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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후서-2

녹취문: 배교자와 적그리스도와 재림 관계_태승철 (살후 2:1~1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3.27|조회수7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배교자와 적그리스도와 재림 관계>의 줄거리 :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 일부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잘못된 지식을 전달받음으로써 예수님의 재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배교 현상과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전조로서 있어야만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배교와 적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중단 없이 출현하였지만, 아직 재림은 없었습니다. 이 모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배교자와 적그리스도와 재림 관계

 

(데살로니가후서 2:1~17)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시대의 배교자가 누구이며 적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그리고 이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예수님의 재림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배교자와 적그리스도와 예수님의 재림은 오늘날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의 삶과 무척 중요한 관계와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에 관한 내용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재림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다양한 출처를 통해서 재림에 대한 잘못된 자식을 전달받았던 모양입니다. 2절을 보면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자칭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재림의 때와 내용에 대해 주장하거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재림이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았다고 속이며 재림에 대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러한 다양한 방식들을 통해 재림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전달받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재림이 이미 임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재림이 임할 때는 해와 달과 땅을 비롯한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은 다 없어질 것이며, 살아있는 자는 물론이거니와 죽은 자도 부활하여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로 이 세상을 좋아해서 이 세상이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이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3절에서 재림을 알 수 있는 표징을 제시합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불법의 사람과 멸망의 아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다 없어지고 나타날 재림 전에 반드시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일서 2장 18절을 보면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노년에 기록한 서신으로써 여기서 아이들이란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재림 전의 징조로 배교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리라고 하였는데, 사도 요한은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며 지금이 마지막 때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한 시기는 약 50년경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마지막 때라 언급하며 요한일서를 기록한 시기는 약 90년경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문자적으로 풀어보자면 100년경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900년이 더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예수님의 재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배교자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재림하신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교가 무엇이며 적그리스도가 누구냐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배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어서 같은 마케도니아 지방에 있었던 빌립보 교회에도 서신을 보내게 됩니다. 빌립보서 3장 18절을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바로 배교이며,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배교자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19절을 보면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한편 20절을 보면 배교자와는 구분되는 참 교인들의 모습이 제시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21절에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는 재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적그리스도의 나타남이 재림의 징조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배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을 좋아함이 배교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이란 세상을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을 좋아하며 하늘로 가지 않음입니다. 이러한 배교자들과 구분되는 참 교인이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신 천국을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천국 시민권자로서 지금 당장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가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자들은 재림 때의 상황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8~21절까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배교자이며, 배교란 곧 세상을 좋아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배교자가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참 교인이 소망하는 재림의 상황이란 이 세상이 깡그리 없어지고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히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본문 3절의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의 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일서 2장 18절에서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했음에도 아직까지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두 말씀을 합쳐서 생각하자면 배교자들과 적그리스도를 볼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서 재림 때의 상황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림 전에 배교하는 일과 적그리스도의 나타남이 있으리라는 말을 문자대로만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다 죽은 사람들에게 본문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종말에 관한 성경의 언급들을 이해하기 위한 대전제이기도합니다.

제가 청년 때 유럽연합이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이해를 한다면 유럽연합이 출현하기 이전에 죽은 사람들에게는 재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최근에는 코로나 백신을 맞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백신을 맞아야 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그리스도라는 언급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언급은 역사적 흐름의 사건에 대응시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도록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배교자가 나타나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는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문자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어야 되는 말씀이고 실제로 모든 시대에 배교자들과 적그리스도는 항상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배교자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배교자라는 말에서 기독교 종교를 떠나 다른 종교인이 된다든지, 더는 예배당 출석을 하지 않게 된 사람들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배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시절에는 지금과 같은 예배당이나 예배당 조직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배교는 기독교 종교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 종교 또한 이 땅에 있는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기독교를 종교로 붙잡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일부를 붙잡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배교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을 세상에 남겨두고 세상을 좋아하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있어야 될 이유를 붙잡는 것이 배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종교인이라면 그 자체로 배교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종교에 속해야만 되는 줄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개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종교라는 조직에 매여 있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로만 알고 벌벌 떨고 있다면 이 자체가 배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종교라는 조직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입니다. 설령 그 종교가 기독교라는 이름을 하고 있을지라도 종교에 속해있는 마음이 세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배교는 곧 세상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 배교자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좋음이시고, 예수님이 나의 유일한 보배라면 그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교자의 마음으로써만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천국보다 세상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본문 4절을 보면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사도 바울이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은 70년경에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본래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어 해야 합니다. 이는 곧 마음이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적그리스도의 개입이 이루어집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늘로 가야 하는 마음을 자기에게로 집중시킵니다. 이 세상을 좋아하도록 선동하고, 이 세상 것을 얻으려면 자기에게 집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쉽게 말해 내 말을 들어야만 한다고 하고, 내가 목회하는 장소로 와야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위에 자기를 높이는 적그리스도의 특징입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 마음을 자기에게 집중시킵니다. 그러기 위해 이 세상을 좋아하게 만들어서 어떻게 하든지 마음이 세상에 붙어있게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을 이유를 제공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필연성을 설득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이러한 적그리스도는 항상 존재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중세 때 교황들의 행태를 봅니다. 이들은 세속 군주와의 권력다툼과 예배당 건물에 금과 은을 입혀 외관을 꾸미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백성들은 경제적 도탄에 빠져도 예배당은 휘황찬란하게 지었습니다. 중세 기독교 1,000년이 배교자들의 모임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그중에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들은 표면에 드러날 수 없었습니다. 교황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세속화가 일어났고 그 세속화의 정점은 바로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나 그로부터 500년이 흐르는 동안 개신교의 상황은 중세 기독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지금 당장 이 세상을 떠나려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뉴욕에 있으면 뉴욕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애정이 식었고 등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유일한 좋음과 보배라고 생각한다면 천국을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빌립보서 3장 18~21절까지의 말씀에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배교자의 특징은 땅의 것을 생각하고 좋아함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배교자들과 적그리스도가 발에 채이도록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배교자들과 적그리스도의 나타남이 재림의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배교자들과 적그리스도를 보면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라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교자가 되는 일은 너무나 쉽습니다. 적그리스도도 천지에 널려있습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독려하는 사람이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24시간 십자가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을 향해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끌고 가시기 위해 그리스도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 땅에 붙이려 하는 모든 자들이 적그리스도입니다. 마음이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는 어떠한 문제도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에 의해서 얼마든지 이끌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 땅에 묶어두려고 합니다. 마음이 이 땅에 머물 수 없다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속이고 위협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 대신 자신에게 주목하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런 적그리스도는 사방에 널렸습니다.

이러한 배교자들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는 재림이 없으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이 배교이며, 천국의 시민권자들은 천국을 소망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재림을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종합해보자면 결국 내 마음속에서 재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실제 재림이 일어나면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은 불에 타서 녹아내려 없어질 것입니다. 재림의 순간에 살아있다면 나와 가족들도 불타 없어질 것이고 집도 재산도 물론이거니와 산과 들과 바다와 하늘도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오직 사람들의 영혼만이 남아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걸맞은 신령한 몸을 입을지, 지옥에 걸맞은 불의한 몸을 입을지 결정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배교자들과 적그리스도를 볼 때 이러한 재림의 상황을 마음속에서 이루어내라 요청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다 없어지는 재림의 상황을 마음속에 떠올릴 때 세상을 좋아하는 배교자들과 적그리스도의 무리에 끼어들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에 담겨있는 본래의 뜻입니다.

 

 

한편 본문에는 특이한 언급이 보입니다. 9~10절을 보면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통해 적그리스도에게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일으킬 능력을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종인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에게 집중시킬 때는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런 기적을 행하는 나를 따르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탄이 적그리스도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결과적으로 보자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에게 구름떼처럼 모여듭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배교자들을 겉으로 드러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미혹이 더더욱 뚜렷하고 크게 일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미혹하여 드러내시고자 적그리스도에게 능력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가 휘황찬란한 예배당을 짓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몇백억, 몇천억 되는 예배당을 지을 능력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만큼 대단한 예배당을 지을 수 있다면 성공한 자라고 여기며, 나에게서도 그러한 성공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고, 목사의 성공을 나의 성공인 것처럼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좋아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적그리스도를 통해 미혹을 받고 심판에 던져지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러한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나타남은 우리에게 있어서 무척 일상적인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에게 능력을 주는 사탄의 의도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만 허락되기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삶에 불편함과 고통스러운 일을 주셨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납니다.

생각을 바꿔서 불편하게 여기고 싫어하고 원치 않는 일들이 다 제거되었다고 해봅니다. 그러면 세상에 먹혀들어 가고, 세상에 잠식당하고, 세상에 빠져들어 가서 배교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불편한 일들은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도록 주어진 은혜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천사의 얼굴과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평강이 깨어지고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일들이 없어짐과 동시에 배교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뺏기지 않으시려고 불편한 일들을 주권적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세상적으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일들이 다 제거될 수 있는 길이 자신을 따르는 것이라 속입니다. 쉽게 말해 ‘내 말을 들으면 형통한다. 내가 전하는 말씀을 들으면 세상에서의 불편과 어려움이 없어진다.’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유혹은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교자들과 적그리스도가 좋아하는 세상은 예수님의 재림 때 깡그리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이라는 개념조차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지는 가족관계는 결국 우리의 육체에 기반을 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오직 영으로써 관계할 것입니다. 영에는 나이가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의 아브라함의 영이나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영에는 낡고 새로움의 차이가 없습니다. 영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재림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을 좋아하는 자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본문의 재림 전에 배교자들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리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배교자와 적그리스도가 넘쳐납니다. 심지어 나도 배교자와 적그리스도가 될 가능성에서 완전히 배제된 자는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결코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이 이러한 곳이기에 지금 당장이라도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배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삶에서 이런저런 부족한 일들을 허락하십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어떤 일이 벌어져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불편함을 주심으로써 마음이 이 땅에 스며들거나 안착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땅에 먹히고 땅을 좋아하는 배교가 일어나지 않게 배려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본문의 말씀을 의지해서 십자가 붙잡고 마음에서 재림의 상황을 이루어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실제로 일어날 것이지만 재림의 효과는 이미 우리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세상이 다 없어지는 재림의 상황이 마음속에서 이루어짐으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좋아하여 마음을 붙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배교자와 적그리스도가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님을 늘 깨어 인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재림이 십자가를 붙잡는 내 마음속에 앞당겨 이루어져서 세상은 간데없고 마음에서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볼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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