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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안에서 살다, 자다, 깨면 천국>의 줄거리 :
3주라는 짧은 기간 가르침을 받다 보니 그랬을까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을 잘 믿다가 재림 전에 죽은 사람들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런 오해와 두려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해 주신 말씀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살다가 육체가 죽으면 예수님 안에서 잠자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재림 때 깨어나면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살다, 자다, 깨면 천국
(데살로니가전서 4:13~18)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예수님 안에서 살다 죽는 것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잠을 자는 것입니다. 잠을 자다가 주님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실 때 깨어나면 이제 천국이 삶의 터전이 됩니다. 거꾸로 말해 예수님 밖에서 살다 자다가 깨면 지옥이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3주 간의 전도 활동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회당에서 안식일에 세 번 가르침을 받았고, 안식일이 아닌 날에는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방인이었던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적 내용은 사도 바울의 사상이나 교리나 이론이 아닌 증언이었습니다. 증언(證言)은 말 그대로 어떤 사실과 사건에 대해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였고, 그 예수님 안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과 유일하신 좋음과 유일하신 주체성 되심을 사실로써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물로 약속된 하나님의 손과 같은 성령님에 대해서도 증언하였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증언 중에서 맨 마지막에 제시된 증언이 바로 세상 끝에 이루어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이었으리라 추측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증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박해를 받아 데살로니가를 떠나야만 했고, 이들은 짧은 기간 동안에 전해 들은 재림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 떠난 이후에 데살로니가 교인들 사이에서는 혼선이 생겨나게 되었던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부족한 이해를 보충하기 위해 본문을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떤 혼선을 빚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살아생전에 이루어지리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착실하게 믿던 형제나 동료가 죽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게 되면 재림하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구원도 없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죽음은 슬프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슬픔과 두려움의 이유가 세상 사람들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떠남이 아쉬워서 슬프고 두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살아생전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못 만나고 죽는 것을 슬프고 두려운 일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정확한 가르침을 베풀어줍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살펴본 본문에서는 특별히 자는 자들에 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예수님 재림 전에 육체가 죽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을 보면 육체의 죽음을 잠을 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사실 이러한 표현은 낯설지 않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영면(永眠)에 들어갔다.’라는 표현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잠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다만 표현상으로는 사도 바울이 말한 잠을 자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영면이라는 표현에는 아쉬움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육체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아쉬워서 순화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의미에서 육체의 죽음을 잠을 자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영입니다. 인간의 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마음의 공백입니다. 마음의 공백이 있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은 육체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다만 활성화되지 못한 수면 상태가 될 뿐입니다. 영인 마음이 활성화되는 상태가 의식입니다. 의식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합할 몸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이 결합하는 몸이 육체의 몸이냐 신령한 몸이냐는 것입니다. 한번 만들어진 영은 죽지 않으나 결합할 몸이 없으면 의식이 깨어있는 채로 활성화되지 못한 채 수면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 영의 수면 상태는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언어로는 영의 상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몸이 죽더라도 영은 죽지 않고 잠을 자게 된다는 표현을 통해 이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4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 안에서 잠을 잔다는 표현이 특이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해보면 ‘예수님을 통하여 잠을 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서는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좋음을 추구하지도 못한다. 오직 나의 있음과 좋음은 하나님께만 적용된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 위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주체성을 받아들이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육체가 죽게 되면 그 마음은 예수님을 통해서 잠을 자게 됩니다.
우리의 영인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다가 몸이 죽을 때 마음은 연합할 몸이 없기에 잠을 자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들어가 살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잠을 잡니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갈 수 있는 곳 또한 당연히 하나님의 보좌 우편입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잠을 잔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 안겨서 잠을 잔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버지 품에서 잠을 자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거지 나사로는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음부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23장 43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한 강도에 대해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이 시간과 공간의 차원 바깥으로 나가서 잠을 자는 상태를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로는 적중하여 표현하기가 불가능하기에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5절을 보면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말씀이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사도 바울이 직접 주님께 받은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들로부터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죽은 뒤에 그저 떠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서 잠을 자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주님께 받아서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말씀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잠을 자는 상태를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쾌적함, 안온함, 안락함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추위에 떨다가 따듯한 욕조에 들어가는 상황을 상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따듯한 온기 속에서 몸이 풀어지는 그 느낌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의 쾌적함이자 안온함입니다. 다만 어떤 것을 경험했고 어떤 상상을 하든지 아버지 품 안에서 느낄 쾌적함이나 안온함에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주님 안에 들어가서 이 세상을 살다가 몸이 죽으면, 마음은 몸을 떠나 아버지 품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그럴 때 느끼는 쾌적함과 안온함과 안락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영이 아버지 품에서 잠을 자다보면 모든 죽은 자들에게 새로운 몸을 부여하시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의 사건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육신의 죽음과 영이 잠을 자는 것에 대해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이 땅을 살던 자들은 성령에 의해서 몸이 움직이며 삽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몸을 통해 이루시려는 뜻이 다 끝나게 되면 몸은 죽고, 영은 예수님을 통해서 도달하는 아버지 품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영이 몸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창조주이신 아버지 품에서 잠을 자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쾌적함과 안락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주시는 휴식과도 같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음이 천국을 바라보고 느끼면서도 몸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괴로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땅에서 이루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살았던 우리에게 ‘지금까지 수고가 많았다. 이제 내 품에서 편히 잠을 자고 있어라. 그리고 내 아들 예수의 재림 때가 되면 너는 새 몸을 입을 것이다.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자.’라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날 일로 믿고 있었기에 육체의 죽음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죽는다면 예수님도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육체의 죽음과 영이 잠을 자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줍니다.
이러한 말씀에 따르자면 죽음은 슬퍼할 이유가 아닙니다. 소망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없기에 죽음을 슬퍼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살다가 몸이 죽은 사람은 그 영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 품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 잠을 자다가 재림의 때가 되면 깨어나게 됩니다. 육체의 죽음은 영이 잠을 자는 일로 이어지기에 하나도 무서워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이 세상에서 경험해본 가장 쾌적함과 안온함과 안락함보다도 몇백 배, 몇천 배는 더 뛰어날 것이기에 반가워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17절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쉽게 오해됩니다. 공중이라고 하니 붕 떠서 지구를 떠난 어딘가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 말씀에서 언급되는 공중에서 주를 영접함이란 그런 현상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후서 3장 10절을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하였습니다. 이러한 묘사를 보면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애초에 지구와 우주 자체가 없어지는 상황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함이란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 찢어져 없어지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결코 지구에 발을 딛고 있다가 붕 떠서 하늘 중간쯤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고린도전서 15장 51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품에서 잠들어 있던 영이 예수님의 재림 때 깨어나서 홀연히 신령한 몸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차원이 열리며 지구와 우주를 포함한 시간과 공간의 세계는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새롭게 열리는 차원을 공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상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힌트가 16절에 제시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죽은 자들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 때 특별히 불리한 점은 없다는 언급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안심시켜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재림 때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언급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같은 의미의 말을 반복하여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실은 전혀 다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호령(號令)은 군사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28절에서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는 단순히 매장된 시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모두를 가리킵니다. 지금이나 당시에나 사람의 사후 모습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매장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로마의 박해를 받아 화형을 당해 죽은 자나 사자 밥이 된 사람들은 무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죽은 육신을 매장하든 화장하든 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호령은 잠을 자던 모든 영을 깨우는 소리라 할 수 있습니다. 잠을 자되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던 자들은 하나님 품에서 잠을 자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지옥이 아닌 음부에 들어가 잠을 자게 됩니다. 호령은 이들이 모두 깨어나는 때입니다. 지구상에서 살다 죽은 모든 인간들은 아버지 품에서 잠을 자고 있든지 음부에서 잠을 자든지 모두 이 호령을 듣고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천사장의 소리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살아있는 자, 하나님 품에서 자다 깨어난 자, 음부에서 자다 깨어난 자가 동시에 존재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천사장의 소리는 이렇게 깨어난 자들을 구분하는 소리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자 중에도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을 것이며, 죽은 자 중에도 예수님 안에서 잠자던 자와 음부에서 잠자던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천사장이 소리를 내며 택하신 자들을 구분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순서대로 풀어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간과 공간이 찢어지는 상황에서 일어나기에 우리의 감각과 표현으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상태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시간별로 차근차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서 나팔을 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살아있던 자들이나 죽었다가 깨어난 자들이나 모든 사람들의 주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 한 곳으로 집중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천둥이나 번개가 치면 생각을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란 모든 사람이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집중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보이는 가운데 예수님이 임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자들, 음부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난 자들, 살아있는 중에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 살아있는 중에 마음이 예수님 바깥에 있는 자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 창조 이래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 적이 없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모든 사람들이 볼 텐데, 이때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우렁찬 함성과 탄식이 동시에 들리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실 때 모든 인간의 영인 마음은 하나님의 좋으심 앞에서 기절초풍하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고, 주체성을 인정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믿고 추구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좋으심을 실제로 대면할 때는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알려주신 하나님의 좋으심을 등지고, 이 세상 가치 따위를 하나님보다 좋다고 여기며, 세상에 대한 바람으로 일희일비하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좋으심 앞에서 한숨 쉬고 탄식하며 후회의 비명을 질러댈 것입니다.
그 좋은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살기 위하여 천국에 적합한 신령한 몸을 입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좋은 하나님과 영원히 결별하여 지옥에 적합한 영의 몸을 입고 살아갈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모든 사람은 이렇게 두 종류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육체의 죽음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이 죽은 지 200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의 영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잠들어 있는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1초도 흘러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접하며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았으니 그 말씀을 지금 적용해도 괜찮겠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 품에 잠들어 있는 사람은 사도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을 두고 살던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 품에서 1초도 흘러가지 않은 시간 바깥에서 이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 할 쾌적함과 안락함 가운데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느라 수고했다는 하나님의 위로 속에서 잠들어 있던 모든 사람들은 주의 호령과 함께 깨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홀연히 신령한 몸을 입고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탄성을 지르며 그 좋은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천국의 삶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죽음은 결코 걱정하거나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도 손해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육체가 죽는 그때 여러분의 영은 상상도 하지 못할 가장 쾌적하고 안락한 아버지 품속에서 이루어지는 수면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시간 바깥에서 1초도 흐르지 않은 상태로 잠을 자고 있다가 주님의 재림 때에 순간 신령한 몸을 입고 상상도 할 수 없이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가 할 일은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음이 주님 안에 머물게 하는 것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생활 현장 곳곳에서 주님의 십자가만을 기억하며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육체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끼며 빨리 죽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