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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론 신앙의 저주 없는 십자가 생활>의 줄거리 :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합쳐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디모데가 에베소 교인들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내리시는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교인들이 신화와 족보와 율법에 집착하는 일을 경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론 신앙으로 교인들의 이 세상을 향한 주체성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사역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론 신앙의 저주 없는 십자가 생활
(디모데전서 1:1~11)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신앙을 이론적으로 접근하면 재앙입니다. 신앙은 이론과 반대되는 실제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목회자나 사역자는 실제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방향을 정하고 교인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실제의 만남이 이론으로 대체된 신앙은 구제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현재 개신교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목회서신이라고 불립니다. 사도 바울은 61~63년까지 로마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 후에 풀려났다가 67년에 2차 투옥이 되고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로마 감옥에서 풀려났던 사도 바울은 지금의 스페인에 해당하는 서바나 지역의 전도를 실행합니다. 그 과정에 에베소에서 디모데와 함께 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후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긴 채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디모데전후서는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로 돌아왔다가 2차로 투옥되기 전에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그 내용이 주로 목회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내용이기에 18세기경부터 목회서신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 이론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론 신앙이 무엇인지는 4절에서 분명히 언급됩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와 족보란 개인이 속한 가문이나 도시나 민족 혹은 나라의 기원을 설명할 때 언급되는 신과의 연관성입니다. 사람들은 신과의 연관성에서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드러내고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을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신화에는 신으로부터 나에게까지 이어지는 사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이 특정한 족보입니다. 예를 들어 태씨 집안에서는 대조영을 시조로 여깁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후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화와 족보는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의 근원을 신에게 소급시키고 자신의 시작을 신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으로부터 자신에게까지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족보를 등장시킵니다.
특히 에베소 지역에 살던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경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 그 하나님으로 태어나서 나에게 이르기까지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대제사장들과 걸출한 신앙의 인물들이 있었다. 나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후손이다.’라고 말하기를 즐겨 했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집안 자랑이 아니라 당시 교회에 유입되던 신학의 한 형태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에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합쳐지면서 신화와 족보를 중요시하는 이론 신앙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우려를 접하면서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비판하고 있기에 신화와 족보를 일단 안 좋게 받아들이게 됩니다만, 본래 신화와 연관된 족보란 자기 존재의 뿌리를 신과 연결하려는 갈망의 표출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근원을 신으로부터 찾으려는 태도 자체는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도 하나님과의 연결을 수없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고자 하고, 십자가 복음도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신화와 족보를 문제시하였던 것일까요?
신화와 족보의 근원적인 문제는 자기 신격화에 있습니다. 신과의 연결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등급을 신의 단계로까지 끌어올리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신을 동원해서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의 심각한 문제점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신과의 연관성을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십자가 복음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이 분명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목적은 유일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연결을 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이 꾀하는 하나님과의 연결과 신화가 꾀하는 하나님의 연결은 그 지향점이 다릅니다. 신화를 만들어서 족보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을 찾는 일은 이제까지 자연인으로 살고 있던 나의 보존을 그대로 전제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연결이란 이제까지 유지되어 오던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과정을 반드시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나를 죽임으로써 하나님과 연결하려는 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론 신앙의 한 형태로써의 신화와 족보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나를 신격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나를 오히려 신격화시키고자 신화와 족보를 따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화와 족보뿐만 아니라 이론 신앙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경 공부, 교리 공부와 같이 지식을 전달함에 목적을 둔 신앙 형태나 목회 형태는 모두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 세상을 향한 인간의 주체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활성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론적으로 만든 신화와 족보를 포기할 수 없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4절의 하반절을 보면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론 신앙을 앞세울 때는 논쟁이 일어납니다. 명목상 신앙의 형태를 띠고 있기에 자기주장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끊임없는 분열과 논쟁과 갈등을 야기하게 됩니다.
개신교가 이렇게 쪼개지고 또 쪼개진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론 신앙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분열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에는 수많은 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잇는 과정에서 17세기에는 이론에 전념하는 정통주의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에 의해 모든 신앙이 이론화되면서 개신교는 쪼개짐의 역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인 양육과 목회의 핵심은 실제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진리대로 사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목회자가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론이 아닌 하나님과의 실제 만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이론과 지식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화와 족보에 열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인격을 상대로 당신의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해나가시는 과정입니다.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오셔서 나를 만나고 나의 인격과 나의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론 신앙은 하나님을 마치 우리 생각의 장기판 위에 놓여있는 한 알의 장기알로 취급합니다. 실제 만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론 신앙은 인간의 주체성을 자극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너의 상태를 보존하고, 유지하고, 향상시키고, 존중받게 하는 이론을 만들어내라고 자극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나의 주체성을 죽이는 역사이지만 이론 신앙은 나의 주체성을 자극하고 활성화시킵니다.
성경 공부가 유익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본래 성경 공부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이란 실제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게끔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치고 가정이나 직장이나 시장 등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은 보기 어렵습니다. 저도 성경 공부를 가르쳤던 사람이었습니다만 가르치는 당사자 입장에서 성경 공부의 내용대로 실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잘못된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율법 또한 이론 신앙의 한 형태입니다. 율법은 곧 행동 원칙입니다. 행동 원칙이란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 몸을 운전해나가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을 살리는 일이고 십자가 복음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목회의 형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후서를 통해 목회자에게 필요한 지침을 내려줍니다. 이 내용을 보자면 교인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이라고 사랑이 강조됩니다. ‘이 교훈’이란 복음과 관련된 교훈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실제 생활 현장에서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사랑함입니다. 목회자는 이 사랑이 나타나도록 교인들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 생활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나타나지 않고, 보이는 사람을 사랑함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론 신앙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마땅한 죄의 장아찌 같은 자기의 모습을 보전합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존경할 대상으로 만드는 추구방식입니다. 이를 위해서 자기 존재의 근원을 신과 연결시킵니다. 신으로부터 나에게 도달하는 과정을 족보로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론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반드시 변론과 논쟁과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존재의 뿌리부터 썩어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의 첫 번째 목표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썩어빠진 인간이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갈 수 있겠는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로부터 이러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나올 수 있도록 목회자가 취해야 될 세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 세 가지 기준으로 교인을 양육하고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교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청결한 마음이란 마음의 구조와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에서는 채움을 위한 욕구 작용이 일어납니다. 이때 채우고 싶어 하는 대상이 하나님 이외의 것이라면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때 이미 마음은 더러워졌습니다. 번 돈을 악한 일에 써야만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때 이미 더러워진 것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가질 때 이미 더러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하는 일은 채움입니다. 바람이 생기고, 욕구가 생기고, 채움을 위한 간절한 소원이 생긴다면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본래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마음이 비어 있기 때문에 나오는 바람은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식탐으로 표현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서는 재물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결혼에 대한 소원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속에서 나오는 바람의 원인은 하나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에 세상에 대한 바람이 생겨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지 않고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생긴 바람으로 이 세상의 대상들을 향합니다. 그럴 때 마음은 더러워지게 됩니다.
목회자로서 교인들과 상담할 때 교인이 원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길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 것뿐입니다. 크든 작든 하나님 이외의 것을 소원함으로써 더러움이 발생한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도록 인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나면 마음은 비로소 청결해지게 됩니다. 청결한 마음으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을 향해 하나님만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목회자가 늘 교인들과 붙어 다니며 도움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로부터 선한 양심에 대한 언급이 이어집니다. 선한 양심이란 홀로 있을 때라도 얼마든지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지금 나에게 어떤 식의 바람이 있든지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며 내버려 두는 것은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도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향하여 바란다면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이러한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우리를 십자가 생활화로 이끌어갑니다. 마음에서 돈을 원할 때 ‘양심이 없네, 어떻게 하나님을 놔두고 돈을 원하겠는가?’라고 자책합니다. 마음에서 승진을 바랄 때 ‘하나님이 아닌 승진을 바라다니 양심에 털이 났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됩니다. 이제까지는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이것저것을 바라며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하나님의 창조적인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면서 삶은 진행되어갑니다.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는 ‘도전과 응전’을 이야기했습니다. 삶에서 느껴지는 부족함에 대한 개선의 욕구가 문명 발전의 추진력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부족함을 느끼시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창조적인 뜻과 계획에 의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을 바랄 수 있는 선한 양심이 홀로 있는 동안에도 늘 작동되도록 교인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거짓 없는 믿음을 언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한 양심, 청결한 마음, 거짓 없는 믿음은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어납니다.
거짓 없는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짓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거짓 믿음이란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찾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의식하지 않고 온갖 다른 것들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욕구하지 않고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욕구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살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목회자라면 교인들로부터 이러한 거짓 믿음이 나타나지 않도록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서 이론 신앙이 설 자리가 없게끔 인도하는 자입니다. 오직 실제 하나님과의 관계에 필요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양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실제로 만나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11절을 보면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서 실제로 일등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있음이 일등이고, 하나님의 좋음이 일등이고, 하나님의 주체성이 일등이 되셔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고자 합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하고자 합니다. 직장에서는 사장님이 말하는 대로 움직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주체성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제1의 주체성은 하나님이 되셔야만 합니다. 사장님의 말을 듣는 것도 하나님께서 사장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교인을 이렇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이 일등, 하나님의 좋음이 일등, 하나님의 주체성이 일등이 되도록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8절을 보면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율법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란 본래 하나님과 만남을 이루고 하나님을 모신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은 인과가 뒤바뀐 일입니다. 이것은 목회할 때 정말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목회자는 자꾸 교인들에게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하라, 충성하라, 봉사하라, 헌금하라며 몸으로 하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인간의 자기 주체성을 자극하고 활성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인들을 점점 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재정이 부족한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게 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헌금이란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나타나야 할 행위입니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을 헌금하는데도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집문서 땅문서 바치는 것은 결코 헌금일 수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주체성을 자극하는 충성이나 봉사에 대한 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하는 일이라면 진정한 충성도 아니고 봉사일수도 없습니다.
예배당 내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윤리적 차원의 교육이 아닙니다. 올바른 믿음을 갖게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청결한 마음을 갖게 해주고, 청결한 마음을 갖기 위해 선한 양심을 갖게 하고, 선한 양심에 의해서 거짓 믿음을 허용하지 않도록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중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현재의 개신교를 보면 사도 바울 당시의 유대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십계명과 율법 외에도 예배당 조직 내에서 통용되는 행동 원칙으로써의 율법을 만들고 강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청결한 마음을 갖는 일을 목회자 스스로 막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론 신앙의 무서움입니다. 이론 신앙은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인간의 자기 주체성이 극대화되도록 자극하고 활성화시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함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내 주체성이 죽었음을 인내로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하나님 뜻에 맞는 행동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원하는 행동을 유발시키기 위하여 계속해서 행동 원칙을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계획을 이루어나가실 경륜을 제거하며 복음을 무효화시키는 일입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의 주체적인 예배당 사랑을 자극함으로써 복음은 제거되고 하나님을 경륜은 무효화됩니다. 목회자가 이론 신앙을 주장하고 가르친다면 목회자의 주체성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교인들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서신의 유익이 여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목회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서 동시에 어떤 교인이 되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목회자가 아닌 교인들에게도 주는 유익이 큽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디모데전후서를 살펴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인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인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어떤 교인이 될 것인가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붙잡고 내 것으로 삼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을 통해 디모데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어떤 교인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제시하심을 알았습니다. 디모데전후서를 함께 나누는 가운데 진정으로 사도 바울이 그림 그리는 교인들이 되어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