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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후서-2

녹취문: 말씀 전하는 자와 듣는 자의 찰떡궁합_태승철 (살전 2:1~2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3.09|조회수65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말씀 전하는 자와 듣는 자의 찰떡궁합>의 줄거리 :

하나님의 말씀을 '권면'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곁으로 부르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권면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 있음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세상을 향한 바람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런 권면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 전하는 자와 듣는 자의 찰떡궁합

 

(데살로니가전서 2:1~20)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찰떡궁합은 너무나 마음이 잘 맞아 떨어지는 관계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와 그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이 잘 맞아떨어질 때 찰떡궁합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일어난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에서 바로 이러한 찰떡궁합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을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놀라운 변화가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말씀을 전하는 자와 말씀을 듣는 자의 찰떡궁합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2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싸움’이라는 표현이 뜻하듯이 사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많은 반대와 박해를 무릅써야 했습니다. 이러한 박해에는 강한 비난과 모함도 따라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비난과 모함의 내용은 3절의 내용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그릇되었고, 불순하며, 속임수라는 비난과 모함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그릇됨이나 불순한 의도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한 속임수 따위가 전혀 없었음을 강하게 변증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4절을 보면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가면을 쓰고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듯 극심한 박해와 각종 비난과 모함이 빗발치는 가운데 짧은 기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오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염려가 쓸데없는 걱정이 될 만큼 심한 박해와 방해 속에서도 너무나 훌륭하게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이 생깁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박해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터넷에서 무문별한 악성댓글이 문제가 되기는 합니다만 다른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는 한 얼마든지 자기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했을 때 외면과 무시를 당하는 일은 있을지라도 사도 바울의 시대와 같은 박해와 모함을 당하는 일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근본적인 마음가짐에서 보자면 외면과 무시는 결국 박해나 모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박해와 모함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 성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존에 살고 있었던 인격과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추구하며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인격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인격 상태의 근절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인격 상태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인격 상태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 안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기존의 삶의 방식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기에 박해와 모함의 대상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당한 수모와 고난의 이유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더는 수익을 얻지 못하게 된 주인은 사도 바울을 관청에 고발합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과 실라는 이 엉뚱하고도 부당한 고발에 의해 붙잡히게 되었고, 옷이 벗겨진 채로 매 맞고 발이 차꼬에 채워져 지하 감옥에 던져지는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경험하였고 그 뒤에 데살로니가로 오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이 세상에서 이익을 추구함과 소원과 바람을 이루고자 하는 삶의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근절해야 되는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3절을 보면 ‘우리의 권면’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했던 권면을 가리킵니다. 그 내용이 4절에서 이어집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권면 때문에 사도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도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릇됨이나 불결한 의도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속임수가 들어있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박해를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옳으면 옳을수록 강한 반발과 방해와 외면과 무시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권면’이라고 번역된 파라클레토스는 앞서 위로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원형인 파라클레오(παρακαλέω)는 ‘곁으로 부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3절을 직역해보자면 ‘우리의 곁으로 부름은 그릇됨이 없고, 불결한 의도가 없고, 속임수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박해를 받고 그릇되고, 불결한 의도가 있으며, 속임수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곁으로 부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곁으로 가는 부름입니다. 성경 66권 전체의 말씀과 그 모든 말씀의 의미가 축약되어 있는 십자가 복음의 내용이란 몸이 아직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곁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문제가 됩니다.

안정된 수입이 있는 한 가정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와 신분의 사람입니다. 남편은 우수한 기업의 사장이고 아내는 명망 높은 판사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세 자녀가 있는데 하나같이 공부를 잘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자기 앞길을 알아서 헤쳐 나갑니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외모도 준수합니다. 아름다운 단독 주택에서 살아가며, 노후가 보장된 상태에서, 자녀들의 모든 일이 형통한 가운데 잘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이 그렇게 안정되고 아름다운 가정이 진행되는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곁으로 가라는 부름입니다.

이 부부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고 누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마음이 이렇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가정과 인생을 등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곁으로 가는 것만을 요구하기에 기존의 삶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서는 이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4절에서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곁에 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곁에 와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보시고는 ‘너의 마음이 내 곁에 와 있으니 이제 다른 사람의 마음도 내 곁으로 오도록 전하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입니다. 말씀이 옳고, 순결하고, 정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 하나라도 이 세상을 향한 바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다는 기준을 매사에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전하는 자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야 할 어떤 일에 대한 바람을 갖고 있다면 마음이 하나님 곁에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럴 때 얼른 ‘내가 하나님 곁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이런 바람은 생길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으로 만족해야 하는 마음이 피조세계 속에서 어떠한 바람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바람을 갖게 된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또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서 내 마음은 하나님 곁으로 올라가야만 한다.’라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삶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끊임없이 적용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든지 바람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든 작든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가진 상태에서 말씀을 전했다면 그 말씀에는 반드시 세상에 대한 바람이 섞이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 아첨하거나 탐심의 가면을 쓰고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위해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바람은 죽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절대로 이러한 바람은 생길 수 없다는 기준을 적용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상태를 회복하여 말씀을 전하지 않는 한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이 세상을 향한 바람이 반드시 섞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좋은 것도 누릴 수 없게 합니다. 또 이 세상에서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한 어떤 좋은 것도 바랄 수 없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릇됨이 없고 정당했으며 순수했고 속임수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있음을 의식하고 기쁨을 욕구하고 주체성이 발생되고 있는 인격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곁으로 가야만 한다고 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되면 마음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상황이 벌어져도 기쁨을 느낄 수 없고 느껴서도 안 됩니다. 기쁨은 오직 하늘에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바람직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바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곁으로 가야만 한다는 말씀이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절대 진리임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가면을 쓴 채로 그릇되고 불결하고 정당하지 못한 속임수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려는 자들의 말은 이렇게 전해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바라는 인격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며 말씀을 전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현재 나의 인격 상태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지금 당장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곁으로 가야만 한다는 말씀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리게 됩니다.

따라서 기존의 인격 상태와 영적인 상태에서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정통일수록 내치고 외면하게 됩니다. 지금의 나의 상태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상적이지 않고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절대적 옳음입니다. 그 말씀이 이상적으로 느껴지고, 힘들게 느껴지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면 그만큼 나 자신이 죄의 구렁텅이 속에 깊이 빠져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마음이 통째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곁으로 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적인 것으로 느껴진다면 나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러한 돌아봄은 일어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은 내쳐지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가면을 쓰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6절을 보면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기존의 인격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기존의 인격 상태에 대한 걸림이나 부딪힘을 싫어합니다. 나의 인격 상태가 깨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인격 상태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아첨하는 말을 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부름을 외면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 얻고 싶은 것을 향하는 바람과 소망의 기운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스며듭니다. 결과적으로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표방할지라도 아첨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기존의 인격 상태에 걸림이 없는 아첨하는 말을 좋게 받아들입니다. 자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몰아세우지 않고, 깨뜨리지 않고, 갈등을 겪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심한 박해와 모함 속에서도 사도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많은 박해와 비난을 받고, 외면당하고 무시당할지라도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부르신다는 말씀이 바로 진리이며, 그 말씀대로 마음은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제시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고 싶어도 이 세상 가치에 중독된 죄인이기에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 가치를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모두가 다 세상에 매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진리라고 받아들였기에 그리스도 연쇄 과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란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내 몸으로 살아갈 삶이 방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 속의 정답을 받아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게 됩니다. 단 한마디의 말과 하나의 행동도 하나님의 정답 이외의 것을 말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박해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말씀 앞에 비추어 봤을 때 자신들의 부족함은 말씀을 내치는 사람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부족한 인격과 영적 상태에서 달랐던 점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상태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진리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일수록 죄성으로 인해 그 말씀대로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기준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엄청난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 자신들도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13절을 보면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씀을 전한 기간은 짧았습니다. 극심한 박해가 있었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는 비난과 모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해와 비난 속에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상적으로 느껴지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오히려 그 말씀 앞에서 자신들이 비정상인 상태라고 느꼈습니다. 이 말씀을 당장 수행해서 마음은 이 땅을 떠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예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가야만 하는데, 자신들의 죄인 됨 때문에 그럴 수 없음을 깨닫고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을 이상적으로만 여겼던 상태로 끌고 갔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며 주체성이 발생되는 인격의 근원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이 마음을 세상에 붙이고 있는 상태를 일단 긍정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조차도 마음이 땅에 붙어있는 상태를 인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말씀을 전하고 듣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더는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위탁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위탁받지 못했다는 증거는 이 세상을 향해 바람을 갖고 있는 교인들의 상태를 권장하고 독려하고 위로하고 격려함으로 나타납니다. 쉽게 말해 ‘당신들의 세상에 대한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이 세상에 대해 바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듣는 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준은 하나입니다. 우리 마음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과 관련해서 하나님 곁으로 가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영원히 오류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전하는 자도 하나님 말씀 앞에 서 있고, 듣는 자도 하나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고, 하나님으로 만족했다면 세상을 향한 바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바람이 나올 때마다 이 기준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더 가지고 싶고,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가진 나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인정할 수 있으며,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곁으로 가기를 소원할 수 있습니다. 전하는 자든 듣는 자든 이것을 자기에게 끊임없이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전하는 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고, 듣는 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전하는 것도 듣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곁에 가서 머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유효해집니다.

나를 기준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면 놀랍게도 그 말씀 자체가 우리의 기준이 되어주십니다. 죄 속에 있는 우리의 인격 상태를 끌어올려서 변화시켜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해서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절대 진리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내용으로 하는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변수로 가득 찬 삶의 현장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아무쪼록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고 이끌려서 예수님과 같은, 사도 바울과 같은, 사도 베드로와 같은,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같은 믿음을 드러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곁으로 부르심을 핵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내용을 절대 진리로 인정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그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 나를 이끌어가는 기적의 여정이 날마다 확인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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