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디모데전후서-2

녹취문: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첫 번째 이인칭_태승철 (딤후 2:14~2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4.29|조회수5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첫 번째 이인칭>의 줄거리 :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을 이론 안에 가두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대신에 모든 생활 현장과 모든 상황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연결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첫 번째 이인칭

 

(디모데후서 2:14~26)

 

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치 소나기가 퍼붓듯이 강렬한 어조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처지를 염두에 두자면 디모데도 이 말씀대로 살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징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하지 말라’ 혹은 ‘버리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14절에서는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라고 하였고, 16절에서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라고 하였으며, 23절에서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신앙적 말다툼이 뜻하는 바를 알려줍니다. 신앙적 말다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3자로 놓게 됩니다. 말다툼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말합니다. 마치 여당 의원과 야당 의원이 만나 대통령에 대해서 말다툼을 하는 광경이 펼쳐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당은 대통령을 지지하고 야당은 대통령을 비판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은 제3자의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때는 언제나 내 앞에 계신 당신으로서만 의식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인칭이 말하는 사람 자신을 가리키고, 이인칭은 내가 하는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삼인칭 다시 말해 제3자를 가리키는 표현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인칭 당신의 자리에서 나를 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3자의 자리에 놓고 누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느냐를 다툴 수 있는 존재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면 하나님을 바라봄과 하나님과 연결됨은 발등에 떨어진 불같이 피할 수 없는 일이며 화급을 다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최우선의 이인칭이십니다. 하나님을 제일 먼저 당신으로 부르고 바라봄이 언제 어디서나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를 마주하는 상황을 떠올려봅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배우자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배우자를 이인칭으로 삼기 전에 하나님을 이인칭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연결된 상태에서 비로소 배우자와 대면할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대하든 아내가 남편을 대하든 하나님은 언제나 첫 번째 이인칭이십니다. 아내나 남편이 서로에게 첫 번째 이인칭이 될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상사가 첫 번째 이인칭이 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든 회사에서든 나의 첫 번째 이인칭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생활 현장에서 언제나 하나님이 나의 첫 번째 이인칭이 되시고 하나님과 연결되는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반드시 꺼야 하는 발등의 불입니다.

 

며칠 전에 강릉에 큰 산불이 났습니다. 지금도 산 아래의 펜션 등은 전소된 채로 흉물스럽게 남아있습니다. 산불이 일어나는 광경을 보면 불길이 거세고 빠르게 퍼져나갑니다. 그야말로 화급(火急)을 다투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산불보다도 더 화급을 다투는 일이 단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건강 문제가 있든 돈 문제가 있든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발등에 떨어진 불이자 화급을 다투어 해결해야 되어야 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을 이인칭으로 부르며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이인칭으로 여기는 일에 대해서 무관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먼저 연결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발등의 불로 여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나타나는 일이 말다툼입니다. 하나님을 제3자로 놓고 사람과 사람이 마주 대하여 내가 갖고 있는 이론이 옳고 그른가를 이야기할 겨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부르면서 곧바로 당신이 되어야 하고 첫 번째 이인칭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안 계신 것처럼 제3자로 여기며 이야기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당과 야당 의원들이 대통령에 대해서 말하듯이, 돈 문제나 자녀 문제에 대해 아내와 남편이 말하듯이, 외제차를 놓고 타 본 사람과 안 타 본 사람이 말하듯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우리가 입에 올리자마자 당신으로 연결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제3자처럼 사물에 대해 말하듯이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제3자에 대해 말하듯이, 사물에 대해 말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길 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 때도 일단 예의를 갖추며 ‘여보세요’ 혹은 ‘저기요’라고 말문을 뗍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3자로 여기며 길 가는 사람에게 차리는 예의조차 갖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나 그녀 혹은 그 사람처럼 삼인칭으로 부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말다툼을 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을 삼인칭으로 여기며 부르게 됩니다. 말다툼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말다툼을 보는 사람들까지 망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지 않으면 예수 믿음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 모든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은 끈으로 묶이는 것과 같은 강제적인 결합이 아닌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언제나 일인칭인 내가 이인칭인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이란 그저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이인칭으로 부르는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부름은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음이 더러운 상태라면 아무리 하나님을 이인칭으로 불러도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연결되지도 않습니다.

본문 21~22절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리라 하였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깨끗한 마음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활 현장이 어디든 언제든 어떤 문제가 있든 어떤 상황이 전개되고 있든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최우선의 화급을 다투는 문제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전화를 거시는 상황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도 전화가 오면 일을 중단하고 전화를 받듯이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도 우선적인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이인칭으로 부르며 연결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 상태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살아있는 연결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더러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활 현장에서 마음의 더러워짐과 깨끗해짐은 드러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인가 있음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 작용과 좋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구 작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있다고 느껴지고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추구하는 주체성이 나타납니다. 마음은 의식 작용, 욕구 작용, 주체성이라는 세 가지 핵심 요소가 뭉쳐져 있는 덩어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더러워진다는 것은 세 가지 요소에 대해 하나님이 배제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생활 현장에 계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직장에 있다고 해서 사장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느낀다면 하나님이 아닌 사장님을 첫 번째 이인칭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사장님을 우선하게 되었기에 이것이 바로 마음이 더러워진 상태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보다 배우자를 우선하여 첫 번째 이인칭으로 상대하게 되었다면 마음이 더러워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빗나감을 가리키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에 해당되는 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마음은 다른 대상을 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첫 번째 이인칭의 자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두었기에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좋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있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좋다고 여겨서 욕구하는 상태가 되었다면 마음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이란 승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마음에서 승진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욕구하는 대신 승진을 욕구하게 되었다면 마음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가정에 있는 동안에도 바라고 싶은 것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저희 집은 비행장이 옆에 있어서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마다 소음이 심합니다. 이러한 소음에 시달리다 보면 ‘비행장 좀 옮겨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으나 정말로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면 비행장이 옮겨가기를 바라는 욕구는 생길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더러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로는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이인칭으로 불러도 인격적 연결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십자가 생활화의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십자가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생활 현장에 대해 죽습니다. 생활 현장에 누가 있든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있음과 좋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생활 현장에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욕구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는 것은 예수님을 일인칭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깨끗해지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서 생활 현장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일인칭 안에서 연합이 이루어지면 생활 현장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생겨나고, 마음은 깨끗한 상태가 됩니다. 우리는 모든 생활 현장에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문제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만 하나님을 이인칭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당신으로 부르는 이인칭이어야 합니다. 결코 제3자를 언급하는 것처럼 불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일인칭으로 연합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금 생활 현장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이인칭으로 부르지도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을 ‘말다툼, 변론, 헛된 말’이라고 규정합니다.

주님과 일인칭으로 연합한 깨끗한 마음 상태가 된다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이인칭으로 부르는 인격적 연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연합할 수 없다면 모든 신앙생활은 말장난이고 언어유희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헛된 말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생각과 이론 속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입니다. 자기 이론이라는 장기판 위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하나의 장기알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만날 때에는 장기들 두듯이 자기 이론과 상대방 이론을 두고 시합을 하게 되고 그것이 말다툼으로 나타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말다툼을 보는 사람들도 자기 이론의 장기판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장기알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때 말다툼을 하는 당사자도 망하고 말다툼을 보는 사람들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20~21절을 보면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생활 현장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든 직장이든 시장이든 어떤 생활 현장에서든지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전화를 거시듯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이외에도 나를 지켜보는 대상은 많습니다. 가정에서는 배우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고, 회사에서는 상사가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내가 마주하는 문제들 또한 나를 지켜보는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과 대상보다 시급한 대상은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걸려온 전화입니다. 벨소리가 울리면 전화부터 받아야 하듯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우선적으로 응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회사에서 늘 반복되는 업무를 하더라도 발등에 떨어진 불은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과 일인칭으로 연합하여 생활 현장에 대해 죽은 자가 될 때 첫 번째 있음도 하나님이시고, 첫 번째 좋음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일단 하나님과 깨끗한 마음으로 연결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현장에서 귀한 그릇으로 사용해나가십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은 우리의 모든 생활 현장에서 우선 되어야 할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일인칭을 이룰 때 생활 현장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고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연결되고 생활 현장에 남아있는 몸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물론 세상에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하나님께서는 쓰십니다. 다만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있느냐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와 빌라도와 대제사장 가야바를 생각해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건을 위하여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하나님과 아무런 인격적 관계를 갖지 못했고 그 결과 천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더러운 그릇이기에 나쁜 용도를 위해 쓰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이 세상에서 쓰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귀히 쓰이느냐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해서 천하게 쓰이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해서 더러운 상태라면 천한 일을 위해 쓰이게 됩니다. 반대로 십자가에서 주님과 일인칭으로 연합하여 깨끗한 마음을 이룬 사람은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을 이루게 됩니다. 생활 현장에서 세상에 대한 있음을 느끼지도 않고 좋음을 욕구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주체가 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주체성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될 때 하나님과 인격적 연결이 이루어지고, 이 땅에 남아있는 몸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선한 일을 위해 귀히 쓰임 받게 됩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일은 생활 현장에서 반복되는 업무나 새로 주어지는 문제들을 잘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설교를 하는 사람이지만 저에게 정말로 중요한 일이란 설교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설교를 하는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다툼을 경계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한편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제3자처럼 이야기하는 유일한 경우가 하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자면 ‘모든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을 너의 최우선적인 이인칭으로 관계하며 연결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이인칭으로 권고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제3자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만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연결된 자들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과 최우선적으로 연결되라고 권고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활 현장에서 첫 번째 이인칭으로 관계하여 연결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모든 생활 현장에서 최우선적으로 만나는 하나님을 너 또한 생활 현장에서 이인칭으로 관계하라’고 말할 때만 하나님을 제3자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최우선적인 이인칭으로 만나 모든 생활 현장에서 연결을 이루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만 하나님을 제3자로 언급해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생활 현장이 누구를 마주하게 될지 알 수 없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가장 가까이 와계시는 첫 번째 이인칭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놓치고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문제들을 첫 번째 이인칭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 현장에서 천히 쓰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일인칭으로 연합해서 생활 현장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있음도 좋음도 주체성도 생활 현장에 적용되지 않게 됩니다. 내 마음은 오직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유일한 있음과 좋음으로 느낄 수 있음을 주체적으로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 여러분 앞에 놓인 사람이든 업무든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과 이인삼각으로 묶여 관계하는 귀히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생활 현장에서 첫 번째 이인칭 되시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연결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떤 생활 현장에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주님과 일인칭으로 연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주님과 함께 생활 현장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과 첫 번째 이인칭으로 연결됨으로써 귀히 쓰임 받는 자들로 하루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