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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탄이 아무리 막아도 상관없는 인생>의 줄거리 :
극심한 박해로 인해서 데살로니가를 떠난 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재방문을 원했지만 결과적으로 못 가고 맙니다. 사탄이 막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사도 바울의 염려처럼 데살로니가로 다시 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냐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믿음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사탄이 아무리 막아도 상관없는 인생
(데살로니가전서 3:1~13)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 이러므로 나도 참다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먼저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번역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는 시점에 디모데를 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그를 보내었노니’라고 하였고, 6절에서는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라고 하여 시점이 뒤죽박죽입니다. 사실 관계를 보자면 사도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에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녀온 디모데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보고를 듣고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3장 말씀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독특한 주제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막힘을 경험합니다. 안 됨, 방해 받음, 지연 됨 등으로 나타나는 모든 일들을 삶에서 경험하는 막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통하여 이 막힘의 문제가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여줍니다.
3장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파송한 일과 관계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극심한 박해와 견디기 어려운 환난 가운데 있음을 알았기에, 교인들의 믿음을 굳게 해주기 위하여 방문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갈 수 없었기에 대신 디모데를 파송합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 활동을 했던 기간은 고작 3주 남짓이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의 폭동이 일어나서 극심한 박해를 당했고,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었기에 베뢰아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추적하여 베뢰아에서도 박해를 계속하였고 사도 바울은 다시 아덴(아테네)으로 옮겨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쫓기듯 이동을 계속해야만 했던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한 가지 불안이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당할 박해와 환난으로 인해 마음이 안절부절못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말씀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어떤 지역보다 강한 박해와 극심한 환난이 주어졌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 없었다면 몰랐을까 진지하게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이들이 극심한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심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 본문 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굳건한 것을 듣고 크게 안심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이 심히 염려할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극심한 박해와 환난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심정으로 데살로니가에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사탄이 막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장 17~18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으로부터 사도 바울의 걱정이 얼마나 컸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걱정이 심했던 만큼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는 바람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데살로니가에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고 싶었지만, 사탄이 막았다고 표현하며 대신 디모데를 보냅니다. 그러나 정작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를 떠난 이후에 극심한 환난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적같이 믿음을 훌륭히 지켜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방문 계획을 사탄이 막아서 가지 못하는 효과를 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탄의 막음이 사도 바울이 본래 의도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함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박해는 신앙의 여정을 막는 막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 막힘을 뚫고 나갔고 이들을 걱정하던 사도 바울의 의도가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이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메시지가 잘 함축된 부분이 앞서 살펴보았던 2장 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절대 진리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2장 3절에서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 권면으로 번역된 파라클레오(παρακαλέω)는 곁으로 부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금 곁으로 오라고 부르심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갈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전했던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절대 진리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는 하늘과 통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통하자 이 땅에서는 막힘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이라는 표현은 박해당하게끔 운명지어졌다는 뜻입니다. 박해는 막힘입니다. 그러나 이 막힘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권면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권면이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에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곁으로 오라고 부르심입니다. ‘너희의 마음은 하늘에 있는 내 곁으로 와야 한다.’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이 권면을 뺄 수도 없고 더할 수도 없는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는 하늘로 가야 한다는 확정적인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하여 통한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의 막힘은 있을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막힘을 뚫어낸 것이고,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에서 막힘이 없어짐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의 방문이 실패로 돌아간 일은 막힘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고자 했던 사도 바울의 의도 자체는 전혀 막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방문할 필요조차 없었고 더더욱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말을 할 정도로 걱정하는 마음을 주신 이유는 그만큼 강렬하게 가고자 했음에도 막힘이 나타났음을 드러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막힘과는 무관하게 사도 바울의 의도는 전혀 막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며, 주체성을 갖는 인격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이 마음을 채움으로써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느끼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을 통하여 무조건 하늘로 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씀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이 땅에서 마음의 채움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늘로 올라감으로 마음이 채워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고, 마음이 이 땅에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이 땅에 대해서 생길 수 있는 조그마한 바람조차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땅을 향한 바람을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며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같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 앞에 놓여있는 인생의 막힘뿐만 아니라 나와 직접적인 관계없이 진행되어가는 주변의 모든 환경도 막힘이 없어지게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막힘은 있으되 막힘의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방문은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말할 정도로 하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매우 큰 막힘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크게 느껴지는 막힘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을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었고 막힘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방해와 안 됨과 같은 막힘이 벌어지더라도 마음이 하늘로 통해있기만 하면 막힘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2장 18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막는 경우와 하나님이 막으시는 경우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 사도행전 16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아시아, 즉 지금의 튀르키예 남부 지역을 전도하기 위하여 진로를 잡고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획은 막혔고 아시아 전도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탄이 막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7절을 보면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려는 일이 막혔는데 예수의 영, 즉 성령께서 막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께서 막으셔서 이루어진 일이 유럽 전도의 시작이 되는 마케도니아 전도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유럽 전도에서 첫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고,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 지역의 비두니아를 전도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지만 성령이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가게 된 마케도니아가 유럽 전도의 시작이 됩니다.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이렇게 막힘으로부터 시작된 두 교회가 다른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굳건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 두 교회는 다른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환난 중에도 기쁨이 넘쳐났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을 굳건하게 지켜나갔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의 막으심과 사탄의 막음을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같은 막힘인데도 비두니아에 가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성령이 막으셨다고 했고, 데살로니가에 가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사탄이 막았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특정한 지역으로 가려던 계획이 막혔다는 점에서는 두 사건이 동일합니다. 전도를 위해서 혹은 전도 받은 사람들의 믿음을 위해서 가려했다는 점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막힘은 자주 일어납니다. 일이 안 되는 것도 도달하려는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없는 막힘입니다. 이렇게 삶에서 경험하는 막힘이 성령이 막으시는 것인지 사탄이 막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십자가가 기준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막는다면 사탄이 막는 것입니다. 마음이 땅에 대해 죽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이란 마음이 땅을 좋아하고 땅을 향해있고 땅에 붙어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막힘이 일어난다면 사탄이 막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 베드로가 막았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상태는 땅이 더 좋았습니다. 아직 땅을 떠나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주님의 죽음을 막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에 대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땅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게 마음을 땅에 붙이게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땅에 붙인 자들에 의해 막힘이 발생했다면 사탄이 막는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 의한 의도적 막힘이 아닌데도 내가 관계된 일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특별히 앙심을 품은 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삶의 여기저기가 꽉꽉 막힌다면 성령이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막힘 자체가 아닙니다. 성령이 막으시든 사탄이 막든 권면을 듣는 자들에게는 결과적으로 막힘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오라는 부름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듣고,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절대 기준으로 붙잡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막힘은 막힘이 아닙니다. 성령이 막으신다면 당연히 그 결과는 통함으로 이어지게 되고, 행여 사탄의 막음조차도 막음의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막힘이 막힘으로 이어지지 않는 예는 성경에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사건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사탄에 의한 막힘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여 십자가 형벌에 내어준 일 또한 사탄에 의한 막힘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사건 또한 사탄에 의한 막힘이었습니다. 모두 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마음을 이 땅에 붙이고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들이고 사탄에 의한 막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도 요셉에게서도 막힘은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도 바울을 오랜 기간 보며 말씀을 들었던 고린도 교인들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온전한 믿음을 유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고자 하였으되 사탄이 막았고 그 막음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고린도 교회는 환경적인 막힘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세상 기운에 막히게 됩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지역에서 가장 발달한 상업 도시 중 하나였고 극심한 음행이 이루어지던 특별히 세상 기운이 강한 곳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만큼 세상 기운에 막혀있었고 아무런 박해가 없음에도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한다는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끼리 막힘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땅을 떠나라는 권면의 말씀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내가 마음을 땅에 붙이고 있다면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것은 진리에서 벗어난 일이다.’라고 믿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하늘로 통하자 극심한 박해가 있었음에도 이들의 믿음은 박해를 뚫고 나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고백할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염려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사도 바울의 마음을 그렇게 주장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막힘이 주어졌음에도 실제로는 전혀 막힘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도 환경적으로 일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강하게 열망하는 일들이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적인 막힘은 전혀 막힘이 아닙니다. 위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절대적 진리로 알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막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무조건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이 땅에서 통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막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도 막힘은 없습니다. 막힘처럼 보이는 상황과 현상이 주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뚫어야 할 막힘이라면 뚫게 될 것이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막힘이라면 그것은 막힘이 아닌 통함으로 이어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의 아시아 선교를 막으시고 유럽 선교를 이루심으로써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극심한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믿음과 기쁨을 잃지 않는 탁월한 영성의 교회들이 생겨났던 것과 같습니다. 삶이 막히고 안 되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은 막힘이 아닌 하나님이 다른 길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끊임없이 내 마음과 하늘 사이에 막힘이 있는가를 돌아보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막혔다면 이 세상을 향하여 갖게 되는 바람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도 예수의 죽음을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치고는 이상하게도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서 말한다고 해서 이들이 돌이키거나 믿음이 굳건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앞서 1장 4~5절에서는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이 크게 염려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우리에게 설교를 위한 재료로 쓰시기 위해 역사하신 결과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강렬하게 데살로니가에 가고 싶어 했는가를 보여주시면서, 우리가 이루고 싶어 하는 일이 있을 때 막힘처럼 보이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은 막힘이 아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은 겉으로 보이는 막힘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계획을 갖고 최선으로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오늘도 24시간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막힘이 없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경계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갈 때, 사방이 막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것은 막힘이 아닙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뚫어야 할 막힘이라면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셔서 뚫고 나가도록 나를 장갑 삼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막힘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막힘처럼 보이는 모든 일이 아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과연 누가 막힘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막히듯이 답답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 마음과 하늘 사이를 뚫는 자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막힘처럼 보이는 모든 답답한 현상이 결국은 형통인 것을 체험하게 하시고 기쁨과 감사를 이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