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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후서-2

녹취문: 예수님 믿음,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_태승철 (딤후 1:1~1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4.22|조회수7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믿음,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의 줄거리 :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고 순교하십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신다'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보통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짓 없이 믿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신 것일까요? 선한 양심이 있어야만 하는 선한 싸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몸으로도 가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경건,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해와 순교를 뚫고 가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박해 없는 시대에 성경의 '박해'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 믿음,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

 

(디모데후서 1:1~14)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63년까지 로마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계획했던 서바나 지역의 여행을 수행하던 과정에서 지금의 튀르키예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에베소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에베소를 중심으로 인근에 있는 교회들을 관리하도록 맡기고 마케도니아로 이동합니다. 마케도니아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가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디모데전서입니다.

한편 디모데후서는 로마 감옥에서 풀려났던 사도 바울이 다시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후에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던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생애 마지막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서신을 쓴 뒤에 네로 황제 박해에 의해 67년 말이나 68년 초에 순교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디모데후서는 67년 가을까지는 기록되었으리라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68년에는 사도 베드로도 순교하였습니다.

이처럼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순교가 확정된 상태에서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보냈던 마지막 서신입니다. 디모데후서에는 앞서 디모데전서에서 보였던 사도 바울의 염려가 매우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됩니다. 이러한 위기감이 생겨난 시대적 배경을 말씀드리자면 64년에 로마시에 대화재가 발생합니다. 네로 황제는 스스로 불을 지르고 백성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박해를 시작합니다. 네로 황제의 터무니없는 누명에 의해서 시작된 박해는 제국 내의 전 지역으로 확산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도 결국 네로 황제의 박해 아래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다가 67년 말에서 68년 초 사이에 순교했고 사도 베드로도 이때 순교합니다.

한편 이렇게 교회 외부로부터의 박해는 교회 내부에도 영향을 끼쳤고 많은 이들이 믿음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다만 이탈자들 중에는 외부의 박해를 견디지 못해 배교한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이 세상을 향한 애착을 드러내며 자신들이 앞장서서 복음의 진리를 등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해치는 이단들도 많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디모데는 목회자로서 에베소 지역 교인들을 돌보며 자기 신앙도 지켜나가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연관하여 본문의 중심이 되는 구절은 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나는 복음을 전하다 잡혔고 이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너 또한 나처럼 붙잡히고 감옥에 갇혔다가 순교를 당하는 길을 걸어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박해를 넘어서는 믿음을 권고하면서 본문에서 두 가지를 확인합니다. 첫 번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가지는 일은 조상 때부터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해오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언급은 단지 디모데 가족의 믿음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박해를 받고 순교의 위협 앞에 섰을 때 ‘내가 혼자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 계신가?’라는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의심을 물리칠 수 있는 이유로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 길을 걸었으며, 가까이는 디모데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도 동일한 믿음의 길을 걸었음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로 택하시는 예정이 있으며,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 예정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능력으로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박해는 과거의 사건이기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은 박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디모데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디모데와 에베소 지역의 교회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예수님 믿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다 보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속된 말로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혹은 거짓 믿음의 상태에 주저앉아서 그릇된 자기 확신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쉽게 여기고 있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우리 마음이 몸이 사는 땅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 가 머물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 땅을 떠나 아버지 앞에 가 머무는 상태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평생 예수님 믿기 하나만 하다가 죽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음이란 곧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에 머무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음은 반드시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정말로 마음이 하늘로 갔다면 우리의 관심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가지기에 총력을 기울이는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믿기가 쉽다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속해서 종교 생활을 이어가는 것으로 믿음을 대체합니다. 종교 생활로 대체된 믿음은 쉽습니다. 종교가 원하는 대로 예배당 마당이나 밟고 왔다 갔다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직분을 적당히 수행해나가면 됩니다. 그럴 때 예배당 안에서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이 주어집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당에서 애쓰고 나머지 6일은 주저 없이 마음을 세상에 쏟아놓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결코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평신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해당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지금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가지는 것이 믿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심지어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사람들조차 목적을 세상살이에 둡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으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살아주신다고 하니까 그것을 좋다고 여기는 차원에 머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하늘에 머물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이 땅에 머무는 상태에 대해 선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언급한 ‘거짓이 없는 믿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서신들을 통해 십자가 생활화를 강조해왔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디모데전서에서는 선한 싸움과 선한 양심이 언급되었고 경건의 연단을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십자가 생활화를 다양한 측면에서 풀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쉬운 일이 하나 없습니다. 평생 이것 하나만 해야 겨우 할 수 있을만한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 생애의 마지막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가 분명한 상황에서 디모데를 향해 박해를 넘어서라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닌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박해가 오는 동안에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내 유익을 어떻게 챙길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설령 그 대상이 나를 박해하는 자이든 교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거나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절제를 통해 그러한 마음을 중단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8절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박해를 받고 순교할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도무지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어야 정상일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15절을 보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황상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잘 알았던 사람이며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던 사람이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에베소 출신으로써 로마에 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디모데후서 1장 16~18절을 보면 에베소 출신으로는 오네시보로라는 사람만이 사도 바울을 찾아왔던 기록이 있고, 그 외에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만이 사도 바울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시중들지 않았음을 탓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마음이 하늘에서 멀어지게 되었음을 한탄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하늘에 가 있었다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상태는 껄끄럽거나 부담스럽거나 부끄러워할 상황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존에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여겨지던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사람조차도 실제로는 마음을 하늘로 보내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며 믿음을 지켜나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에 대한 언급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시대에는 성경 속에 언급되는 박해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시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일을 부끄럽게 여기던 사람들만의 일이었다면 성경에 기록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 시대는 ‘박해를 받아들이라’는 조언은 필요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박해에는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나가야 하는 십자가의 죽음이 박해의 상황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는 십자가의 죽음이 철저하고 진짜이기 위해서는 박해를 받고 있다는 가정을 해야 됩니다. 박해가 주어질 때의 상황을 상상해봅니다. 어떤 생업에 종사하든 어떤 가정 형편이든 육체를 통해 주어졌던 모든 것들을 다 빼앗기게 됩니다. 심지어 육체까지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이러한 박해가 임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에 마음이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박해 상황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육체가 느끼는 고통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박해가 실제로 주어졌을 때와 똑같은 상황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선한 양심으로 이루어지는 선한 싸움과 경건의 연단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이것은 모두 십자가 생활화의 연장선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는 것이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고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십자가를 붙잡고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또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가지고 몸으로 하나님을 가진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경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평생을 바쳐야 겨우 해나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요구를 추가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은 철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박해를 받아서 감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하는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철저한 죽음이란 바로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라고 하였던 것은 로마에 있던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갈 수 있고,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하여 살 수 있으며, 하나님 한 분만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하나님 가지기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시험해볼 것을 요청합니다. 과연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죽음이 철저한지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저하지 않으면 하나님 가지기는 말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철저한 죽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방법은 박해를 가정해보는 것입니다. 지금 네로 황제의 박해가 주어졌다고 생각해 봅니다. 집도 생업도 재산도 다 잃고 목숨까지도 잃을 지경입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마음이 완전히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서 도피하고 피신해서 하늘로 올라간 상태여야 합니다. 그러한 상태라면 박해가 주어지더라도 믿음은 유지될 수 있으며 박해를 뚫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같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로부터 십자가 복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과 디모데 또한 이들의 믿음에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박해 속에서 복음을 버리고 배교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의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고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 머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십자가의 죽음을 생활화하고 있다면 이들의 마음은 박해가 주어지기 이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음이 박해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박해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말은 진실성을 갖지 못합니다. 진짜 박해가 주어져서 내게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가정한다면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죽음이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믿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고, 오히려 지금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지 않은 자들에게 이러한 믿음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있지도 않은 네로 황제의 박해를 가정하며 믿음을 확인하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몸까지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괜찮다고 여기며,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도피하여 머물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볼 때는 그렇게까지 해서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광신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눈에는 광신처럼 보이는 믿음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드러나는 예수님 믿음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처럼 가짜 믿음이 드러날 뿐입니다. 습관적 종교 생활을 믿음이라 착각하며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아들로 택하신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다 때려치우고 싶어 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음을 확신하고 이 서신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때때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고 하면서도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 야단법석을 하며 홀로 십자가를 붙잡고 이 길을 가고자 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박해를 가정하면서까지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을 철저히 해야 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향한 삶을 유지하려 평생 애를 써야 하는지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너무나 불필요해 보이고, 너무나 도가 지나쳐 보이며, 너무나 힘들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이 믿음의 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드신다면 하나님이 택하신 아들들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택하신 아들들이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이란 세상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어 하는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생긴다면 이 길을 가기로 선택된 아들들임을 확신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택하여 주신 은혜가 기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때려치우고 싶어 하는 이 길이 나에게는 유일한 인생길입니다. 이 길이 내게 가장 쉬운 길로 느껴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임을 알고 감사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좁은 길이 내게 가장 복된 길임을 확신할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 길을 따라 네로 황제의 박해를 가정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시고, 내 마음은 주님을 따라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 머묾이 중단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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