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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중물 하나님의 말씀에 져야만 한다>의 줄거리 :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 바울을 사로잡아 스스로 자기를 전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으면 내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자발적으로 져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면 우리 모두 이 세상에서 왕으로 살게 됩니다.
마중물 하나님의 말씀에 져야만 한다
(디모데후서 2:1~13)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마중물 말씀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마당에 펌프가 있고 바싹 마른 펌프에 물을 한 바가지 붓고 펌프질을 하면 지하에서 물이 올라옵니다. 마중물이란 물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붓는 첫 번째 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 올리는 마중물 같은 역할을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중물 말씀에 자발적으로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게 됩니다.
본문의 중심 구절은 8~9절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슬에 매여서 로마 감옥에 갇혔으나 하나님의 말씀까지 매인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바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하고 자발적으로 져야 하는 마중물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 자발적으로 지면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문자가 아니라 나의 생활 속에서 때마다 필요한 말씀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슬에 묶여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까지 매인 것은 아니라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 같으나 그 내막을 보자면 말씀을 전한 주체는 사도 바울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자면 사도 바울이 주님께 보냄을 받은 자로서 복음을 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을 그렇게 움직이게 했던 근원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사슬에 묶여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의 말씀 또한 사슬에 묶이고 로마 감옥에 갇혔던 셈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렇지 않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 바울을 사로잡아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9절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한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디모데가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의 조언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이용하셨던 것처럼 디모데를 이용해서 복음을 퍼뜨려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 더 이야기할 것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으로 지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사도 바울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 또한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다만 이 과정은 디모데의 자발성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 바울을 장악한 후에 디모데에게까지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지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내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말씀에 질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완전히 정복하고 장악하시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지지 않으려 저항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완전히 정복하고 장악하실 수 없고, 모든 생활 현장에서 때마다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는 역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기 위해서는 마중물이 되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마중물 말씀을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마중물 말씀에 질 때 생활 현장에서 때마다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들어올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의 의미도 정확하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마중물 하나님의 말씀에 지는 것이 어떻게 보자면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말씀에 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인격의 정복자로 추앙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은 곧 생각이 만들어지는 근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로 이루어진 생각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인격이란 언어의 덩어리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덩어리인 인격 안으로 마중물 말씀이 들어오고 그 말씀에 자발적으로 질 때 내 인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마중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택함을 받았기 때문임을 가르쳐줍니다. 이러한 마중물 말씀에 자발적으로 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는 저항하려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기질입니다. 죄의 기질이 뿌리박혀 있기에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마중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자발적으로 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다윗의 씨’라는 별명으로 부릅니다. 이러한 표현은 다른 서신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이러한 표현이 등장한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의 씨’라는 별명에는 마중물 하나님의 말씀에 지기 위해 꼭 알아야 될 포인트가 담겨있습니다.
‘다윗의 씨’는 메시아의 별칭입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다윗의 씨’로 부르는 이유는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적으로나 세상적으로나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선민의 나라를 온 세상 위에 우뚝 솟아오르게 한 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은 ‘다윗의 씨’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때는 하나님의 선민들을 선민이 아닌 다른 민족 위에 우뚝 세울 것이라는 세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떤 의도에서 ‘다윗의 씨’를 언급한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선민들을 다른 민족에 비해 탁월한 위치에 서게 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못 박힌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말씀에 자발적으로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유대인들과 같은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얻고자 하고 잘 되고자 합니다. 진전을 이루고 발전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말씀에 진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마음이 패배해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씨’라는 별명을 가진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란 선민들을 세상적인 의미에서 우뚝 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여 이 말씀이 나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과 반대되는 나의 죄의 기질이 패배해야만 합니다. 죄를 가리키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는 빗나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빗나가서 이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갖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죄의 기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죄의 기질에 대해 죽음으로써 자발적으로 말씀에 질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온전히 나를 이기는 상태가 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자발적으로 진다는 것은 말씀 속에 있는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중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서 바라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자발적으로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순간적인 바람이든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바람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비전이나 희망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가진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중물 말씀에 대해 자발적으로 지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나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게 됩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가신 곳은 보좌 우편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듣는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살아계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면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발적으로 지는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의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씨’로 언급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탁월한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면서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향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처럼 세상을 향한 바람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고 말씀에 져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3~4절에서 병사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병사는 개인의 관심사에 마음을 쏟는 자가 아닙니다. 어떻게 먹고 사느냐, 어떻게 출세하느냐는 병사의 관심일 수 없습니다. 오직 상관의 명령을 따르고 충실히 이행해서 상관을 기쁘게 하는 자가 병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병사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는 유일한 상관이신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가 들려야만 합니다. 생활 현장에서 때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상태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마중물 하나님 말씀입니다.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에 자발적으로 져야 합니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상관의 명령을 따르면 됩니다.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노후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다윗의 씨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마중물인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질 때 복무하는 병사와 같은 마음가짐이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내 삶에 대해, 자녀에 대해, 노후에 대한 어떠한 바람도 생길 수 없습니다.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세상을 빠져나가셨는데 내가 세상에 대해 바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마중물인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질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만 들리게 됩니다. 군인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때 먹고 사는 것은 군대가 책임지듯이, 마중물인 하나님 말씀에 나를 복종시킬 때 생활 현장에서는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게 됩니다. 율법이 내 바깥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면, 마중물인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져서 들어오는 하나님 말씀은 내 생각 속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살면 내 삶은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내 몸을 이용해서 살아가시게 됩니다.
또 사도 바울은 경기장 규칙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경기장에서 지켜야 될 한 가지 규칙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세상을 향한 바람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새벽에 일어나서 말씀을 준비하고 오늘의 번제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 단장을 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와이셔츠를 입는데 새로 산 것이라 단추 구멍이 굉장히 빡빡했습니다. 마음이 급한데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이때 ‘내가 짜증이 난 이유는 단추가 빨리빨리 채워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단추가 잘 채워지기를 바라는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기회로 삼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지는 것입니다.
단추 잠그는 것조차 이 세상일이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마음에 담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처럼 ‘다윗의 씨’를 통해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른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확인하면 단추가 잘 채워지든 말든 짜증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순간에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전성기를 세상에 일으키시는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경기라면 세상과의 관계는 십자가에서 죽어서 아무것도 바랄 수 없게 되는 것이 규칙입니다. 이 규칙을 지키고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그리스도는 내 마음을 끌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면 규칙을 지키고 경기하는 자가 상을 받듯이 우리 또한 상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경기에서 주어지는 상은 하나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기의 규칙은 바로 세상에 대한 바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가지기를 하는 경기에서 세상 것을 바란다면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지키려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 앞에 승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유대인과 다르게 십자가에서 못 박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이 세상에 대한 바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단추 하나가 순조롭게 채워지는 것조차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소한 일에서조차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며 바라지 않는 것이 규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조언을 해주는 디모데 역시 목회자였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점프해 들어가기 위한 플랫폼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내 삶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고난을 참을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11절을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미쁘다 이 말이여’는 바로 앞서 살펴보았던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마중물 말씀에 자발적으로 졌음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죽은 자는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여진 말씀에 자발적으로 지는 것의 핵심은 세상에 대한 바람이 아닌 죽음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세상에서 다윗의 전성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단추 하나 잘 잠겼으면 좋겠다는 것과 같은 사소한 바람조차도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어서 12절을 보면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주님과 함께 왕 노릇을 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왕 노릇’이라는 표현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해석의 어려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실질적으로 ‘왕 노릇’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함께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심판자는 오직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뿐이십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선지자, 왕의 삼중 직을 갖고 계셨음을 언급하기도 합니다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시고서야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권자이시기에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계셨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해석은 사도 바울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왕 노릇’은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마중물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마중물 말씀을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진 자들은 세상에 대해 죽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바라는 죄의 체질이 있습니다. 말씀에 진다는 것은 이러한 죄의 체질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함을 가리킵니다. 그럴 때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 가지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든 생활 현장 속에서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주체성으로 살아가게 되기에 사도 바울은 이것을 ‘왕 노릇’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왕 노릇’의 전제는 마중물 말씀에 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져서 세상에 대한 바람이 죽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럴 때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것이지만, 이 세상 안에서는 어떤 전문가나 스승도 내 생애에 대해 나보다 더 높은 자가 없게 됩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만 듣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 노릇’에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왕이라는 말에서 권력이나 부귀영화를 떠올리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일들일 뿐입니다. 인격적인 차원에서 왕이라는 존재는 가장 위에 있는 최종결정권자입니다.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참고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결정은 왕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면 내 삶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내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슬에 매여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에 삶에 대해 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빌라도보다 위에 있는 왕이셨던 이유도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하나님 주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셨지만 당신의 생애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의 말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슬에 매여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로마 황제 밑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조차도 하나님 주권의 꼭두각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세상과 나 사이에서 그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는 왕의 자리에 있는 자였습니다.
사슬에 매여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왕 노릇을 언급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역설적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바로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들어오는 왕의 상태임을 가르쳐줍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사도 바울보다 높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네로 황제조차도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습니다. 황제조차도 사도 바울의 생애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주권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중물인 하나님의 말씀에 져서 생애 모든 현장 속에서 때마다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살 수 있었습니다. 묶여있어도 갇혀있어도 설령 죽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간단한 마중물 하나님의 말씀에 날마다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많이 가지기 위하여 경기에 출전한 선수로서 이 세상 것은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는 하나의 규칙만을 십자가로 지켜나감으로써, 생활 현장 모든 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왕처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