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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후서-2

녹취문: 아는 건 됐다, 이젠 더욱 많이 힘쓰라_태승철 (살전 4:1~1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3.13|조회수9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는 건 됐다, 이젠 더욱 많이 힘쓰라>의 줄거리 :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서 배운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잘 수행하였으며 또한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많이 힘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과 3주 동안 회당에서 가르치신 내용의 양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알게 된 것을 더욱 많이 힘쓰라고만 하십니다.

 

아는 건 됐다, 이젠 더욱 많이 힘쓰라

 

(데살로니가전서 4:1~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본문 1절에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9~10절을 보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더욱 많이 힘쓰라, 더욱 그렇게 행하고’라는 말씀은 이제까지 서신들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특이한 표현입니다.

1절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친 것에 대해 잘 행하고 있으니 더욱 많이 힘쓰라는 내용이었고, 9~10절은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잘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게 힘쓰라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슨 의도에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 조금 의아하고 낯설기도 하지만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들에는 이미 알아야 될 것을 다 알았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어떻게 행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어떻게 행해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대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에 더해 생활 속에서 그러한 일에 더욱 힘쓰라 요청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생활 현장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지식을 더 제공하지는 않을 것임을 드러냅니다. 실제 생활 현장에서 이미 배운 바 알고 있는 내용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더 가르치는 것은 의미가 없기에, 배운 바대로 행하는 일에 더욱 힘쓰기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더욱 힘쓰라’는 말이 강조되는 이유는 믿음 생활의 성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이란 날마다 더 힘을 써야 진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믿음과 관련된 구원이나 영생이나 천국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 위해 힘쓸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뒤에도 힘쓰고 신경 쓰고 관심을 갖는 일에 대해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힘쓰는 일과 대상이 똑같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거룩함’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힘써서 살게 되면 반드시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2절을 보면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 배운 바가 없는 사람들의 삶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거룩함이 나타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힘쓸 때 절대로 분수를 넘지 않게 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자면 대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듣고 배운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듣고 배운 내용대로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형제 사랑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해 더할 말이 없을 정도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을 배웠기에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가르침대로 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기간이 불과 3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친 후에 폭동과 박해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쫓기다시피 베뢰아로 가야만 했지만, 유대인들은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사도 바울을 박해하였고 이윽고 아덴(아테네)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게서 받은 영적인 지식의 양이란 결코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종교인으로 살던 때를 생각해보면 수년, 수십 년을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고작 3주간의 가르침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이들은 설교를 들을 수도 없었고 자유롭게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보급될 수 있는 형태의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역이었다면 구약성경은 존재했기에 접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데살로니가는 이방 땅이었습니다. 당시의 성경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문헌들은 대단히 귀하게 여겨졌기에 이방 지역에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해 더 이상 새롭게 가르칠 내용이 없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1절을 보면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지금 하는 일을 더욱 힘써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10절의 형제에 대한 언급에서도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4~6절을 보면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언뜻 보면 이러한 내용이 본문의 중심 내용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되는 거룩함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대로 살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의 보편적 특징은 성적 문란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수를 넘지 말라는 표현 또한 성문제에 대해서 분수를 넘지 말라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앞서 골로새서에서도 제일 먼저 음란에 대한 훈계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분수를 넘지 말라는 표현은 꼭 성적 문란함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골로새서에서 언급되는 대로 탐심, 사욕, 악한 정욕을 갖게 하는 모든 일이 분수를 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돈 버는 일에서도 분수를 넘을 수 있고, 부모 자녀 관계에서도 분수를 넘을 수 있고, 회사에서도 분수를 넘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거룩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점선으로 만들어 놓으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이 땅에서 실선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분수를 넘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점선 바깥으로 선을 긋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 안에서 발생하는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이 분수를 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신 이 세상에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분수를 넘지 않고 이방인들과 구분되는 거룩한 삶을 사는 방법을 이미 다 배웠으며 그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더 가르칠 것이 없으며 지금 하는 일에 더욱 힘쓰라 말했습니다. 이러한 간결한 표현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에베소서 등에서 하신 많은 가르침을 생각하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마치 ‘너희에게는 딱 이 정도만 알려주겠다.’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고린도 전후서에는 다양한 주제의 훈계가 등장합니다. 로마서에서도 복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전후서에는 다른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대해서, 형제 사랑에 대해서 더는 할 말이 없다. 지금 잘하고 있으니 더욱 힘쓰기만 하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위로 아래로 지식을 더 보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체 3주 동안 무엇을 전했기에 이러한 일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갈라디아서 1장 8~9절을 보면 그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전한 복음이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것을 강하게 요청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다른 모든 서신에서도 끊임없이 발견되는 사상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나님이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 작용과 좋음을 확신하는 대상으로 채우려는 욕구 작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누구의 주체성으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감을 유일한 있음으로 의식하고,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의 대상으로 욕구하게 됩니다. 이 세상 삶을 위해서 하나님의 유일한 주체성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전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한 복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외에 더 이상 전할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늘로 올라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유일한 있음으로 느끼고,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욕구하며, 하나님을 유일한 주체되심으로 믿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에 남아있는 몸은 오직 형제 사랑을 위해 쓰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의 몸을 장갑으로 끼시고 형제와 관계해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3주 동안 전한 말씀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형제를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전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성경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거룩함이라는 결과가 나타나는 삶을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분수를 넘지 않으며 하나님의 손이 나를 장갑 삼으시고 계획하신 점선을 실선으로 바꾸어가는 형제 사랑의 삶을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한 이유는 알려고만 했지 행함에 더욱 많이 힘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새로운 설교, 새로운 깨달음만을 추구해왔습니다. 그러다 질리면 예배당을 떠나게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천명 이상의 교인들이 모이는 대형교회들을 제외하고는 초토화되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주일에 예배당에 출석하는 사람이 200만 명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모양이 된 이유는 알려고만 했지 행함에 더욱 많이 힘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서 엄청난 지식들이 홍수처럼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배운 대로 실제 생활 현장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기독교 종교인들이 평생 해온 일이란 새로움을 듣기 원했고, 새로움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관련된 이야기, 신앙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자꾸만 새로움만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고작 3주 동안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고작 3주 동안 받은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실제 생활 속에서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그대로 더욱 힘쓰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더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모르는 사람들은 십자가 생활화를 새로움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한편 이미 이론적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라는 말을 듣고 수긍한 후에도 다른 지식적인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어쩌면 영원히 구원과 상관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십자가 생활화에 대해 알았다면 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부모 앞에서, 직장에서, 돈 문제 앞에서 건강 문제 앞에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감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문제의 해결을 소원하는 대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기를 소원하기 위하여 씨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이 움직이시며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제 생활 속에서 평안을 찾는 일에 주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면서도 이러한 일을 해나가는 사람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 종교인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지식과 예화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성경 공부에 할애해왔습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서 십자가는 생활화되지 못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형제를 사랑하는 일도 행할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고작 3주 동안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조차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실제 생활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복음을 전했을지는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자신이 아는 유일한 사실인 십자가 사건을 복음으로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십자가 죽음이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입구임을 전했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길을 따라 부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느끼게 되고,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장갑으로 끼시고 모든 인간관계를 당신의 생각대로 해나가시며 형제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은 새로운 복음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고작 3주 동안 전해진 복음의 내용을 듣고 실제 생활 속에서 행하게 되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과 호흡이 맞고, 하나님과 더욱 더 친해지며,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새로워져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지식의 새로움, 성경 공부의 새로움, 설교의 새로움을 찾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실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의 새로움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욱 더 관계가 깊어지고, 하나님과 더욱 더 친해지며, 하나님으로 더욱 더 부자가 되는 새로움을 추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결코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잡한 것은 십자가를 생활화할 때 부서져야 하는 옛사람의 습관과 생각과 언어체계입니다. 우리가 힘써야 될 일은 복음을 많이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대로 살기 위해 더욱 힘써야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 방송으로 말씀을 전하며 듣고, 주일에는 온라인 교회 모임으로 말씀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무엇인가 덧붙여서 말씀을 드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새로움을 느끼셔야 할 대상도 설교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더 친해지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영적 상태가 새로워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알았던 말씀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새로운 말씀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오늘의 번제나 온라인 교회 모임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새로운 지식의 추구가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 십자가로 살아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로워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하나님의 부르심, 이 땅에서 나의 몸을 성령께서 장갑으로 끼실 때 이루어지는 형제 사랑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가담하여 사위일체를 이룸으로써 온전해집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데는 3주도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실제 생활 현장에서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죽고, 부활하여 다시 살아난 마음은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고, 그래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인정하느라 씨름하며, 이 땅에 남아있는 몸은 성령의 장갑이 됨으로써 삼위일체의 움직이심과 존재하심에 가담하여 사위일체를 이룸은 실제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지식은 없습니다. 이것을 실제 생활 속에서 해나갈 때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게 되고, 측량할 수 없는 주체성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서 새로워지게 됩니다.

 

어떤 학자는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사도 바울의 서신중에 가장 가벼운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에서 언급된 모든 내용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새삼스럽게 덧붙일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을 뿐입니다. 그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상하게 마케도니아 지방의 교회들은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다른 교회들이 드러내지 못한 온전한 믿음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지금까지 해온 일들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방인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거룩함이 태양처럼 빛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점선만을 따라 사는 분수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부럽고 샘이 날 정도입니다.

아직도 무엇인가 지식적으로 궁금하시거나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있으시다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고작 3주 동안 전해진 복음을 받아들였을 뿐이었습니다. 그 복음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 생활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위일체를 이룸으로써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날로 새로운 깊이의 영적인 관계를 행하며, 하나님의 관계에서 주어진 새로움에 취해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십자가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게 해주시옵소서. 실제 생활 속에서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하여 더욱 힘쓰는 삶이 되도록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내리셨던 은혜를 우리에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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