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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게으름도 부지런도 아닌 호흡 맞추기>의 줄거리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는 믿음을 가진 사람. 그 죽음을 인내로써 지키는 사람.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몰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게으를 수도 없고 주체적으로 부지런할 수도 없습니다. 게으름도 나의 주체적인 부지런함도 없고 단지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만 있습니다. 시냇물에 떨어져 물결 따라 움직이는 파란 잎사귀처럼 하나님의 뜻이 흘러가는 흐름을 따라 행동합니다.
게으름도 부지런도 아닌 호흡 맞추기
(데살로니가후서 3:1~18)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
게으르지도 말 것이며 부지런하지도 말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흔히 게으름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강한 어조로 게으르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게으름이라는 잘못된 생활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흔히 말하는 부지런함에 대한 권면도 아닙니다. 만약 본문의 내용이 단순히 게으름에 대한 경고나 부지런함에 대한 권면이라면 이 말씀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 항상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묾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모든 교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무는 상태에서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하신 좋음을 믿으며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을 믿으며 쉬지 않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주체성을 인정함으로써 범사에 감사하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게으름에 대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자적인 이해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상태였음을 전제로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1~4절을 보면 사도 바울 일행에 대한 기도 부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나가 영광스럽게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나 아테네에서 전할 주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처럼 영광스러울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입니다.
말씀이 영광스럽게 됨이란 주의 말씀의 성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이론이나 교리 혹은 사상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은 사건과 사실에 대한 증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에 대한 사실, 3차원 세상이라는 커튼에 가려진 천국의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에만 국한시키더라도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내용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실들에 대한 증언이 영광을 받았다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더는 다른 이론이나 교리나 가르침에 대해 귀 기울이지 않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주의 말씀인 사건과 사실을 받아들이고 생활화함으로써 이외의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 천국의 존재함에 대한 주의 말씀이 일등자리를 차지한 것을 영광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 속에 있는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실제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본문 5~15절에 걸쳐 언급됩니다. 그것이 바로 게으름입니다. 다만 2절을 보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이 영광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믿음을 보이던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서도 믿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게으름을 언급합니다.
사실 게으름은 다른 서신에서 언급되는 교회들의 타락상에 비하자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패륜적인 음란에 대한 경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게으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소홀히 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1, 인내, 믿음2를 통해 이해했습니다. 믿음1이란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1을 인내로써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떤 자극이 주어지더라도 세상에 대한 나의 주체성을 살려서 내가 개입해 들어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인내를 통해서 세상에 대해 죽을 때 믿음2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믿음1과 인내와 믿음2를 지키는 사람들에게서 게으름은 절대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6절을 보면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전통이란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해준 주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주의 말씀이란 십자가 사건과 사실들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여서 믿음1과 인내와 믿음2를 갖게 되는 사람에게서는 게으름이 나타날 수 없다는 말씀을 뒤집어보면 부지런함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게으르지도 않고 부지런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기에 세상에서 진행되는 삶의 현장에서 게으를 수도 없고 부지런할 수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본문과 연결해 보자면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대해 살아가시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 대해 게으를 수도 부지런할 수도 없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인내로 지켜가며 항상 하나님을 직면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입니다. 게으름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게으름이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마음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연결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자동차를 연상시킵니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힘은 엔진에서 나옵니다. 다만 그 엔진에서 나온 힘은 반드시 축을 통해 바퀴로 전달되어야만 합니다. 엔진 축과 바퀴 축이 연결되어야만 차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게으름이란 마치 축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마음과 연결되지 않아서 삶을 움직일 동력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믿음1과 인내와 믿음2를 갖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언제나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입니다. 엔진으로부터 나오는 힘이 바퀴까지 온전히 전달되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게으름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연결되면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지런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음은 똑같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자기 주체성으로 부지런 떠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엔진 축과 바퀴 축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속페달을 밟으면 엔진이 강하게 공회전하게 됩니다. 엄청나게 힘을 발휘하고는 있지만 차는 조금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공회전하는 삶의 후유증은 탈진과 우울증입니다. 자기 주체성으로 부지런함을 발휘해서 일을 몇 번 해보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 주체성의 삶에 대해 회의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때와 정반대로 의기소침해서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탈진하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결국 자기 주체적 부지런함의 결과입니다.
게으름과 자기 주체적 부지런함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은 들어갔더라도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인내로 지키지 못하고 다시 세상을 향하여 주체성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기 주체적 부지런함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동력을 얻지 못하기에 게으름도 발생합니다.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가 신앙인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가 이루어질 때 게으름도 부지런함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며 그 뜻과 계획에 따라 바쁘게 움직일 때도 있으며, 완만한 행동이 진행될 수도 있으며, 쉼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언제나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내로 지켜내며,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삶은 진행되어 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게으름이란 바로 이러한 신앙의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게으른 자들과는 상종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적이지 못한 생활 태도가 옮기 때문입니다. 게으르거나 자기 주체적으로 부지런한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연합, 세상에 대한 죽음을 지켜내는 인내, 하나님만을 직면하여 갖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신앙적이지 못한 태도를 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요청입니다.
게으름과 자기 주체적인 부지런함으로 대표되는 하나님과 연합하지 못함은 다른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훈계합니다. 세상의 부모들은 자녀가 자기 주체적으로 부지런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녀의 인생이 공회전하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세상에는 부지런함에 대한 교훈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부지런함에 대한 교훈은 결국 게으름에 대한 경고와 맞물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도 바울의 게으름에 대한 경고를 부지런함에 대한 권고로 오해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게으름 대신 자기 주도적 부지런함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믿음에 대한 포기이자 복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라면 자녀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다그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잘못 된 일입니다. 자기 주도적인 부지런함은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하고 호흡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봄이 되어 산책을 나가면 새싹이 돋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잎사귀 하나가 냇물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듯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의 흐름을 타고 가면서 말과 행동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본을 보이고자 합니다. 8~9절을 보면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이 번 돈으로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장막 깁는 일을 하며 생계비를 스스로 충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도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연합하고, 세상에 대한 죽음을 유지하기 위해 인내하였으며,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상대하고 직면하는 상태에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장막 깁는 일도 하였고 이 일을 본보기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율법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숨겨진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먹고 사는 일을 위해서 절대로 사람들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장막 깁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호흡을 맞추는 과정 중에서 그 일을 해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보면 빌립보서의 내용과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5~16절을 보면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고받는 일이란 빌립보 교회에서 준 후원금을 사도 바울이 받았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보면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불과 3주를 체류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에 빌립보 교회는 두 번이나 생계비를 보내옵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는 같은 마케도니아 지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과도하다 싶기도 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장막 깁는 일을 하며 생계비를 충당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재정적 여력을 보고 장막 깁는 일은 선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통장의 잔고가 얼마나 있든, 빌립보 교회에서 얼마를 보냈든지 그것은 사도 바울의 행동을 결정하는 이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 보고 있었고, 십자가에서 재정이나 먹고 살길에 대해 죽은 마음을 인내로써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먹고 마시려 하였고 하나님만을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빌립보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보내게 하셨음에도 따로 장막 깁기를 시키십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 위해 재정과 상관없이 자신의 생계비를 스스로 충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재림을 잘못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교훈을 주는 사건이 됩니다. 재림에 대해 잘못 이해하던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는 ‘이제 예수님이 오실 텐데 일은 해서 무엇하나?’라고 생각하며 생업을 포기하듯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의 자기 일을 본보기로 보여줍니다.
믿음1과 인내와 믿음2를 늘 유지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게으르지도 않고 부지런하지도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항상 알맞습니다. 일어나야 될 일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입니다. 자기 주체적으로 부지런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게을러 보일 수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볼 때는 뭘 저렇게 부지런 떠나?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게으른 자도 아니며 부지런한 자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말씀은 믿음1과 인내와 믿음2를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의 게으름에 대한 말씀을 계기로 우리는 노동과 안식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일해도 안식을 범한 것이 아닌 이유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와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일에 마음을 쏟고 있으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안식일을 정해서 다른 모든 일을 그치고 하나님과의 연합만을 위해 집중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안식의 목적은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체성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늘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 늘 안식을 이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참 묘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질 때 안식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에 마음에는 평강이 생기고 영혼에는 쉼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이라는 안식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을 한 후에 안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이란 쉬기 위해서 일을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하여 일을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함이 없으면 진정한 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항상 연합되어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 6장 5절에서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과 일의 관계를 예수님과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은 안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안식이 쭉 이루어질 때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일을 하다가 지쳐서 안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흔히 교수님들이 안식년을 지킨다고 합니다. 6년 일하고 7년째는 쉬겠다고 하는데 성경적으로는 옳지 않은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안식은 일을 하고 쉬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은 일을 위한 원동력이고 바탕입니다. 안식을 바탕에 깔고 일을 할 때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안식과 일은 같이 가는 것이기에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도 시작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이러한 의미에서 안식일을 지키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부가 계속 고기를 잡다보니 어느덧 머릿속은 ‘어떻게 해야 고기를 많이 잡을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끊어졌으니 고기잡이는 더 이상 안식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항상 하나님과 연합한 상태가 됩니다. 안식일을 따로 지키지 않고 주일을 따로 지키지 않더라도 항상 주 안에 있기에 매일이 안식일이고 매일이 주일이 됩니다. 주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안식을 유지하는 중에 고기도 잡고, 살림도 하고, 직장에도 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연합한 안식의 상태가 유지되면 일은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를 통해 하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 안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연합함으로 쉬는 상태가 아니라면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창조주 하나님 품에 안겨 쉬고 있는 상태라면 게으름이나 자기 주체적인 부지런함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려두고 계심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몸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계획이 존재합니다. 그 계획이 없어질 때 우리의 생은 끝날 것이고 육체의 목숨이 끊어지면서 영은 수면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고 계신다면 이루시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이란 우리가 자의적으로 게으르거나 부지런 떨며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전제조건은 안식입니다. ‘내 아들 예수 안에 들어와서 창조주인 나를 만나라. 네 마음이 안식하는 가운데 게으름은 없어질 것이고 자기 주체적 부지런함도 없어질 것이다. 너의 생활 현장에서는 오직 나와 호흡을 맞추어서 해야 될 일만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안식하고 싶으시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야말로 안식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인내함으로써 하나님을 직면하고 상대하게 됩니다. 인내하지 못하여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안식은 없어집니다. 안식이 없기에 불안하고 떨리고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이를 악물고 인내로써 지켜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인내를 통해 믿음을 지켜내고 하나님을 상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십니다. 이 안식 상태가 이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마지막에는 교인들에 대한 안부가 이어집니다만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를 언급한 뒤에 게으름에 대한 경계를 합니다. 재림과 연관하여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짜 하나님과의 연합과 안식에 들어감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정말로 안식에 들어갔다면 ‘이제 예수님이 오실 텐데 일은 해서 무엇하나?’라는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은 올바른 믿음의 소유자일 수 없기에 사귐을 멈추고 떠나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안식은 노동과 활동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은 반드시 게으름도 없고 부지런함도 없이 가장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게으름도 부지런함도 아닌 하나님과의 호흡 맞춤이 우리의 생활 리듬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