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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경건의 능력 부인하면 귀신 들린다>의 줄거리 :
세상에서 사는 사람의 모습 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흉물스러운 모습이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상태입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면 경건의 모양을 지닌 상태로 귀신 들립니다. 이제 더는 세상을 향한 마음의 사랑과 열정에 제동이 걸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생활 현장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과 뜻을 향해서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칼춤을 추게 됩니다.
경건의 능력 부인하면 귀신 들린다
(디모데후서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흉물스러운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염두에 두고 말씀드리자면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면 경건의 모양을 지닌 채로 귀신이 들립니다. 이것은 경건의 모양이 아예 없는 채로 귀신이 들리는 것보다 훨씬 더 흉물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이란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정말 대단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정말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름만 부를 뿐이라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예수님과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태가 경건의 모양을 띤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경건의 모양을 띤 상태에서 귀신이 들리면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아예 부르지 않는 사람이 귀신 들려 사는 것보다도 훨씬 더 지독하게 괴물 같고 흉물스러울 수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였습니다. 무척 유명한 구절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이들은 형제가 아니니 상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형제는커녕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아예 부르지 않는 자들보다도 더 위험한 자들이기에 이들로부터 돌아서라고 합니다.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의 핵심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과의 만남에 달렸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과 만나고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경건이란 이러한 실제 만남을 염두에 둘 때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중에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지 아닌지를 나 자신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과의 실제 만남을 스스로 확인하는 방법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 중에는 나와 인격적으로 관계하실 때 드러나는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둠으로써 하나님과 실제 만남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분명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내가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인격적 작용들에 반영될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들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집 아가씨가 부잣집에 시집을 갔습니다. 이 아가씨는 부잣집 며느리로서 그 집안의 상황이 삶에 반영됩니다. 입는 옷이 바뀌고, 타고 다니는 차가 바뀝니다. 이렇듯 만남이란 만나는 대상의 성질이 내게 반영됨으로 나타납니다. 화가 잔뜩 난 남편을 만나면 그 화가 아내에게 옮겨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다면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인격적인 관계에서 내게 반영되어야 할 내용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 유일하신 좋음, 유일하신 주권자 되심입니다.
디모데전후서에는 경건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경건의 본래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듣고 또 들어도 좋은 보배 같은 말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눈앞에서 보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의 오감으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과 유일하신 좋음과 유일하신 주권자 되심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은 내 인격에 반영됩니다.
내 인격은 곧 마음의 핵심입니다. 마음에는 무엇인가의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 작용이 있고, 무엇인가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소망하는 욕구 작용이 있습니다. 이로부터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실제로 얻기 위하여 계획하고 뜻하고 추구하는 주체성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눈으로 보는 대상을 붙잡듯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과 유일하신 좋음을 붙잡게 된다면 하나님에 대한 추구가 주체성에 반영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있게 되었고, 이끌려가고 있으며, 그러한 모양을 드러내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내 삶에서 사람이든 상황이든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권자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당연히 생활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태도에도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이 반영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눈앞에서 보듯이 만나고 합당한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경건의 능력’이란 무엇일까요? 앞서 경건의 모양이란 하나님의 속성이 배제된 채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형성된 종교 조직이 원하는 것들을 이루며 살아가는 종교인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론에 대해 꽤 해박하고 하나님께 기도도 하며 헌금이나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의 문제는 정작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과 유일하신 좋음과 유일하신 주권자 되심이 그 사람의 인격과 생각과 말과 행동에 반영되고 있다는 증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경건의 능력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이 경건의 능력은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다른 사람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을 눈앞에 모시고 있듯이 붙잡고 있는 상태가 되면 이로부터 생활 현장에 내뿜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고 듣듯이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유일하신 있음이시고 유일하신 좋음이시며 유일하신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렇게 내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만나고 있는 상태로부터 생활 현장에 내뿜어지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경건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유일하신 있음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만나게 되면, 내 눈앞에 누가 있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만이 가장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존재감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있다고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없는 셈 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은 스스로 있는 것들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들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들이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것들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허락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다면 당장 없애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살려두고 계시고, 그 상황을 있게 하신다는 것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루터는 회개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의 두려움의 이유가 잘 드러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들판에서 루터가 친구와 함께 비를 피하려고 나무 밑에 들어갔는데 벼락이 떨어져 친구가 죽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루터는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만나게 됩니다. 루터가 수사 시절에 너무 많은 고해성사를 하니까 신부님이 ‘너의 죄를 한 번에 모아서 고하도록 해라. 너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해성사를 들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떠하든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활 현장 속에서 뿜어져 나올 때는 그 자체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좋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좋음을 눈으로 보듯이 만나고 있는 상태라면 이 세상을 향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좋음을 만난 상태가 경건의 근본이라면, 이 근본으로부터 세상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하는 힘이 뿜어져 나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좋음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을 때 이미 믿음과 소망 안에서 내 것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을 내 것으로 가진 상태에서 생활 현장에 뿜어져 나오는 경건의 능력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졌다면 이 세상 모든 좋음이 나 자신을 위해서는 휴지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능력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은 생활 속에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증거로써 힘이 뿜어져 나오게 됩니다. 한편 우리는 경건의 능력으로 살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이해할 때도 경건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경건의 능력 없이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한다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 충분히 만족하고 계셨습니다. 그 증거가 평생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편히 누울 자리조차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 충만하셨음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 채 예수님의 삶을 희생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희생이란 마땅히 누릴 권리나 좋음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좋음이셨습니다. 유일하신 좋음인 하나님 아버지를 충분히 갖고 계셨기 때문에 머리 둘 곳은 좋음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좋음에 있어서는 머리 둘 곳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었습니다. 예수님 마음속의 좋음과 평강과 행복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진실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일을 희생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머리 둘 곳이 있는 것을 좋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하신 좋음을 만난 적이 없고, 인정하여 받아들여 본 적이 없다는 증거가 잘못된 해석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유일하신 좋음으로 가지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에게는 머리 둘 곳은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건의 능력의 관점에서 성경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단순히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경건의 능력을 부인함이 시작되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건의 모양을 갖춘 자들에 의해 경건의 능력에 대한 부인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나누다 보면 이상적이라고 느껴지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옳은 이야기지만 내가 그렇게 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고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함은 바로 이러한 성경의 말씀들을 나와는 무관하게 치워버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적어도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말씀일지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말씀은 나와는 무관하지 않게 됩니다. 비록 내가 그 말씀들과 거리가 떨어져 있을지라도 말씀이 나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내가 받아들인 말씀이 부족한 나를 이상적인 상태로 끌고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말씀을 이상적이라고만 느끼며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남의 일로 여긴다면 말씀은 나를 끌고 갈 수 없습니다. 말씀이 아닌 나의 상태를 기준으로 삼았기에 지금 나에게 맞춰진 말씀만을 찾아내고 해석하고자 하게 됩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셨던 예수님을 떠올려봅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람이기에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을 전할 때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복하고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 그 속에서 언제나 아버지께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도 아버지께서 하시지 않으셨던 일은 없었습니다.
한 인간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노도광풍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드는 상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도 아버지가 하지 않으시는 것이 없는 상태를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이로부터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상적인 모습이 나를 끌고 가기 시작합니다. 단 한 발자국이라도, 단 1cm라도 이상적인 상태를 향해 끌고 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라고 예수님만의 일로 받아들인다면 말씀의 능력은 발휘될 수 없습니다. 나의 인격과는 무관한 일이 되어버리기에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예수님을 향해서 1cm도 다가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만나고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예수님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경건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난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여기며 외면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순교할 때도 평강이 깨지지 않았고 얼굴은 천사와도 같았습니다. 이것을 스데반 집사님의 일로 치부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당장 스데반 집사님 같은 믿음은 없을지라도 생활 현장에서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으로부터 그러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고 가졌기 때문입니다. 유일하신 있음이시고 유일하신 좋음이시며 유일하신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기에 스데반 집사님에게서는 경건의 능력이 평강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돌로 자신을 치는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미 유일하신 하나님을 좋음으로 가졌기에 설령 몸이 돌에 맞아 죽더라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자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평강은 깨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를 생활 속에서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경건의 능력을 인정함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가지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나의 생활 현장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만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스데반 집사님처럼 되지 못하는 나를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이는 선한 싸움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경건의 삶이 이루어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자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하기에 결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산 사건을 보면 베드로는 변화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좋음의 빛을 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산 아래에서 바랐던 모든 일을 잊고 그 자리에서 살기를 바라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받아들일 때 베드로만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좋으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무엇인가 바라는 마음이 생기고, 무엇인가 부족하고 불만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하나님의 좋음을 가졌다면 그러한 바람이 생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매 맞고 발이 차꼬에 채워져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를 기억한다면 이상적이지 못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만을 가지고 자기를 기준에 놓은 자들에게서는 이러한 경건의 능력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경건의 능력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 부인할 때 나타나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고통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칼레포이(χαλεποί)는 성경에서 두 번만 등장하는 특이한 표현입니다. 이곳 외에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사용된 예가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에서 나와서 예수님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28절을 보면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몹시 사납다는 부분이 바로 칼레포이(χαλεποὶ)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염두에 두고 1절의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는 말씀을 풀어볼 수 있습니다. 말세가 언급되는데 이 맥락에서 언급되는 말세란 단순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아닌 예수님의 승천 이후로부터 재림까지 지속될 전체 기간을 가리킵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기에 극도로 위험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귀신 들린 사람이 극도로 사나웠기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세에는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경건의 모양만 남은 자들은 이와 같은 귀신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극도로 위태로운 상태이기에 이들로부터 돌아설 것을 요청합니다.
경건의 능력이란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을 때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경건의 능력을 계속해서 소개합니다. 그러나 경건의 모양만을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경건의 능력을 나에게 해당하는 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경건하지 못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선한 싸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마음은 몸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있음 대신에 세상 것들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음 대신에 세상 것들을 좋다고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향한 주권자 되심 대신에 자기가 주권자가 됩니다. 경건의 모양만을 따르는 동안에는 이러한 일에 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본래 귀신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유일하신 있음이시고 유일하신 좋음이시며 유일하신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주님께서는 그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귀신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무서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이름이 가리키는 진짜 하나님과 진짜 예수님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만나지 못했으면서 만났다고 칩니다. 이러한 마음이야말로 귀신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처소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만났을 때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일을 남의 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모양만을 띤 자들은 이것을 이상적인 상태이고, 타고난 사람들만 하는 일이고, 보통 사람인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깁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 베드로의 변화산 경험,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모습은 나에게는 나타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오직 하나님을 만났을 때만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인데 그러한 모습에 대해서 아무런 소망이 없고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 하나님을 만나고 실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지 않기에 그 마음은 귀신의 천국이 되어버립니다.
또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에 대해 애착을 갖고 추구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는 대신에 스스로 주권자가 되고자 합니다. 이러한 일에 제동장치가 없기에 나타나는 일이 2~4절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귀신이 들어와 주저함 없이 칼춤을 추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언급된 ‘사람들’이란 바로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러한 악행이 모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과 유일하신 좋음과 유일하신 주권자 되심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뜻과 주권이 끊임없이 내려오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과 주권을 향해 칼춤을 추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건의 모양을 뒤집어쓰고는 실제로는 귀신이 들려서 하나님의 사랑을 칼로 끊어내고, 하나님의 뜻을 칼로 끊어내고, 하나님의 주권도 칼로 끊어냅니다. 이러한 악행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아예 부르지 않는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악행이란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의 악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애착을 느끼는 정도가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지독하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경건의 모양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서는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실제 만남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세상 것을 얻기를 원합니다. 귀신은 이러한 자들의 삶과 인격을 에덴동산으로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는 것은 이토록 무서운 일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내 일로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비록 내가 부족하더라도 성경 말씀을 내 일로 생각해야 십자가를 붙잡고 선한 싸움을 할 명분과 동기와 이유가 생겨납니다. 내가 기준이 된다면 내가 바뀌는 것이 아닌 환경을 바꾸려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싸워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소개하는 대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지 않고 수용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 생활화에도 탄력이 생길 수 있음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경건의 능력을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성경에 기록된 이상적인 경건의 모습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모습이 되어 가는 놀라운 기적의 여정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