을 사는 것이 괴로움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가장 좋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가장 좋은 일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기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이 괴로움이 우리 삶의 근본적인 정서로 깔리는 것이 소망의 인내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언제 죽어도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이 찾아올 때 마음은 아버지 품에 안겨서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에 대한 기대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70년대를 떠올려보면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천국처럼 여겼습니다.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실제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카투사로 미군 부대에 복무하게 되었을 때 기절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똑같은 사람 사는 세상인데 미군 부대 안은 제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파란 잔디가 심겨진 운동장과 깔끔한 식당, 체육시설, PX를 보면 달동네에 살던 저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천국처럼 느껴졌습니다.

대한민국 땅에 미군 부대가 있는 것처럼 천국은 실존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동일시하는 믿음을 통하여 연합하게 되면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이 있는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마음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과정을 놓치거나 잊어버리거나 소홀히 한다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음이 분명하고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마음은 반드시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탈출하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를 별세라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별세로 번역된 원문을 보면 출애굽을 뜻하는 엑소도스(ἔξοδος)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몸이 생활 현장 속에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출애굽을 하듯 출세상을 해서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동해 지역에 사시는 사모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분들께서는 잔느 귀용(Jeanne Guyon, 1648-1717)의 서적이나,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 1861-1927)의 십자가의 도(The Centrality of the Cross)와 같은 여성 저자의 신앙 서적을 중심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가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분들과 대화하며 느낀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집중적으로 붙잡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에 대한 따름이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없는 십자가 생활화는 반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쪽 십자가 생활화는 십자가 생활화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모두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갈 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내 마음이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힌 바 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머물러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4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러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가능했던 이유로 택하심을 언급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짧은 기간에 복음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방문해보니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관계를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러한 영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택함을 받고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드러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5절을 보면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이해가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전했다는 식으로 끝내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했음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데살로니가에서만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말씀을 전했을 것이지만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들 교회에 대해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바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태도입니다.

말로 전하던 사도 바울 안에는 분명히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은 있어야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비록 짧은 시간 말씀을 들었지만 듣는 마음에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존재했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생활 현장에서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이라 밝힙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복음의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복음이란 결국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시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동안 복음을 제시받기 전까지 마음은 몸에 정복되어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밀착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복음을 제시받음으로써 몸이 거하는 세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능력입니다.

마음은 평생을 몸에 달라붙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복음 한마디를 듣는다고 해서 마음이 떨어져 나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이르신 주님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역사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복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으로 제시될 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조차도 능력이 작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모든 기쁨 거리를 이기는 능력이 작용해야만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조차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이것이 생활 현장에 적용되는 일은 더더욱 능력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신 과정을 기억하며, 예수님과 함께 생활 현장에 대해 죽었다는 인정과 고백을 하는 일은 이 세상이 제시하는 모든 기쁨 거리와 만족 거리를 통째로 이기는 능력이 임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택함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은 목표점을 향해 가는 힘입니다. 능력은 이 세상을 떠나고, 세상을 이기는데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어떤 사람도 어떤 것도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여기게 하는 힘입니다. 세상을 떠남이 출발점이라면 목표점은 바로 보좌 우편으로 예수님의 자리이자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 느껴지는 그 자리가 우리의 목표점입니다.

이러한 목표점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있음이 몸으로 만나는 사람이나 사건이나 대상의 있음보다 더 우선시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그동안 좋다고 여겼던 건강이나 장수나 돈이나 명예나 형통과 같은 세상의 가치들보다 더 좋다고 뚜렷하게 느껴지고 믿어져야만 합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체성이 이 세상 모든 것들 위에 임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져야만 합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 하나님의 좋음을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의 있음과 좋음보다도 더 강하게 느끼게 해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체성이 어떤 주체성보다 우선시되어야 함을 부각시켜 느끼게 해주십니다.

 

이러한 능력과 성령은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신 사람에게는 결코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큰 확신이란 이러한 능력과 성령의 역사가 삶의 현장에서 조금도 방해받음이 없이 고스란히 지탱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능력은 나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삶의 현장을 떠나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세상을 떠난 마음에 천국이라는 목적지를 제공해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내가 몸으로 대하는 생활 현장에서 보고 만지고 느끼는 어떤 대상보다도 더 확실하고 뚜렷이 부각되게 해주십니다. 큰 확신은 생활 현장에서 능력과 성령이 활동하시는 상황이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은 택하신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6절을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하늘 기쁨’이라는 표현에 대해 살펴본 바 있습니다. 하늘의 기쁨과 성령의 기쁨은 이 땅에는 이유가 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환난을 당할 때 환난에 맞서서 해결하거나 극복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환난을 계기로 위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을 찾아 하늘로 갑니다. 우리에게 돈 문제, 건강 문제가 환난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내가 붙잡고 해결하려 하는 것은 주를 본받는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마음이 오직 주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의 기쁨, 성령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주를 본받는 자의 태도입니다. 환난은 계기입니다. 환난이 극복된 상태를 기쁨으로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환난을 하늘로 올라가는 계기로 삼아 땅에 없는 기쁨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택하심을 받은 증거는 환난을 당할 때 맞서 싸워 이기고 뚫고 나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에서 도피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자들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비겁하고 나약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한 소리입니다. 환난이 임했을 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지구 전체의 기쁨 거리와 만족 거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정도의 능력이 임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이길 수 있는 능력자들이 아니고서는 환난이 임했을 때 땅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기쁨을 찾고자 하늘을 향할 수 없습니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임하는 택하신 사람들만이 그 증거로 환난이 임했을 때 환난을 해결하거나 뚫고 나가려 하지 않고 도망치듯이 주님을 붙잡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생활 현장 곳곳에서 택하신 백성들의 마음의 승천이 온 세계 곳곳에서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활 현장 속에서 환난이 주어지든 주어지지 않든지 택하심을 받은 자의 증거를 드러내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