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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후서-2

녹취문: 재림 날짜를 안 가르쳐 주시는 이유_태승철 (살전 5:1~1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3.18|조회수65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재림 날짜를 안 가르쳐 주시는 이유>의 줄거리 :

예수님이 재림하실 구체적인 때를 가르쳐주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특정한 날짜를 알아서 그날을 대비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 숨은 의도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은 각자가 자기만의 재림의 때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재림 날짜를 안 가르쳐 주시는 이유

 

(데살로니가전서 5:1~11)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짜를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림 날짜를 가르쳐주신다면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이에 대한 대답을 줍니다.

 

사도 바울은 3주의 짧은 기간 동안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복음과 관련된 사실들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의 마지막에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2절을 보면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우리는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재림을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께서도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2~44절을 보면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도둑을 막기 위해서는 항상 대비를 해야만 됩니다. 오늘 도둑이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지키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도둑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24시간 경보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만 도둑을 막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렇게 예측할 수 없이 일어나겠지만 언제나 그 재림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림이 언제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재림의 당사자이신 예수님조차도 그때를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림 날짜를 알려주신다면 어떻게든 준비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밤에 도둑같이 임하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일로 계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재림 날짜를 가르쳐주시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날을 한정하여 대비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2,0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2033년 3월 17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면 이제 사람들은 10년 동안 열심히 재림을 준비할 것입니다. 혹은 아직 10년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면서 재림 직전까지는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재림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결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올바른 태도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특정한 날짜를 가르쳐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한편 이것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모든 날을 재림의 날로 생각하며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평생의 모든 시간, 모든 날짜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모습을 바라시며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 날짜는 알 수 없으나 재림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을 놓쳐서 낭패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재림의 날을 염두에 두고 준비된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순간이 언제가 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도록 준비된 자들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언제 만나도 좋도록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날을 그리워하고 기대하며 살아가기를 바라시며 재림의 날짜를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 속에는 그 날짜가 정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르쳐주시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년 후 2033년 3월 17일에 예수님의 재림을 결정했다고 가르쳐주셨다면 100년에 태어난 사람, 1,000년에 태어난 사람처럼 도무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수명을 이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주의 재림을 완전히 남의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일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날 것처럼 준비된 자가 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1장 36절에서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본문 4~6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짜일지는 모르지만 어둠에 거하지 않고 빛의 아들들로서 낮에 거하며 항상 깨어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일어나도 상관없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낮에 거한다, 잠을 자지 않는다는 표현은 우리의 의식 상태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 우리를 비추는 빛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는 곧 이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해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족이나 모든 대상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욕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주체성의 대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 빛을 발하기에 더는 세상의 가치들이 빛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몸의 건강, 자녀의 형통, 직장에서의 승진, 명품 등과 같이 이전에는 빛처럼 추구할 대상으로 보이던 일들이 어둠 속에 묻히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빛을 발하시는 의식 상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낮에 거함이고 깨어있음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의 빛이 의식에 비치게 되는 공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가 항상 십자가를 기억하며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을 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의 빛은 비치게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빛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빛의 자녀이자 낮에 거하는 자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의식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없다면 하나님과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의식에서 돈이 빛인 상태에서는 모든 생각이 돈을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전혀 준비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 있는 상태이자 잠을 자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고 있지 않는 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몽유병 환자와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의 빛이 의식에 비치지 않기에 어둠에 있는 상태이고 잠을 자는 중입니다. 그런데도 깨어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실제로는 잠을 자면서도 가짜 빛을 보며 깨어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몽유병 환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몽유병 환자의 상태에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닥뜨린다면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을 잘 믿어왔는데 어떤 일을 계기로 잠시 믿음이 약해진 상태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마주하게 되었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지 30년 된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29년 11개월을 잘 믿다가 돈 문제 때문에 한 달을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한 달 동안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의 빛이 완전히 가려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 사람은 한 달을 몽유병 환자로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29년 11개월이나 예수님을 잘 믿었기에 구원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항상 깨어있으라 하신 것이고 성경은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 순간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마주하는 순간 믿음의 상태를 보일 수 없다면 예수님은 이 사람을 끌어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가르쳐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기 위한 조건입니다.

한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29년 11개월을 십자가를 등지고 살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달 전부터 십자가를 마음에 품게 되었고 언제나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갖고 살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맞닥뜨리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한 사람은 29년 11개월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다가 한 달 동안 돈 문제에 빠져 있었고, 한 사람은 29년 11개월을 가짜 신자로 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한 달 동안 주님의 십자가만을 붙잡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맞닥뜨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29년 11개월은 잘 믿었지만 마지막 한 달 동안 돈 문제를 붙잡은 사람을 끌어안으실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십자가 붙잡고 잘 살았어도 오늘 십자가를 놓친다면 예수님을 재림을 기준으로 볼 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이후로는 다른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늘 임하실지 내일 임하실지 알지 못하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부터 십자가 복음의 특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특성은 바로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어제까지 세상에서 별의별 짓을 다 하던 사람일지라도 오늘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한다면 어제까지의 나는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반드시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집니다. 십자가 복음의 특성상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예수님께 안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평생 예수님과는 무관하게 지내온 사람이었지만 죽음이 임박한 순간 예수님을 붙잡았고 예수님께서는 이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짜를 알 수 없음이 중요한 이유는 언제나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를 붙잡은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과 맞닥뜨리는 순간에 예수님은 우리를 끌어안으실 수 없습니다. 재림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시점 이후로는 또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라는 말은 마음의 배를 세상에 붙이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삶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 같으면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노후 준비까지 마친 상태에서 걱정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의 안정된 분위기나 순탄함이 마음에 스며들 때 멸망의 끝으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때의 심판 사건을 떠올려봅니다. 천사들은 롯의 가족을 데리고 소돔 성을 탈출합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맙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의 탈출은 우리에게서 매일 반복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하게 되면 평탄하면 평탄한대로 빠져들고, 평탄하지 못하면 못한 대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삶이 평탄하든 그렇지 못하든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내 마음에 스며들지 않도록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고, 마음은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으로부터 도망 칠 수 있어야 합니다.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는 마음이 빠져나와 하늘로 간다고 해서 삶이 더 악화되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해있으며 허우적거리고 버둥대는 동안에 삶은 더 악화되고 나빠지기 십상입니다. 롯의 아내처럼 남겨둔 세상을 궁금해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십자가 붙잡고 빠져나올 수 없다면 몽유병 환자처럼 어둠 속에 묻힌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일이 잘 되든 안 되든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의 빛이 비치는 가운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어둠 속에서 잠이 든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에 대해 잠이 든 상태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몽유병 환자와 다름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평생을 몽유병 환자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도저히 끌어안으실 수 없는 더러움의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이 다 무시된 상태에서 살고 있으며, 마음에 온갖 것을 담고 있는 더러움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끌어안으실 수 없다면 끝입니다.

 

한편 세상에는 예수님이 오늘 오실까 내일 오실까 기대하며 깨어서 살다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후로 무려 2,000년이 지나는 동안 재림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월을 보자면 재림하실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산다는 것이 너무 아득해 보입니다.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예수님을 날마다 깨어서 예수님 만날 때를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어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으로 들어가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살아가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반갑고 좋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끌어안으시고 나도 예수님을 끌어안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재림이 지난 2,000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만남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가르쳐주시지 않은 이유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특성상 그 날짜를 알면 바로 전날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며 구원받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날에 깨어있기를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날에 십자가를 붙잡고 빛에 거하기를 바라시며 날짜를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보다 중요한 이유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의 재림의 때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따로 재림의 때를 이야기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지구의 인구 숫자만큼 재림을 하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한 차례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이제까지 살다 죽은 모든 사람은 믿든지 믿지 않든지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67년에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순교 또한 그 무렵입니다. 이들의 죽음 또한 거의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죽은 후에 이 세월을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죽음의 순간은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와 곧바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4,000년 이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죽는 순간과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곧바로 연결될 것입니다. 나의 죽음의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았더라도 나의 죽음과 예수님의 재림은 곧바로 이어지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가 죽는 그 순간이 예수님 재림의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67년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몸이 죽는 순간 영은 시간과 공간의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그리스도 안에서 잠을 잔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정작 사도 바울 자신에게는 1초도 지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2,000년 전에 죽은 사도 바울과 예수님 재림의 때에 부활할 사도 바울이 동일한 사람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부활하는 모든 사람은 죽을 때의 의식 상태를 그대로 가지고 부활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못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동일성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오늘 죽는데 10년 뒤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부활한 제가 10년 전에 죽은 저와 같은 사람이기 위해서는 죽을 때의 의식상태가 이어지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죽음의 때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재림과 빈틈없이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4,000년 전에 죽은 아브라함도, 오늘 죽는 사람에게도 믿든 안 믿든 예수님의 재림은 죽음 뒤에 바로 이어지는 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기에 죽음에서 바로 이어지게 될 예수님의 재림 또한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지만 언제가 죽음이 반드시 찾아오듯, 예수님의 재림도 분명히 찾아오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 예측하지 못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지 못해서 빛에 거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면, 그 죽음의 순간은 예수님의 재림과 곧바로 이어질 것이기에 예수님이 끌어안으실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항상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잘 믿다가도 어느 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시 잊을 수도 있고 믿음이 좀 약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6장 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붙잡기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다른 일을 하고 남는 여력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힘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오던 롯의 가족들처럼 이 세상에서 도망쳐 주님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께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몽유병 환자처럼 살기를 선택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비로소 몽유병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제성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제쳐두고 세상에서 돈이 좋다고 느끼고, 건강이 좋다고 느끼는 삶은 몽유병 환자의 삶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면 제정신을 차리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이 보이는데도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할 기회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정신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보면서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음에 괴로워하며 살기에 지옥이고 열불이 난 상태에서 사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빛을 쐰 베드로는 세상에 대해 일순간 에 까맣게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하나님을 직접 보면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면 마음에서는 실로 열불이 날 것입니다. 이 열불이야말로 지옥의 불입니다.

예수님 재림 이후에 지옥에 가서야 제정신을 차린다면 너무 늦습니다. 돈 좋다, 건강 좋다, 승진 좋다, 자녀의 형통이 좋다, 명품이 좋다, 여행이 좋다, 취미가 좋다고 온갖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던 몽유병 환자로 살다가 지옥에 들어가서야 정신을 차린다면 늦은 것입니다. 진짜로 좋으신 하나님만을 보면서 지금까지 좋다고 여겼던 대상들에 대해 일어나는 열불을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온갖 것을 좋아하던 상태에 대해 열불이 나서 스스로가 새카맣게 타들어가며 영원히 살아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여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붙잡을 때만 언제 어느 때 주님이 오셔도 괜찮고 좋게 여기는 낮에 거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몽유병에서 깨어난 사람들만이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재림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재림은 딴 세상 이야기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재림에 대한 그리움을 전혀 갖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정면으로 맞닥뜨려 만나게 될 순간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십자가를 놓치고 몽유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십자가를 붙잡기는 여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을 비롯한 모든 삶의 국면은 우리의 힘이 제로라도 진행되어갈 것입니다. 십자가 붙잡기에 총력을 기울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사도 바울처럼 재림하실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총력을 기울여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 안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의 빛 아래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재림 예수님만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시고, 몽유병에서 깨어난 자로서 이 세상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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